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한일병합’ 100주년에 즈음하여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일본 토오꾜오(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양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등이 있음. miyajimah@skku.edu

 

* 이 글의 원제는 「日本史認識のパラダイム轉換のために- ‘韓國倂合’ 100年にあたって」이며, 일본 잡지 『시소오』(思想) 2010년 1월호에 실린 글에 필자가 한국 독자를 위한 머리말을 추가하고 본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宮嶋博史 2010/한국어판 ⓒ 창비 2010

 

 

머리말

 

이 글은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일본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기 위해 기획된 『시소오』(思想) 2010년 1월호에 게재된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창비 독자를 위해 『시소오』 특집호와 졸고의 취지, 그리고 특히 이 글에서 비판한 일본 역사학계의 문제점이 결코 한국의 역사학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주지하듯이 일본에서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근대 일본의 아시아 및 한국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려는 태도가 사회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근대 일본의 역사를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국이나 중국 등의 지적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실상이다. 공영방송인 NHK가 시바 료따로오(司馬遼太郞)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를 2년에 걸쳐 방영하고 있다는 것에서 일본의 현주소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대국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 찬가라고 할 수 있는데, 러일전쟁이 한국에 대한 침략전쟁이기도 했음에도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에서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를 해온 연구자(일본인뿐 아니라 일본에서의 한국사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온 재일조선인 연구자도 함께)가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는 것이 『시소오』 특집의 목적이었다. 이 특집을 위해 2년에 걸쳐서 집필 예정자들이 연구회를 꾸리고 서로의 논문 내용에 대한 토론도 진행해왔다. 그러한 노력의 덕분인지 이 특집호는 간행되자마자 품절되어 증쇄하게 되었다. 집필자들에겐 기쁨이자 일본 현실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게 해준 일로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특집 가운데 졸고는 일본 역사인식의 문제점으로서 근대 이후에 대한 것뿐 아니라 일본사 전체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아 전근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주로 검토대상으로 삼은 연구자들은 실은 일본 역사학계에서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에 선 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분들은 예컨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된 비판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분들이야말로 일본 역사학계를 이끌어왔고 지금도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어서 여기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독자들의 정확한 이해를 바란다.

또한 이 글에서 지적한 일본 역사학계의 문제점이 한국 학계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짧게나마 말해두고 싶다. 필자는 일본 역사학계의 동아시아 인식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유교 혹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사회체제에 관한 인식 부재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주자학과 성리학에 대한 인식이 그 전형적인 경우다. 조선왕조에서 성리학이 국가이념의 지위를 얻게 된 점은 모든 교과서에서 기술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상이며 왜 조선시대에 와서 이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거의 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역사교육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유교와 성리학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은 혹시 일본인 학자들이 외쳤던 ‘유교망국론’의 잔재는 아닐까.

 

 

1. 일본의 주변화와 패러다임 전환

 

현재 일본이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바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 전환의 본질적인 내용은 일본이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적 지위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한일병합’이 강행되었던 100년 전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후 2차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서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종속적 동맹자로서 동아시아에서의 중심적 지위를 계속 점하게 되었던 일본은, 이제 냉전의 종결과 중국의 부활이라는 상황에서 다시 동아시아의 주변국이 될 게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다시라고 말하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위가 주변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병합’을 역사인식의 문제로서 파악하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인식을 지배해온 패러다임인 ‘동아시아의 중심으로서의 일본사’라는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자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종래의 패러다임이 약간 수정된 채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동아시아의 주변부로서의 일본사’라는 시각에서 지금까지의 일본사 이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2. 패러다임 전환의 기축으로서의 유교 인식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구상한다고 할 때 그 전환의 기축이 되는 것은 유교 혹은 유교모델에 대한 인식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주변적 위치에 처해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의 최대 근거는 일본의 유교모델 거부에 있다는 점,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뛰어오를 수 있었던 것도 유교모델로부터 일본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 더 나아가 글로벌리즘이 석권하는 오늘날 유교모델 수용의 역사적 경험의 부재라는 조건이 일본의 진로를 크게 제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점 등의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 유교모델이라 함은 유교〓주자학을 이념으로 내걸고 그 이념의 실현을 지향한 국가, 사회체제를 말한다. 그 핵심은 유교에 관해 깊은 지식을 가진 자를 과거를 통해 선발하고 그들이 국가통치를 담당케 하는 것, 그리고 통치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예(禮)’를 위치 짓고 철저한 ‘예치(禮治)’를 꾀한다고 하는 두가지 점에 있었다. 중국 송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이 모델은 중국에서는 명대에 확립되었고, 조선에서는 조선왕조의 성립을 계기로, 또 베트남도 여조(黎朝)시대에 들어 유교모델 수용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류우뀨우(琉球)왕국의 경우에는 약간 늦었는데, 17세기 초에 사쯔마번(薩摩藩)을 통해 토꾸가와(德川)정권의 지배하에 들게 된 이래 유교모델의 의식적 수용이 추진되었다. 이같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점차 유교모델의 수용을 추진했으나 그중에서 일본만이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1) 토꾸가와시기 유학자의 유교모델 인식

일본에서의 유교모델 거부 혹은 부재라는 사태는 일본의 정체성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 단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토꾸가와시대의 유학자들의 예를 들 수 있다. 주지하듯이 토꾸가와시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일본을 중국의 고전에 묘사되어 있는 ‘봉건제’ 사회라고 파악해 ‘군현제’인 동시대의 중국보다도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조선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도 고전적 봉건제와 군현제를 기준으로 현상을 파악하는 의론이 존재했다. 일본에서의 논의가 정치체제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는 봉건제를 종법주의(宗法主義)와 정전제(井田制)와 불가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양자를 비교하면 일본에서의 논의의 자의성이 눈에 띄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뤄보고 싶다.

