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신자유주의를 넘어 어디로?

 

일본의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

 

 

하가 켄이찌 芳賀健一

니이가따(新潟)대학 경제학부 교수. 저서로 『글로벌 자본주의와 기업씨스템의 변용』 『국민국가씨스템의 재편』 『시장경제의 신화와 그 변혁』 등이 있다.

 

  • 이 글의 원제는‘日本の金融危機とネオリベラリズム’이며, 일본 잡지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2009년 1월호에 실린 것을 저자의 동의하에 옮긴이가 축약·정리한 글이다. 원문은 창비 일본어 웹페이지(www.changbi.com/jp)에 게재한다. ⓒ 芳賀健一 2009/한국어판 ⓒ 창비 2009

 

 

2007년 여름 시작된 미국의 써브프라임 위기가 2008년 여름 금융공황으로 폭발하여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실물경제로 파급되고 있다. 이 글은 이번 금융공황에 앞서 발생한 일본의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일본의 자본축적체제의 변용을 고찰한다. 이 두 금융위기에 공통되는 현대적 요인은 1980년대에 발흥했던 신자유주의이며 그 일환인 금융규제 완화다. 이 글이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금융위기를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아니나, 일본의 경험이 향후 미국의 위기 진행에 그리고 미국의 위기가 일본의 금융규제씨스템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하겠다.

 

 

1. 일본형 신자유주의 정책의 등장

 

1973년의 1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일본에서 고도성장기(1955~73년)가 종언을 고하고, 선진국은 일제히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휩싸였다. 그러자 그 원인으로 케인즈식 정책을 주축으로 하는 복지국가가 지목되고, 대안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자유주의란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를 수단으로 정부의 극소화와 시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책사상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의 새처 정권(1979~90년), 미국의 레이건 정권(1981~89년)하에서 실시되었다.

일본에서는 나까소네(中曾根康弘) 정권(1982~89년)이 일본형 신자유주의 정책의 효시다. 당시 일본의 최대 과제는 재정적자의 해결이었는데, 1979년 총선에서의 자민당 참패로 소비세 부과에 의한 세수증대가 백지화되자‘행정·재정개혁’에 의한 세출삭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때 국철, 전전공사(電電公社, NTT의 전신-옮긴이), 전매공사가 민영화되었다. 그러나‘행정·재정개혁’은 거품경기에 따른 내수확대, 세수증가, 1988년말의 소비세법 도입 등으로 용두사미가 되고, 정치쟁점은 1988년 리쿠르트사건(리쿠르트사가 당시 주가상승이 예상된 리쿠르트 코스모스사의 미공개 주식을 나까소네, 타께시따竹下登 등 당대 거물 정치인에게 뇌물로 공여한 사건-옮긴이)을 계기로 정치개혁, 특히 선거제도 개혁으로 옮겨갔다.

 

 

2. 금융규제 완화와 거품경제

 

고도성장기에 확립된 전후 일본의 금융씨스템은 외환법에 의한 국내외시장 분단, 금리·업무·진입 등에 대한 규제 등 금융당국의 엄격한 규제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규제의 목적은 금융기관의 경쟁을 제한하여 금융씨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일본의 축적체제에 미친 영향은 대체로 제한적이었으나, 금융규제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 고도성장기형 금융씨스템은 1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우선 금융구조가 크게 변했다. 기업부문에서 투자정체로 말미암아 우량 제조대기업의 외부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자 주요 은행들(도시은행, 장기신용은행, 신탁은행)이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나서면서 은행간 경쟁이 격화되었다. 또한 1975년부터 은행과 증권의 업무구분이 모호해지자 금융기관간 경쟁은 더 심해졌다. 더욱이 1977년 국채유통시장 해금을 계기로 예금금리 자유화시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1차 석유위기 이후 국내 금융구조가 변하는 가운데, 금융규제 움직임이 부분적으로 완화되거나 그 효과가 줄어들다가 다시 1980년대에 가속화되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도 있었으나, 당시 대장성(현 재무성)은 외압을 이용해 국내의 반대를 누르고 금융자유화를 촉진하여 엔화를 국제화함으로써 토오꾜오를 런던, 뉴욕에 비견되는 국제 금융시장으로 키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국내외 요인이 결합해 금융규제 완화가 진행되는 환경에서 은행은 예상되는 경쟁격화와 이윤축소를 융자확대로 해결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공격적인 융자’전략을 구축했다.

이후 각종 예금금리가 거의 반년마다 자유화되고 최저예금액이 낮아져갔다. 1988년에는 이른바 BIS(국제결제은행) 규제도 도입되었다. 이를 도입한 이유 중 하나는 낮은 이윤 때문에 융자확대 노선으로 치달은 국내은행의 국제은행 업무를 규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BIS규제가 은행에는 수익확대의 유인이 되었다. 만약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8%라 할 때, 대출을 1백억엔 확대하려면 자본을 8억엔 증가시켜야 한다. 이에 은행은 본업에서는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할 수 있는 중소기업과 개인에 대한 융자에서, 신규 분야로는 국제융자 부문에서 전략목표를 설정했다.1

은행자유화에 대한 국가전략은 없었다. 첫째, 1981년 은행법 개정시 대장성 원안에는 정보공시와 경영이 부진한 은행에 대한 경영개선계획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은행업계가 이에 맹렬히 반대하자 이 규정을 삭제했다. 대장성이 옛 규제를 대체할 새 규제 마련을 진지하게 구상하지는 않은 것이다. 둘째, 1982년부터‘금융자유화’에 대한 대응책이 검토되었으나 결론은‘규제의 최소화와 점진적 대응’뿐이었다. 이는 점진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면 금융기관이 최적의 행동을 취하리라는 신념을 표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오랜 기간 경쟁제한적 규제하에 있으면서 은행들이 새로운 환경에 혁신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은 경쟁적 환경에서‘공격적 융자’라는 가장 안이한 전략을 세움으로써 거품에 휘말리게 되었다.‘정부의 실패’이자‘은행의 실패’다. 다만 소규모 금융기관의 파산에 대비해 1986년 예금법이 재개정되어, 자금원조제도가 도입되고 예금보험 한도액 인상(3백만엔에서 1천만엔으로), 보험요율 인상이 이루어졌다. 그후 1996년까지 금융위기 관리수단이라고는 예금보험법 개정, 예전부터 일본은행이 가지고 있던‘최후의 대부자’기능 그리고 대장성의 행정지도뿐이었다.

일본의 거품경제는 1986년 4/4분기에서 1991년 1/4분기까지 51개월간 이어졌다. 이를 거품이라 부르는 것은 지가와 주가의 급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가는 6대도시 상업지에서 1985~91년간 약 5배 급등했고, 연간 토지투자총액은 같은 기간 11조엔에서 25조엔으로 불어났다(1985~91년 총액 112조엔). 이 기간 토지 매도자는 가계이고, 매입자는 주로 부동산업자와 건설업자였다. 은행의‘공격적 융자’전략이 금융 측면에서 토지투기에 대한 자금공급으로 지가상승을 지원한 것이다.

이런 전략을 일거에 발현시킨 것이 일본은행의 저금리정책이었다. 1986년 1월부터 금리를 5회 인하하여, 당시 사상 최저인 2.5%의 정책금리를 1989년 5월부터 유지했다. 일본은행의 금융정책 목표는 물가안정이지만, 여기에 자산가격은 포함되지 않았다. 1985년 이래 엔고와 저유가로 수입 원재료값이 떨어져 도매물가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행

  1. 川野克美 『金融自由化戰略の歸結』, 有斐閣 1995, 8면, 27~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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