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인종차별주의, 근대의 쌍생아

오스트리아 새 정부의 출범을 지켜보며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뉴욕주립 빙엄튼대학 사회학 교수 겸 페르낭 브로델 쎈터 소장. 1930년생. 속간중인 『근대 세계체제』(1〜3권 간행)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유토피스틱스』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고, 본지에도 103호 특별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에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유럽중심주의와 그 화신들」 등의 글을 발표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월러스틴이 2000년 3월 9일 빈대학에서 행한 강연 원고이다. 이 강연의 직접적인 계기는 외르크 하이더가 이끄는 인종차별주의 경향의 오스트리아자유당이 선거에서 예상외의 높은 득표를 하여 새 정부에 참여하게 된 사건이다. 월러스틴은 이 사건을 실마리로 삼아 서구 인종차별주의의 역사적 뿌리와 그 현상형태를 4개의 시간틀로 나누어 추적하는 한편 이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 사회과학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함께 탄생하여 그 구성적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향후 좀더 나은 세계체제를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사회체제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 강연은 월러스틴의 투철한 역사인식, 예리한 분석력, 그리고 사회과학자로서의 높은 도덕적 책임감을 잘 보여준다. 이 강연은 ‘쓸모없는 것의 필요성에 관하여─사회과학과 사회’(Von der Notwendigkeit des Überflüssigen─Sozialwissenschaften und Gesellschaft)라는 빈대학의 강연씨리즈 가운데 하나였으며, 원제는 ‘인종차별주의의 앨버트로스: 사회과학, 외르크 하이더, 그리고 저항운동’(The Racist Albatross: Social Science, Jörg Haider, and Widerstand)이다. 원문은 페르낭 브로델 쎈터의 홈페이지 논문란(http://fbc.binghamton.edu/iwvienna.htm)에서 받아볼 수 있다.


 

 

“당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마귀들로부터

신이 당신을 구원하기를, 늙은 뱃사람이여!─

왜 그런 표정을 짓소?”─“석궁(石弓)으로

내가 앨버트로스를 쏘았다오.”

─S.M. 코울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79〜82행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에서 배 한척이 강한 바람에 휘말려 길을 잃고 불순한 기후대로 들어갔다. 선원들의 유일한 위안은 양식을 얻어먹으러 찾아온 앨버트로스(신천옹)였다. 그러나 코울리지의 뱃사람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어쩌면 순전히 오만 때문에─이 새를 쏘았다. 그 결과 배에 탄 모든 이들이 고난을 겪었다. 신들은 이 악행을 벌주었고, 다른 선원들은 그 뱃사람의 목에 앨버트로스를 매달았다. 우정의 상징인 앨버트로스는 이제 죄의식과 치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 뱃사람은 그 항해의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여생을 자기가 한 짓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보냈다. 살아 있는 앨버트로스는 낯설고 머나먼 땅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연 타자(他者)이다. 우리의 목에 걸려 있는 죽은 앨버트로스는 우리가 물려받은 오만의 유산, 즉 우리의 인종차별주의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어, 평화를 얻지 못한다.

나더러 빈에 와서 ‘이행의 시대에서의 사회과학’에 관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은 지 1년 이상이 지났다. 내 강연은 ‘쓸모없는 것의 필요성에 관하여─사회과학과 사회’라는 제목의 씨리즈 가운데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세계 사회과학의 건설에, 특히 ‘꿈과 현실’의 시대라는 1870〜1930년(10년 전쯤에 빈에서 1870〜1930년의 빈 문화를 회고하는, ‘꿈과 현실’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전시회가 열렸다─옮긴이)에 영광스런 역할을 맡았던 그 빈에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빈은 내가 20세기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믿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본거지였다. 적어도 그가 말년에 나찌의 강압 때문에 런던으로 도망치기 전까지는 빈이 그의 터전이었다. 또한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와 폴라니(Karl Polanyi)도 그들 생애의 중요한 한 시기에는 빈이 터전이었다. 현저하게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지닌 이 두 사람은 비록 합당한 인정과 찬양은  받지 못했지만, 내 생각으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학자들이었다. 그리고 빈은 내 은사인 파울 라짜르스펠트(Paul Lazarsfeld)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마리 야호다(Marie Jahoda)와 한스 짜이젤(Hans Zeisel)과의 공동연구서인 『마리언탈의 실업(失業)』(Arbeitlösen von Marienthal)에서 처음으로 정책지향 연구와 선구적인 방법론상의 혁신을 결합했다. 내가 오기로 한 곳은 바로 이런 빈이었다.

