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일본의 헌법개정과 한일관계의 비대칭성
권혁태 權赫泰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저서로 『동아시아 인권의 새로운 탐색』(공저) 『아시아의 시민사회』(공저), 주요 논문으로 「교과서문제를 통해 본 일본사회의 내면 읽기」 등이 있음. kwonht@mail.skhu.ac.kr
이 나라의 ‘쇳덩어리’(metal)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모든 것이 이 ‘쇳덩어리’를 잠시 숨겨주었던 도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 1945년 패전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헌법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나라의 ‘쇳덩어리’에 본질적 변화는 없었던 것이리라. 지금 다시 전쟁과 차별의 시대가 오고 있다.1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철학자 타까하시 테쯔야(高橋哲哉)가 새로운 잡지 『젠야(前夜)』의 창간사에서 언급한 문장이다. 다까하시의 언급은 최근 일본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전후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동시에 담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나 변화의 조짐을 ‘개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개혁이란 다름아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라는 ‘도금’을 벗겨내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쇳덩어리〓전전적(前戰的) 세계관〓전쟁과 차별의 시대를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된다. 그 복원의 중심에 ‘헌법개정’이 자리잡고 있다.
1947년 현행 헌법을 제정한 이래, 좌파(호헌파)는 평화헌법의 군사력 보유금지 규정에 맞추어 자위대를 해체하고 미일안보조약을 폐기해서 헌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개혁을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우파(개헌파)는 외부로부터 강제로 이식된 ‘헌법’으로 인해 국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조건인 폭력기구(군사력)의 독점권이 부정되어 국가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본인 스스로의 힘에 의해 ‘자주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맞서왔다.
오랫동안 끌어온 좌우 양쪽의 ‘개혁’ 줄다리기는 현재로서는 우파가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가는 상황이다. 호헌파는 뚜렷한 정당적 기반 없이 정당기구 외연에 시민사회의 힘을 결집시키는 형태로 헌법 사수를 주장하는 데 반해, 개헌파는 개헌에 관해 통일된 견해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정부를 비롯한 국가기구 내에서 헌법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고 이를 통해 일본사회를 ‘개혁〓헌법개정’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개혁’은 적어도 전후 60년 동안 일본사회를 이끌어온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것이며, 개헌이 실현되면 이러한 전후적 가치에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셈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같은 헌법개정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개혁’이 과거와는 달리, 헌법개정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제도개혁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개혁이란 한편에서는 개인보다 국가나 집단을 우선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 혹은 조직·집단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 만들기와 개인책임론을 주장하는 등 일견 상반되는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띠고 있다. 전자가 헌법개정을 비롯한 국가주의적 개혁이라면, 후자는 주로 경제개혁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따라서 최근 일본의 ‘개혁’이란 국가주의적 성격과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결합된 형태로 진행된다. 전자의 움직임이 주로 1990년대 이후 국기·국가법 제정, 유사법제, 교과서 파동, ‘쇼오와(昭和)의 날’ 제정 등 국가정체성과 외교안보노선에 관련된 개혁으로 나타난다면, 후자는 1980년대 이후 행정개혁, 민영화, 규제완화 등 ‘작은 정부’와 시장지상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개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전후사회를 지탱해온 선단호송(船團護送) 방식 같은 ‘강한 국가’에 기반한 경제씨스템과, 평화주의·국제주의·민주주의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전후 민주주의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안보노선과 헌법문제
일본의 헌법개정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지금은 제1야당인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오자와 이찌로오(小澤一郎)가 ‘보통국가화’라고 표현한 대로,헌법 제9조에 규정된 군사력 보유금지 규정을 바꾸어 군사력을 증강하고 이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2따라서 헌법개정 문제는 헌법 제9조 문제이다. 하지만 오자와 이찌로오의 ‘보통국가’란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군사력이 없는 국가가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군사력을 미국처럼 행사하는 나라, 다시 말해 군사적 패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일본은 군비를 제한하는 현행 헌법하에서도 세계 굴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국가는 군사적 패권주의화의 의도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최근 일어나고 있는 헌법개정 움직임 같은 일본사회의 새로운 흐름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며, 또 전후 60년간의 변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다시 말하면, 현행 헌법이 외교안보노선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또한 어떤 역사인식 속에서 발전되어왔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외교안보노선과 우경화 개념도3
일본의 전후 외교안보노선은 이론적으로는 A 비무장 평화주의, B 경무장 평화주의(대미의존형), C 중무장 국가주의(미일동맹형), D 중무장 패권주의(대미독립형)의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확립되어 1980년대까지 일본사회를 이끌어온 B노선이 일본의 외교안보노선이었다. A가 B의 C, D로의 지향을 막아, 즉 A의 견인에 의해 B가 유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사회에서 불고 있는 ‘우경화’란 B에서 C로의 지향이라 할 수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D로의 전환도 상정해볼 수 있다.4 이같은 대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추동되는 일본의 우경화를 개념화하면, 결국은 친미 경무장 평화주의에서 점차 친미 중무장 국가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으며, 이것이 천황제 등의 복고적 고립주의와 맞물리면 대미독립형 중무장 패권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교안보노선과 헌법론의 상관관계
이를 헌법개정 문제와 관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