작가조명

 

나무늘보의 치열함

 

 

김성중 金成重

1975년 서울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에디 혹은 애슐리』, 중편소설 『이슬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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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가 생겼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래서 얻게 된 취미가 있는데 일에 하중을 받으면 책상에 거울을 올려놓고 흰머리를 찾아 뽑는 것이다. 이 행위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 결과 머리를 쓰는 대신 머리를 뽑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장욱 작가의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녹취를 풀면서, 폭염 속에 원고를 붙들고 있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흰머리를 뽑았다. 모름지기 흰머리란 히드라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의 목을 벤 자리에 세개의 머리가 돋아나는…… 사실, 내 머릿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장욱이 네번째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창비 2022)을 출간했다. 발표할 때마다 그때그때 읽은 단편도 많지만 책 한권을 천천히 통과하는 동안 난관에 봉착했다. 독자로서는 즐겁게만 읽어온 그의 소설이, 인터뷰를 앞두고 질문을 추출해내며 읽으려니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이장욱의 소설은 술술 잘 읽히지만 ‘감춰진 중심부’를 찾다보면 히드라처럼 질문의 연쇄다발을 몰고 온다. 그리고 질문은 끝이 나지 않는다. 결론 나지 않은 채 생각의 공회전이 이어진다. 아얏, 실수로 검은 머리를 뽑고 말았다.

희한한 것은 그다음인데 소설을 읽고 나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채로도 불만족스럽지 않다. 다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뭔가를 전달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묘한 감상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오래전 술자리 말석에서 건배한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를 길게 나눠본 적이 없으니 이번이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읽어도, 힘껏 당겨 읽어도, 어느 쪽으로든 탄성이 좋아 쭉쭉 늘어나는 이야기 주머니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고.

 

약력부터 되짚어보다 새삼 놀랐다. 늘 소설가 선배로만 생각하다가 시집과 이론서를 합쳐보니 1994년에 시로 등단해 첫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을 낸 2002년부터 올해까지, 이십년간 공백 없이 열네권의 책을 출간했다. 다섯권의 시집, 네권의 소설집, 세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산문집과 문학론집(집이 대체 몇채야!). 등단 십년이 넘은 시인이었던 그가 단편도 아닌 장편(『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문학수첩 2005)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줄곧 ‘시의 시기’나 ‘소설의 시기’를 따로 두지 않고 작업을 병행했다. 이 부지런한 행보에 대해 묻자 “게을러서 그렇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게으른 인간이라 다른 것을 해볼 궁리를 도통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장욱은 달변에 다변이다. 눌변에 말수가 적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 천만의 말씀. 질문의 논지를 파악하고 개념을 명확히 해둔 다음, 그러니까 사유의 진지를 제대로 구축한 다음 그 바탕 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펼쳐놓는다. 연구자로 오래 공부한 탓도 있지만 꼼꼼하고 논리적인 성격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았다. 덕분에 제구력이 엉망인 투수가 장황한 질문의 공을 던져도 그는 두툼한 글러브를 끼고 여유있게 받아주었다.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도 별다른 오류 없이 완벽한 문장이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는데,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두개의 주머니

 

아마도 그는 시와 소설을 함께 쓰는 창작에 관한 질문을 숱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처럼 주머니가 소설 하나인 사람은 반짝이는 비늘을 얻으면 즉시 그 주머니에 넣어두고 문장으로 출력할 궁리를 한다. 그런데 주머니가 두개인 사람은? 어디에 무엇을 넣을지 저절로 분화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저 주머니로 옮겨 담는 경우도 있을까? 심지어 그는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을 각각 발표한 적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하나의 영감에서 촉발된 시-소설 ‘쌍둥이’를 품고 있던 것일까? 상상할수록 너무나 신기하다.

 

시와 소설은 직관적으로 구분해 다른 ‘주머니’에 넣어두기는 합니다. 그런 건 별로 헷갈리지 않아요. 헷갈려도 큰 문제가 없기도 하고요. 주머니는 여럿일수록, 뒤섞일수록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을 발표한 경우에도 그 둘을 쌍둥이라고 친다면 일란성보다는 이란성에 가까울 겁니다. 제목만 똑같지 완전히 별개인 작품이니까. 가령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예전에 그런 제목으로 시를 썼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소설을 써서 발표한 뒤, 나중에야 생각나더군요.

 

시인으로 살던 그가 갑자기 소설로 또 등단한 배경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시절부터 줄곧 시와 소설을 함께 써왔고, 시집을 낸 이후에도 틈틈이 소설을 써서 투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라는 표현매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소설을 계속 쓴 이유는 무엇일까?

 

시로는 소화할 수 없는 소설적 욕망이 있으니까요. 소설은 시와는 종류가 다른 피드백을 줘요. 초창기에는 ‘시적인 소설은 안 쓸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의식적으로 서사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런지, 몸에 배어서 그런지 장르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아요. 저한테 소설은 끊임없이 ‘타인 되기’ ‘어떤 맥락이나 상황 속의 인간 되기’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을 재구성해보는 장’과 같아요. 소설을 쓰다보면 나와는 다른 존재를 자꾸 불러내게 되는데, 그 부분이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장욱은 소설 쓰기에 대해 ‘자신을 타자화시킨다’는 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는 서술자의 객관적 지위를 기질적으로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위치 자체를 의심한다. 어쩌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가장 거리가 먼 타입이 아닐까. ‘전지적’인 부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발화자를 세우고, 문제적 인물에게도 다채로운 해석의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기질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서술자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