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소설

 

‘이후’의 시간과 소설의 고독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고독을 감싸는 자연의 리듬

 

「제비를 기르다」(『문예중앙』 2006년 가을호)는 윤대녕(尹大寧)의 인장이 너무도 뚜렷한 작품이다. 우선 시원 회귀의 꿈을 부르는 은어의 자리에는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찾아왔다 9월 9일이면 강남으로 돌아가는 제비의 항해지도가 놓여 있다. 하면서 예사로운 철새의 생태로부터 인간 영혼의 지리지를 세련되게 전경화(前景化)하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장인적 솜씨는 일견 시대착오가 아닌가 싶게 낡아 보이는 ‘여자의 일생’ 이야기를 자연스런 소설의 리듬으로 감싼다. 삼월 삼짇날 아침에 태어나 평생 제비를 그리워하며 운명처럼 고독을 앓았던 강화도 여인, 소설 화자 ‘나’의 어머니가 그 주인공인데, 매년 첫눈 내릴 무렵의 불가사의한 출분처럼 이해받기 힘든 그녀의 일생이란 제비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너무도 일찍 ‘영원의 나라’를 보아버린 자의 자기처벌의 시간이었던 것. 이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강화도 드넓은 가능포 들판에 세워둔 채, 소설은 윤대녕의 저 유려한 연애담의 세계로 달려간다. 물론 이 두 세계는 원환처럼 맞물려 있으며, 그 원환은 닮고 반복되는 운명의 형식으로 소설에서 드러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어린 화자에게 들려준 말, “여자는 영원의 나라를 왕래하는 철새 같은 존재”라는 주문이 절대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바에야.

그 맞물린 원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어머니를 한편에 두고 두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이문희와 서문희. 작가의 장편 『미란』(문학과지성사 2001)이 두명의 미란(지명까지 포함하면 셋) 사이의 이야기인 것과 흡사하다. 하긴 누구나 언젠가 한번은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영혼을 놓아버릴 운명들이라면 씨는 다를지언정 이름이 같다고 무엇이 이상하랴. 게다가 우연의 개시는 윤대녕의 인물들이 합리와 계산가능성으로 틀지어진 지금의 세계를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출구가 아니던가. 이문희는 화자의 고향인 강화 읍내 시장통의 작부집 여인. 어머니로 인해 또다른 고독병을 앓던 아버지의 여자들 가운데 한명이었으며, 어린 화자에게 여자의 분 냄새를 알게 한 인물. 서문희는 소설 화자가 군에서 제대하던 날 서울행 버스에서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된 여대생. 남자친구의 면회를 왔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우연이며 운명적인 만남으로부터 20년에 걸쳐 펼쳐지는 두 사람의 긴 인연담과 서문희의 곡절 많은 인생살이를 마음의 흐름을 좇아 세월을 잇고 건너뛰며 요약해내는 윤대녕의 솜씨는 가히 천의무봉에 가깝다. 사실상 서문희의 ‘여자의 일생’인 셈이다.

그런데 서문희는 어쩌다 “영혼을 잃어버리고”는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고 두번이나 이혼하면서 평탄치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가. 자신의 말처럼 강화도 가능포 들판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보았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그 순간 서문희도 화자의 어머니처럼 저 먼 강남에 있다는 영원의 나라를 보아버린 것이고, 이제 전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긍정과 부정의 두가지 대답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에 「제비를 기르다」의 소설적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슨 이야긴가. 서문희와 소설 화자의 만남과 사랑의 실랑이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겪는 행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첫사랑을 찾아간 결혼이 실패하고 서른 나이에 “한물간 시골 술집의 작부”처럼 변한 서문희와 5년 만에 마주한 화자가 “우리는 춘천발 서울행 버스에 함께 타지 말았어야 했고 학교로 찾아가지도 말았어야 했고 (…) 또 그랬더라도 거리를 두고 조금씩 알아가면서 가까워졌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모든 걸 한꺼번에 빼앗겠다고 달려들었지.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말야” 하고 사랑의 미숙을 유치하게 자책할 때, 이 연애담의 실상은 오히려 확연해진다. 누구나 부딪치는 곤경에 불과했던 것. 그러지 않으려면 “영원의 나라에서 생을 거듭하지 말고 그냥 오래 머무”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이 제비가 돌아간다는 강남, 그러니까 태국으로 동반 여행을 떠나 기나긴 사랑을 나누고 온통 금박으로 뒤덮인 왓 찰롱 사원의 지붕 위에 몰려와 있는 한 무리의 황홀한 제비떼를 보았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갓 철새의 생태에 불과한 제비의 항로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현실의 구속이 있는 법. 작가는 제비 신앙의 사제격인 “어머니의 예언”을 짐짓 심각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헤어짐과 서문희의 결혼이 파탄에 이르게 된 과정의 비속함은 또 그것대로 보여주는 걸 잊지 않는다. 요컨대 작가는 초월적 지평과 비속한 일상 사이의 거리 혹은 아이러니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가령 “진흙 같은 고독” “가마솥 뚜껑이 열린 것처럼 하늘이 공허해 보였다” “썩어가는 감자처럼 마음이 점차 병들어가고 있었다” “오징어 먹물 같은 어둠 속” “단지 우물에 빠져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등등의 부러 다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불쑥불쑥 소설의 기본 어조를 조롱하는 듯한 지점도 이 거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중간 연극투의 대화가 자아내는 묘한 소격효과도 덧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