여기서는 토꾸가와시기 일본 유학자들이 유교를 정치체제의 문제로 파악하는 한편, 현실의 국가·사회체제의 문제로서 리얼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어째서 무관심했던가의 실례를 하나만 들어보려고 한다. 그것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서적에서 보이는 어떤 일본인 유학자의 유교 인식, 조선 인식이다. 이 책은 15세기에 조선에서 저술된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을 초역(抄譯)한 것으로, 쿄오또(京都)의 저명한 유학자 집안 이또오가(伊藤家) 출신의 세이따 탄소오(淸田澹ᄣᅥᆺ)가 엮었다.1 『표해록』은 1487년에 제주도를 출항했던 최부 일행이 폭풍을 만나 중국의 저장성(浙江省)에 표착(漂着)한 후, 명 정부의 조처로 뻬이징을 경유해 조선에 귀국하기까지의 체험을 기록했던 책이다. 완성된 지 얼마 안된 대운하에 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등 그 사료적 가치가 현재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엔닌(圓仁),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함께 중국에 관한 3대 여행기 중 하나라고까지 평가된다.

세이따의 『당토행정기』는 『표해록』을 단지 초역한 것만이 아니라 군데군데에 자신의 감상과 의견 등을 더하고 있는데, 이 추기(追記) 부분에 그의 유교관, 조선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 최부가 조선에서는 유교가 얼마나 번창한가를 묻는 명의 중신들에게 조선국왕은 학문을 좋아해 매일 네차례나 유신(儒臣)들과 만난다고 답했던 부분에 관하여, 세이따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건대, 최부는 중국에서는 어떠한 거짓을 이야기해도 그 말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나, 이 책이 최부가 귀국한 후 조선왕의 분부로 지어졌다고 하니, 비록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얼토당토않은 것을 말한다면 조선왕에 대한 불경죄가 되니 도리어 벌을 받을 수도 있다. 만약 조선왕이 학문을 싫어하는데 최부의 말처럼 매일 네차례 유신을 대면한다고 운운한다면, 최부가 당토임을 내세워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한다고 조선왕이 크게 노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에게 나쁜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고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좋은 일이라면 근거 없는 것을 반대로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네차례까지 유신과 대면한다는 것은 거짓은 아닐 것이다.

 

국왕이 매일 네차례나 유신들을 만난다는 것은 이른바 경연제도(經筵制度)를 가리키는 것으로, 국왕에게 유교를 교육하고 정책을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되었다(조선시대에는 신하가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도 존재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는 유교이념에 입각해 국가를 운영하는 유교모델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지만, 세이따는 최부가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해석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유학자라면 조선의 이러한 제도는 응당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고 더욱이 그러한 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일본의 상황을 비판해야 할 터이지만 세이따에게는 그러한 발상이 전무하다. 한편,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이 의주(義州)로 도망쳤는데, 우리 대일본 병사가 거기까지 쫓아가지 않음은 그 나라의 천행(天幸)이라 할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학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일본의 무위(武威)에 대한 비판의식도 결여되고 있었다.

세이따의 예로 토꾸가와시기 일본의 유학자들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에는 이론도 있겠지만, 이와나미쇼뗑(岩波書店)에서 출간된 『일본고전문학대계96: 근세수상집(近世隨想集)』에도 세이따의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무명의 유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이따와 마찬가지로 유학자면서도 중국과 조선에서의 현실 유교국가 본연의 모습에 무관심하고, 유교모델을 채용했던 중국·조선과 비교해 일본의 체제를 구상하는 보편적 사고회로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 대부분의 일본 유학자들의 입장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2) 메이지유신 이후

유교모델에 대한 무관심이 한층 더 결정적으로 강화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들어서다. 그 대표적 예로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의 이름을 드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일본의 근대화〓문명화의 가장 뛰어났던 이데올로그였던 후꾸자와는 문명화의 최대 장애가 유교에 있다고 파악하고 유교에 대한 혹닉(惑溺)을 엄중히 비판했다. 즉 일본, 중국, 조선의 구체제를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유교에의 혹닉을 극

  1. 『표해록』과 『당토행정기』에 관해서는, 졸고 「최부 『표해록(漂海錄)』의 일역(日譯)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에 대하여: 강호시대(江戶時代) 일본 유학자의 동아시아관과 그 딜레마」(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56집, 2006)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