그런 가운데 아시다시피 지난번의 오스트리아 선거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자유당(FPÖ)의 정부 참여라는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유럽연합(EU)의 다른 국가들은 이런 정권의 변화에 강력히 반응하였고, 오스트리아와의 쌍무관계를 중지했다. 나는 그래도 와야 할지 숙고했고, 망설였다. 내가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단히 가시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다른 오스트리아’에 대한 나의 연대를 확실히해두고 싶었다. 그러나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나는 사회과학자로서 나 자신의 책임을 지려고 왔다. 우리는 모두 앨버트로스를 쏘았고, 앨버트로스는 우리 모두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고 재건하여, 다른 종류의 역사적인 체제, 즉 근대세계를 그토록 심하게 그토록 악랄하게 괴롭힌 인종차별주의를 넘어설 체제를 창조하기 위해 고투해야 한다. 이런 연유로 나는 내 강연의 제목을 새로 붙였다. 새 제목은 ‘인종차별주의의 앨버트로스: 사회과학, 외르크 하이더, 그리고 저항운동’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일들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여러 대의 의회를 거치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두 개의 주요 기간정당, 즉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SPÖ)과 오스트리아인민당(ÖVP)의 거국적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전자는 중도좌익이고, 후자는 중도우익이며 기독교민주주의 정당이었다. 한때는 압도적이었던 이 두 정당의 연합 득표수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하락했다. 그러다가 1999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처음으로 득표에서 2위로 부상함으로써 겨우 몇백 표 차이이긴 하지만 인민당을 앞질렀다. 그후 다시 한번 거국적인 연정 구성을 놓고 두 주류정당간에 벌어진 논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인민당은 연정 상대로 자유당에게 눈을 돌렸다. 인민당의 이 결정은 클레스틸(T. Klestil) 대통령을 포함한 오스트리아 내의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인민당은 끝까지 밀어붙였고, 그 결과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결정에 다른 유럽연합 국가의 정치지도자들도 반발했는데, 놀라기도 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와의 쌍무관계를 중단하기로 집단적으로 결정했으며, 이런 조치의 적절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있었음에도 유럽연합은 이 입장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이런 행동이 이번에는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여기에는 현정부의 구성을 지지한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한 사람도 다수 포함된다. 후자 중 다수는 유럽연합이 자유당의 정부 참여에서 기인하는 위험들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더는 히틀러가 아니다”라는 것이 이 입장의 통상적인 공식이었다. 그밖의 사람들은 하이더 같은 사람들을 유럽연합의 모든 국가에서, 심지어 어느정도는 그들의 정부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럽연합이 그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일부 오스트리아인들은 (일부 다른 유럽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연합이 취할 적절한 행동이란 좀더 두고보는 것이며, 만약 오스트리아의 새 정부가 기어코 뭔가 비난할 만한 짓을 한다면, 그때 비로소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오스트리아 자체 내에서 ‘저항운동’이 출범하였고, 이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내가 분석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정당으로서의 자유당과 그것이 표방하는 바가 아니라, 이 정당의 오스트리아 정부 참여에 대한 유럽연합의 강경한 반응과 이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대응반응 및 저항운동이다. 이런 반응이나 대응반응이란 모두, 우리가 분석의 촛점을 오스트리아 그 자체로부터 전체로서의 세계체제, 이 체제의 현실, 그리고 사회과학자들이 이 현실에 관해 지금까지 우리한테 해온 이야기로 이동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런 좀더 큰 맥락을 4개의 시간틀─즉 1989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1945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1492년 이래의 근대 세계체제, 그리고 2000년 이후의 근대 세계체제─속에서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론 상징적인 날짜지만, 이 경우 상징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 덕분에 현실과 현실의 인식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통해 내가 오스트리아의 저항운동에 연대를 표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또 사회과학자로서의 나 자신의 도덕적·지적 책임을 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1989년 이래의 세계체제

 

