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해자 金海慈

시인.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신철규 愼哲圭

시인.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음.

12340158@hanmail.net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왼쪽부터 정홍수 김해자 신철규 Ⓒ 신나라

왼쪽부터 정홍수 김해자 신철규 Ⓒ 신나라

 

 

신철규 안녕하세요. 이번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신철규입니다. 초대손님으로 정홍수 평론가와 김해자 시인을 모셨습니다. 궂은 날씨에, 특히 김해자 시인은 멀리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은 춥지만 따뜻한 이야기들이 오가면 좋겠습니다.

 

정홍수 2015년에 일년간 사회자로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게스트로 오게 되었습니다. 좌담 형식의 문학초점 지면이 독자들에게 호응이 있어 이렇게 오래 이어지는구나 싶습니다. 반가운 자리에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김해자 초대해주신 덕분에 좋은 시와 소설을 읽었습니다. 의미있게 나눌 만한 이야기로 무엇이 있을지 부담도 되었지만 두분이 계시니 편하게 참여하려 합니다.

 

 

최윤 『동행』(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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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먼저 최윤 소설집 『동행』으로 서두를 열겠습니다. 여기 실린 아홉편의 소설 중 두편은 2012년 발표작이니 10년 가까이 쓴 작품이 한데 묶였습니다. 상당히 묵직하면서도 원숙한 소설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정홍수 전반적으로 과거의 어두운 사건, 기억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급습하고 돌출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억압된 것의 회귀라 할 수 있겠는데, 많이 볼 수 있는 서사구조이기도 하지요. 차이가 있다면, 대개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대면하고 갈등과 조정 국면을 거쳐 어떻든 답을 내는 방향으로 꾸려진다면 최윤 소설은 인위적인 조정 없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내버려둡니다. 그러면서 그 자체로 ‘동행’하는 거죠. 이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인물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독자도 그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구조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물의 자기기만, 내적 균열의 양상도 주목할 만하고요. 드러난 이야기만으로는 모호한 지점이 많은데, 그 모호성이 인물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를 쉽지 않게 하면서 독자에게 일정한 비판적 거리감을 요구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도 스타일의 측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김해자 분명히 삶의 부조리가 존재하는데 ‘왜’라는 질문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해명되지 않는 타인의 죽음이나 어떤 사건 뒤에 이방인으로, 버려진 자로, 미아로 살아가는 ‘겨우’의 존재들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떤 틈을 발견하게 될 뿐이죠. 그런데 일단 틈이 있다면 그곳으로 빛이 한가닥이라도 들어올 여지가 생기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틈이란 다시 꿈꿀 수 있는 첫 단추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홍색 상의를 입은 여자」(이하 「분홍색」)가 단연 슬프고 여운이 긴 작품이었어요. 과거에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만난 한 여인이 병든 몸으로 돌아왔을 때, 화자는 수많은 헛소문을 뒤로하고 이 여인의 육체성과 존재성에만 주목해 그녀와 함께해줍니다. 화자 자신도 그녀의 ‘분홍색’과 관련된 무의식적인 환기 덕분에 자살 결심을 내려놓은 적이 있지요. 이러한 고통의 연대와 울림이 제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했어요. ‘왜’라고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옆에 있어주는 일의 소중함이랄까요. 이 작품에서 사진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예술이 사람에게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을 줄 수 있는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개별자들이 엮이는 총체적인 시선도 필요하고 사회적·경제적인 의제로서 가난이나 약탈을 논할 필요도 있겠지만, 동시에 통증 곁에 있어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우리 사회를 함께 숨 쉬는 공동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신철규 아픈 기억을 대면해야 하는 주체의 통증, 그리고 말씀하신 동행의 의미가 이 소설집의 키워드 같습니다. 특히 통증의 존재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표제작을 비롯해서 작중 인물들이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주목해볼 만합니다.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거나 나았다기보다는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자세를 보여주는데, 그게 단순한 긍정하고는 조금 다른 결이에요. 저는 이 소설들의 결정적 장면에서 전도된 셰에라자드(Scheherazade)를 봅니다.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죽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어지는 말하기와 고백. 「동행」과 「옐로」가 대칭적인 구조로 읽히는데, 전자가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앞쪽에 배치되어 그것이 해결되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을 뒤쪽에 배치하여 그것이 왜 고백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삶에서 자신과 무관한 결락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으며, 어떤 삶의 내력 앞에서 이해받지 못할 바는 없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걸까요.

