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등이 있음. aleph2006@daum.net

 

이근화 李謹華

시인.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등이 있음. redcentre@naver.com

 

 

왼쪽부터 이근화 양경언 양윤의

왼쪽부터 이근화 양경언 양윤의 Ⓒ 신나라

 

 

양윤의 안녕하세요. 이번호부터 양경언 평론가와 문학초점을 맡게 된 양윤의입니다. 오늘 초대손님으로 이근화 시인을 모셨습니다.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설레는 마음입니다. 새해를 여는 봄호 좌담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드네요.

 

양경언 문학작품을 홀로 읽고 생각에 잠기다보면 괜한 삼천포에 빠지기도 하고 생각을 하다 말 때도 있는데요, 두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보면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이근화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다룰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는데, 좋은 작품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점에 우선 기대가 큽니다.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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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의 먼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입니다. 이주란의 두번째 소설집인데요, 첫번째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민음사 2017)로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지요. 어떻게 읽으셨나요?

 

양경언 최근 여러 소설에서 1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가 싶을 만큼 에세이적인 어법도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요, 『한 사람을 위한 마음』도 고유한 ‘나’의 입장에서 소설을 풀어가는 면이 돋보입니다. 1인칭 소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계속 언급될 작품집이라는 예감이 들어요.

 

이근화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랄까, 조심스러운 말 건네기랄까, 그런 점들이 읽는 내내 굉장히 좋게 다가왔어요. 우리는 은연중에 고통이나 불안이나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희망과 낙관의 세계로 자신을 자꾸 이동시킬 것을 요구받는데 이주란 소설은 그러지 않아요. 「준과 나의 여름」에 화자가 지하철에서 본 여자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는데요. 옆자리의 여자가 내내 소리 죽여 우는데 “여자의 눈물 한 방울이 반바지를 입은 내 무릎에 떨어졌을 때 (…) 티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184면)라고 하거든요. 이 대목이 작가가 고통이나 상처를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우냐고 묻지 않는 것, 울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 작가가 이런 인물들을 잘 보여줘서 반갑고 고마웠어요.

 

양윤의 그런 ‘함께 있음’의 태도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어떤 ‘구성’을 의도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무-구성적이라고 할까, 비-구성적이라고 할까, 소설을 하나의 ‘잘-짜여진-플롯’의 관점에서 써내려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구성은 작품 바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작으로 읽히기도 하는 각 이야기의 배경에는 가시화할 수 없는, 그러니까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사건’이 그림자처럼 드리워 있는데요. ‘그 사건’ 이후의 일상을 묘사하면서도 정작 그게 어떤 일인지 정확히 서술하지 않는 이주란식 서술 방식이 독특합니다. 차마 말하기도 어려운 사건을 겪은 인물이 어떻게든 일상의 표면장력을 붙들고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을 덤덤히 보여줘요.

 

양경언 표제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언니의 죽음이 주인공에게 분명히 큰 상실을 안겼지만, 말씀처럼 소설은 또다른 사건이 배후에 존재한다는 점을 짐작하게 하며 흘러가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지요. 에둘러 가듯 자기를 달랜달까요. 알 수 없는 ‘그 사건’ 이후 시간은 고요히 고여 있고, 평화로운 풍경 사이로 날카로운 햇살이 찔러 들어오듯 괴로웠던 상황이 플래시백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대신에 한글자 한글자 글씨를 써내려가듯 자기 주변의 풍경들을 발견해나가는 데 집중해요.

 

이근화 소극적인 방식의 애도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이들은 고통을 섣부르게 위안하지도, 적극적으로 넘어서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근근이 버티는 모습이거든요. 그러면서도 줄곧 울어요.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딱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을 보면 언니 조수영이 동생 조지영의 자살 뒤 집에 찾아가 짐을 정리하려고 해요. 하지만 결국 정리를 마치지 못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건…… 미안해서였다”(179면)라고 하지요. 우리는 미안해서, 힘들어서 자꾸 뭔가를 시도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잖아요.

