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정용준 鄭容俊

소설가.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 등이 있음. sfcyjlove@naver.com

 

최정례 崔正禮

시인.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Instances』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등이 있음. ch2222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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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정례, 정용준, 신샛별. Ⓒ신나라

 

 

신샛별 안녕하세요. 2018년 상반기 문학초점을 최정례 시인과 함께 맡았습니다. 봄호에는 정용준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각자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최정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처음인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덕분에 시와 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게 돼서 바빴지만 몰입의 시간이 참 좋았어요.

 

정용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겨울의 몇 안 되는 목표 중 하나가 독서였는데, 좋은 기회 혹은 핑계가 생긴 것 같아 참여하게 됐습니다.(웃음)

 

 

이해존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실천문학사)

 

179_360신샛별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해존 시인의 첫번째 시집입니다. 수차례의 손질을 거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시편들이 묶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정례 이해존 시인은 오랫동안 편집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먼발치에서 고개 숙이고 일하는 모습만 봤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요. 사실은 시를 쓰는 줄도 몰랐어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었고요. 이번 시집을 읽는 중에도 ‘필경사 바틀비’처럼 항상 고개 숙이고 일만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더라고요. 특히 「옆구리」 「감별사 K」 「공평한 어둠」 같은 시에서요. 혼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고 있겠구나 짐작은 되는데 그런 삶의 모습들이 전면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파편으로만 언뜻언뜻 흩어져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입자」 「녹번동」 「고시원」 같은 시에서는 우리 사회·경제의 고질적 문제가 한 개인의 거주공간에 어떤 폭력을 가하는지 여실히 드러나지요. 요즘 비싼 집값 때문에 갈 곳 없는 이들이 변두리로, 더 열악하고 좁은 방으로 전전하는 일이 허다하잖아요. 시인은 몸 하나 편히 누일 공간 없는 비극을 직설적으로 고발하지 않아요. 점묘하듯이 슬쩍슬쩍 엮어 넣지요. 그림자처럼 비치는 그런 장면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신샛별 등단작 「녹번동」은 저도 유심히 봤습니다. 세 들어 사는 작은 방에 유폐된 상태를 백족(百足), 즉 지네라는 상관물을 등장시켜 표현했더라고요. 다리가 백개나 있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을 1절에서 보여주고, 2절에서는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라는 구절을 통해 상처 입은 시적화자의 괴로움과 울부짖고 싶은 심정을 토해내요. 그리고 마지막 3절에서는 침수로 젖었던 동네가 햇빛에 세간을 내다 널고 삶을 복구해나가는 이미지들이 나열되는데, 미약한 생의 의지와 탈출에 대한 희미한 기대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협소하고 남루한 공간에서 느끼는 절망을 강렬하면서도 아프게 전달하고 있어요.

 

정용준 저는 이분의 시가 굉장히 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걸 썼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과 감각의 결과물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점이 무척 좋았어요.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가 객관적인 상황으로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끝내 사적으로 만들어서, 작가의 정서 안에 들여놓고 해소해내요. 저는 시를 읽을 때 내용과 단어, 시인의 생각·사상·가치관·의도보다 우선 시인의 문체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로서 언어가 느껴지는 걸 좋아해요. 사적이라는 건 이런 의미요. 읽는 내내 시인을 만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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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최정례 이 시인은 시를 통해 투쟁하거나 고발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아요. 시를 전개할 때도 진술의 방법을 쓰지 않고 묘사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는 드러내려 하지 않고요. 사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오랫동안 한국 시가 사회적 고발을 열정적으로 했잖아요. 그러나 시를 고발의 수단으로써만 사용한다면 목적 달성 이후에는 시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거나 그 목적의 시녀 이상이 될 수 없겠지요. 즉 시는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이해존 시인은 이미 잘 파악거지요.