 

정홍수 개개인의 삶에는 설명하기 어렵고 규정되지 않는 아픔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손수건」을 보면 알 수 없는 스토킹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과거 기억 속에서 갑자기 낯선 남자의 뒤를 밟고 그 집에 따라 들어가서 한없이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울 퍼즐: 잠수교의 포효하는 남자」에는 다리 위에서 고함을 지르는 남자가 등장하고요. 울음을 터뜨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이 느닷없는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우리는 왠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흔히들 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사회적·개인적 근원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통증 자체의 낯선 제시에 주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역으로 고통의 연원을 개인과 사회 전체에 걸쳐 폭넓게 생각하게 만들어요. 섬처럼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의 고독, 아픔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확인되는 지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신철규

신철규

신철규 「옐로」에서 화자는 친구 정아와 그녀의 어린 딸과 함께 사는데, 정아는 미성년 성폭력범인 슈퍼집 아들과 가깝게 지내며 심지어 집 안에 들여 밥을 먹이고 검정고시 공부를 가르쳐줍니다. 납치 피해 경험이 있는 화자로서는 그런 정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래도 견뎌내는 모습이에요. 이러한 두 사람을 통해 작가는 모든 것이 다 소통되고 이해되는 차원의 연대보다는 병렬적인 상태로서의 ‘함께 있음’을 그리는 것 같습니다. 정아와 청년의 대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는 묘사가 특징적인데, 층이 나뉘어 있어도 소리는 들려오듯이 일종의 감각의 교환을 통해서 희미하게 연결되는 관계 맺기 방식이 드러납니다.

 

김해자 저는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집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사소한 일 같지만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옐로」와 「분홍색」이 그렇고 「동행」에서도 훗날 자신을 해치게 되는 폭력적인 청소년을 집에서 돌보잖아요. 이때 주인공은 모두 중년 여성이에요. 이들은 “굶어 죽지는 않”(「분홍색」 92면)을 정도로만 먹고살 뿐이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배회하기에 정주할 만한 진정한 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성들이 낯선 자를 선입견 없이 환대하고 돌보는 모습은 가부장적인 의미에서의 여성과 집의 연결과는 다른 것 같아요.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소유하고 전시하고 나아가 분쟁의 대상으로 만드는 「소유의 문법」 속 남성들과도 사뭇 다른 차원이고요. ‘하우스’와 ‘홈’은 다르잖아요. 심리적·정서적으로 힘겨울뿐더러 물질적인 여건조차 희박한 이들이 타자를 받아들이며 자기 상처와도 마주하고 살아갈 힘을 발견하게 되는 연대를 통해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정홍수 「소유의 문법」과 관련해서는 제가 다른 지면에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만, 특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욕망과 질투로 불행해진 어느 계곡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나’의 진술에는 뭔가 미묘한 어긋남이 엿보입니다. 발달장애를 앓는 딸을 두고 서두에서 “우리는 딸 덕분에 행복한 생을 누리고 있다”(232면)라고 말하는데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요. 동시에 소설의 첫 문장은 “우리 가족은 어떤 면으로 보아도 그 아름다운 계곡에 위치한 전원주택에서 삶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다”(231면)라고 되어 있으니 모순되는 겁니다. 몇분씩 지속되는 딸 동아의 고함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이 고함이 혹 어떤 경고라면, 그 경고의 대상에서 ‘나’는 빠져 있는 걸까요. 화자의 진술에는 계속 무언가를 덜 말하고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회상을 마친 소설의 끝부분, “물론 그때만큼 빈번하지는 않아도 어엿한 숙녀가 된 동아가 고함으로 우주에 전언을 보낼 때의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 편에서는 절실하고 보는 우리는 애달프며 그 느낌은 늙을 줄을 모른다”(265면)라는 대목에는 몇년 전 계곡에서 벌어진 일, 그러니까 소설의 중요한 사건을 무화시켜버리는 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 편에서는”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장은 세개의 진술 층위가 뒤섞인 이상한 문장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 ‘나’는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아닐까요? 서술 스타일의 측면에서 볼 때 불안과 균열, 모순을 축조해놓은 게 이 작품의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균열이 성공적으로 구현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다만 이러한 모호성의 효과가 소설집 전체에서 반드시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동행」을 보면 갑자기 나타난 소녀를 둘러싼 정황 등 쉽게 납득하기 힘든 서사의 공백이 있고, 「옐로」에서도 주인공의 납치와 관련된 이야기의 개연성이 지나치게 희미한 편이에요. 이런 부분은 소설적 충실성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철규 「애도」에 나오는 “너는 때때로 이야기된 것과 이야기 사이의 거리에 저항한다”(314면)라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이야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최윤 소설은 결코 메울 수 없는 삶의 결들을 감각적이고 약간은 충격적이면서 낯설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나 자신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가까스로 타자에게 다가가며, 이것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통로가 될 겁니다. 그렇다 해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아니 침입하는 불행들이 최소한 주인공(화자)의 행위에서 유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그 불행의 원인을 사회적인 구조 안에서 찾거나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답답하고 막막해지기도 했어요. 사건적 개연성의 빈자리가 검은 동공(洞空)처럼 남아 있지요. 이러한 사유의 전개는 결국 어떤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귀결될 위험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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