 

양윤의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곳곳에 있기는 한데, 그게 삶이 무너진다거나 절망에 사로잡힌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의미화되지는 않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런 특징을 전작과 비교해서 보고 싶습니다.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족서사였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하지만 그것이 결핍이나 불행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가족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이라고 할까, 어머니나 자매와의 관계나 여성 연대가 주요하고요.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도 어린 조카 송이의 눈에 주인공은 잘 우는 사람이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자연인 이모’이고, 말하자면 성숙한 어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언니를 잃은 주인공과 엄마를 잃은 조카가 맺는 이 관계는 어른이냐 아이이냐를 떠나 상실을 함께 겪는 자매애랄지 어떤 다정함을 보여줍니다.

 

이근화 가족이 그 전통적인 기능을 상실한 이후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것 같아요.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연대해야 하는지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서울 중심이 아닌 주변부 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까닭도 그래서일 테고요.

 

양경언 저도 인물이 조카나 다른 어린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이 흥미로웠습니다. 집 앞에서 노는 아이들한테 사탕을 가져다주려고 한다든지요. 아이들의 말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마치 동료처럼 여기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요. 엄마나 다른 여자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때론 서로 안 맞는 구석이 있어도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해가고요. 하지만 또다른 관계들을 보자면 이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라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는데요. 모두 ‘참는 나’의 모습이거든요. 예컨대 표제작에서 주인공이 학원 원장한테 큰 욕을 듣고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고 말없이 짐을 싸서 나오잖아요. 자기를 연민할 수 있는 상황으로 자꾸만 뒷걸음치는 건 아닐까, ‘참는 나’의 등장은 인물이 자기윤리를 실현해나가는 방식일 수도 있지만 자기연민으로 쉽게 빠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근화 비슷한 고민을 저도 해보았는데요,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나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조금 상식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기호나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반대의견을 피력하는 데 애쓰지 않지요. 화가 나도 그런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요. 확실히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은 아니에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모든 여성이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을 거예요. 저마다 자기 나름의 성장 환경과 교육 배경, 삶의 방식이 있는데 이를 한가지 잣대로 재단하기도 어렵겠고요. 얼핏 수동적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내면을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풀어낸 것은 작가의 주된 관심을 드러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건’은 안정되고 쾌적하게 살지 못하는 여성들을 관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적 고통은 공평하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득 진 리스(Jean Rhys)가 다락방 속에 갇힌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제인 에어』)을 다시 호출하여 소설(『광막한 싸르가소해』)을 썼던 것이 생각나네요.

 

양윤의 여성을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한명 한명의 개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작가는 ‘그 사건’을 직접 구체화해 말하지 않고 극히 제한적으로 필터링해 들려주는 서술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부분에서 양경언 평론가 지적처럼 자기미화적인 방향이 작동할 위험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한테는 이들의 눈물이 감상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이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사건을 겪고 폭력적인 언사들을 경험한 뒤 서울에서 변두리로, 고향으로 쫓기듯 돌아온 사람들이잖아요.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으로 돌아와 삶을 복원하려고 분투하는 모습인데, 위계를 거부하고 수평적 관계를 수립하려고 애쓰는 걸로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줄임표가 많은 소설을 무척 오랜만에 보거든요. 상당히 과감한 시도인데,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 말할 게 있다는 것, 그것이 말줄임표라는 정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양경언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H에게」를 배치한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화자는 “지금의 이 고통은 다 제가 자초한 일이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249면)다는 말로 시작해 자신의 삶을 죽 돌아봅니다. 그리고 회고의 마무리에 이르러서는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자기와 닮은 누군가를 연기하는 배우이기 싫다고 결심하지요. 아무렇지 않은 척 삶을 연기해온 것에 대해 “진절머리가 납니다”(275면)라고 고백해요. 화자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마무리인데요. 소설에 배경처럼 깔린 ‘그 사건’이 무엇인지, 그동안 구체적인 진술을 피해온 트라우마와 직면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면서 발돋움하듯 끝을 맺었다는 생각이에요.

 

양윤의 그렇다면 굉장히 의미있는 “진절머리”네요.(웃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읽는 내내 마치 저한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았습니다. 서른 중반의 여성들이라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자기 삶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대입해가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상의 여백을 품은 채 공감대를 형성하는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