1989년에 이른바 사회주의 블록의 국가들이 붕괴되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얄따협정)의 견제를 받아오던 중·동부 유럽의 나라들이 사실상 소련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율성을 내세웠고, 곧 저마다 자국의 레닌주의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2년이 안되어 소련공산당 자체가 해체되었고, 실로 쏘비에뜨사회주의연방(USSR)이 15개의 구성 단위로 쪼개졌다. 동아시아와 꾸바에서는 공산주의국가의 행로가 달랐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동유럽사태가 세계체제의 지정학에 초래한 결과가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1989년 이래, 이들 예전의 공산주의 나라에 세계적 이목이 많이 집중되었다. 이른바 ‘이행’에 관한 사회과학자들의 학술회의가 끝없이 이어져, 이제는 ‘이행학’(transitology)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이전에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을 구성하던 지역과 소련의 꼬까서스 지역에서는 상당수의 아주 고약한 내전이 있었는데, 몇몇 경우에는 외부의 강국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이런 폭력을 ‘종족정화’와 같은 표제 아래 분석하였는데, 이 현상이 장기간 지속된 종족간 적대행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심각한 내부폭력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체코공화국, 헝가리, 그리고 발트해 연안국과 같은 국가에서조차, 종족간 긴장이 되살아날 조짐을 일러주는 불쾌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가장 명백한 경우만 꼽아도, 비슷한 성격의 내전이, 저강도 내전뿐 아니라 전면적인 내전이 인도네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줄곧 일어났다.

이런 내전에 대해 범유럽세계(나는 이 용어를 서유럽에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럴레이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및 그 부근의 남태평양 섬들─옮긴이〕를 추가하되 중·동부 유럽은 제외한 지역의 뜻으로 사용하겠다)에서 진행된 분석의 핵심은 이 국가들은 시민사회가 취약할 것이며 역사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낮을 것이라는 데 있었다. 서유럽의 신문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산주의 이후’의 세계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 예전 공산주의 지역들에 대한 관심이 사실은 얼마나 ‘문제’에 촛점을 맞춘 것인지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제’란 것이 사실상 이 지역들에서는 범유럽세계에서 발견되리라고 짐작되는 높은 수준의 근대성이 부재하다는 사실로 정의된다.

한편 1989년 이래 범유럽세계 자체에서 무엇이 변했는지에 대한 관심─언론, 정치가들, 그리고 특히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얼마나 미미했는가는 이 못지않게 눈에 띄는 일이다. ‘냉전’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국가적 논리를 구축했던 정권들은 자기들이 40년간 유지해온 합의가 이제는 유권자한테나 정치인 자신들한테나 무의미하게 보인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한 것이다. 냉전이 없다면 이딸리아에서 영원한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을 중심으로 5당체제(그리고 그에 따른 뇌물정치)를 구축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제 프랑스의 드골 정당이나 심지어 독일의 기독교민주연합을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미국의 공화당이 왜 ‘초당적인 외교정책’이라는 속박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하는가? 이런 식의 자기의심의 결과로서, 범유럽세계의 주요 보수정당들이 새로운 극단적 경제자유주의와 이보다는 좀더 사회적인 보수주의─국가가 시민의 타락한 도덕성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보수주의든,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온정주의적 관심을 그나마 아직 지니고 있는 보수주의든─사이의 분란으로 마구 찢겨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당내의 파벌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 지지자들은 이런 분규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수입이 심각하게 위협받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중도좌익의 정당은 어떠한가? 이런 정당 역시 곤경에 처해 있다. 사실 공산권의 붕괴는 구좌익의 세 가지 주요 형태들─공산당·사회민주당·민족해방운동─모두에 대한 환멸, 1968년 세계혁명이 극적으로 알려준 환멸이 확산되어 절정에 이른 결과였을 따름이다. 이 환멸은 바로 이 운동들의 정치적 성공의 결과, 즉 이 운동들이 세계 곳곳에서 국가권력을 쟁취한 결과였는데, 이는 그렇게 역설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집권을 하자 이 운동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자신들의 공약을, 국가권력을 쟁취하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또 건설하고 말겠다는 공약을, 즉 사회를 좀더 평등주의적이고 좀더 민주적인 세계의 방향으로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공약을 끝까지 실천할 능력이 사실은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구좌익이란 일차적으로 사회민주당을 뜻했다. 그런데 1968년부터 이미 그랬지만 1989년 이후에 좀더 확실하게 나타나는 사태는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사회민주당에 표를 던질 수는 있어도 이 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때 어느 누구도 거리에 나와 춤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회민주당이 혁명을, 심지어 무혈혁명이라도 일으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환멸을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이니, 이들은 ‘중도세력’이라는 중도주의의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구좌익 정당 내의 이런 환멸과 함께 국가구조 자체로부터의 일탈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국가를 관대하게 대했고 심지어는 잠재적인 사회변혁 기구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제 국가는 무엇보다 부패와 불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하는 기구로, 더이상 시민의 보루가 아니라 시민의 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서술에서 오스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