 

신샛별 그런 점에서 「수상한 사과」와 「유목의 방」이 흥미롭습니다. 「수상한 사과」는 어 과일행상의 자살 뉴스의 영향하에 썼고, 「유목의 방」은 고시원 옥상에 설치된 천막 휴게실에서 이주노동자와 교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시인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요. 그같은 배후의 사연이나 경험이 시에 드러나지는 않아요. ‘현실이 잘 반영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최정례 시인 말씀대로 의도된 것이라면 하나의 기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초점화가 잘 안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용준 초점화가 잘 안 되어 있기도 하고 사적인 감정조차 희미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감정을 감추는 거죠. 고시원에서의 삶이나 사회적 사건에서 시상이나 소재를 끌어오는데, 그것을 시적화자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희미해요. 하지만 그런 미지근한 느낌이 좋아요. 세계에 대해 내가 느끼는 슬픔과 시적화자가 느끼는 슬픔이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없는 흐릿함이요.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흐릿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반면 「확실한 거실」에서 “창문이 창문을 바라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발상과 전개는 잘 는 감정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익숙하면서도 친근했달까요. 약간 고전적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요.

 

최정례 우리나라의 심각한 부동산 문제를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 읽는다면 현실이 아니라 상상의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내 키만 한 곳에 창을 단 골목을 지나 주인집 대문을 열면, 또 다른 골목으로 창을 낸 내 방으로 통한다 사방 처마가 전깃줄을 끌어내려 밑동을 땅에 묻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전봇대, 그 어지러운 전깃줄의 수혈이 아니고는 이곳은 난청이다”(「이곳은 난청이다」). 그런데 상상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참담한 주거환경이잖아요. 굉장히 리얼 현실인데, 그 현실을 문제 삼는 시인은 많지 않지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신샛별 이 시인에게 빈곤을 비관한 자살이라든가 참담한 주거환경 등 이른바 사회적 사안들은 삶의 기본전제라 자신과 분리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어느 정도냐면 그런 사안들을 독자가 시에서 감지할 수 없을 만큼으로요. 시인의 고통과 세계의 척박함이 일체화돼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시인과 세계 사이에 적절한 거리가 설정될 때, 달리 말해 세계와의 대자적 관계가 맺어질 때, 이런 종류의 시가 추구하는 정서적 효과가 독자에게는 더 잘 발휘되지 않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피사체와 무작정 가까워져서만은 안 되잖아요. 「수상한 사과」나 「유목의 방」의 경우 시인이 세계와 너무 밀착돼 있어서 독자의 눈에는 오히려 상이 잘 맺히지 않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 시편들에서 모종의 절실함을 느꼈지만 정작 무엇에 대한 절실함인지는 끝내 뿌옇게 보였어요.

 

정용준 시인이 척박한 세계 속에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거죠. 저는 소설가여서인지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을 먼저 봐요. 세계가 척박할수록 인물은 상황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시의 화자들은 순응적이에요. 이 순응은 비겁함과는 다른데, 어떤 포기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감각이 살아 있요. 그러나 감각만 있기 때문에 어떠한 주장도 강하게 하지는 않는 거죠.

 

최정례 시인이 개인의 비극적 생활상을 내보이며 진부한 고발 형식으로 주장했더라면 자해공갈단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면 계몽적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고요. 일상 속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려면 진술적 주장보다는 묘사가 더 효과적일 거예요. 그것이 체념적 태도로 보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이런 적나라한 체념상태가 주장이 할 수 있는 효과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큰 목소리의 주장보다 체념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슴 아프거든요.

 

정용준 제게는 ‘시인’에 대한 세 종류의 이미지가 있어요. ‘분노하는 사람’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 ‘슬픈 사람’이요. 이해존은 슬픈 시인 같아요. 전 슬픈 시인이 쓴 시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을 끝까지 읽으며 자조적인 것 이상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시선이 머무는 자리 하나하나를 넘어선 부분이라든가, 아니면 내적인 가치판단 같은 거요. 시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라는 뜻이 아니라 시적화자가 갖는 감정의 정체가 더 드러나길 바라는 거죠.

 

최정례 「이미테이션」에서는 세상 모든 걸 가짜라고 봐요. 가짜가 주인인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이 시에서 시인의 문학관이나 인생관이 드러나요. 모두가 가짜인 거죠. 이 가짜들과 사는 방법은 하는 일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실존적인 대화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치 시시포스처럼요. 그렇게 보면 ‘순응’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정용준 저도 「이미테이션」에 실존적인 모습이 투영돼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