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일상의 권태에서 재난의 상상력으로

하성란론

 

 

이선옥 李仙玉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기영 소설의 여성의식 연구」 「박완서 소설의 다시쓰기―딸의 서사에서 여성들간의 소통으로」 「우리 시대의 에곤실레―은희경」 등이 있음. sun-oklee@hanmail.net

 

 

1. ‘여성’이라는 단일한 호명에서 벗어나기

 

1988년 커피콩 가는 기계를 샀다는 배수아 소설의 한 대목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국가적 사건을 치러냈던 해를 그녀는 커피콩 가는 기계로 기억한다. 어떻게 그런 당찬 개인의 선언이 가능할 수 있을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 남아 있었다. 우리가 사람을 기억할 때 어떤 한 장면이나 사건으로 그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작가들 역시도 하나의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신경숙의 소설은 퇴에 앉아 오래도록 이를 닦는 ‘그 여자’의 모습으로, 은희경의 소설은 셋부터는 다 똑같아라고 말해버리는 냉소적인 정사의 장면으로, 그리고 전경린의 소설은 마녀의 빗자루를 타고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열정의 모습으로 떠올리곤 한다. 작가들에 대한 이런 인상은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기도 하지만 또한 독서 관례 속에서 형성된 집합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특히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경우 단순화가 가능할 정도로 그러한 인상은 집중되어 있다.

왜 이러한 집합적인 기억이 가능한 것일까.1990년대의 문학적 혹은 사회적 여건 속에서 여성을 단일성으로 호명하는 것, 즉 다양한 차이를 희생하고서라도 여성성을 동일성으로 불러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창작이나 해석의 과정 모두에서 이루어졌던 여성성에 대한 단일한 호명은 성, 사랑, 쎅슈얼리티에 대한 재인식이기도 하면서 또한 거대서사에 대한 카운터파트로서의 시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성작가들의 문학은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가능하게 했으며, 문학적으로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도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통해 경험된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일깨워주었다.

하성란(河成蘭)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왜 90년대 여성작가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장황한 서두를 꺼내는 것일까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기법을 연상시키는 미스터리 기법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몽환적 이야기, 느슨한 서사를 채우는 치밀한 묘사력 등으로 새로운 문학의 영역을 일구어나가는 작가에게 90년대 여성작가들과의 연계성은 오히려 족쇄가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가들의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하성란이나 천운영, 이명랑 등 신진 여성작가들을 읽어내는 편이 이들의 변화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다보면, 어딘가 서로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작품세계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90년대 여성작가들이 재구성해낸 일상과 여성성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성란은 일상의 심연에 도사리는 재난의 위협과 공포를 불러내 권태로운 일상을 오히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전복적 이미지는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권태로운 일상, 유폐된 사적 공간이라는 문법을 과감하게 뒤집어엎는 도전이라 볼 수 있다. 천운영은 여성성을 식물성의 상상력 대신에 동물적 상상력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이명랑은 중산층 여성의 유폐된 공간 대신에 시장통의 열린 공간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 90년대 여성작가들이 재구성한 일상과 여성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 작품들의 성취와 고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2. 일상―권태에서 위협으로: 『옆집 여자』

 

하성란은 1967년생으로 1996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한 이래, 소설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 1997), 『옆집 여자』(창작과비평사 1999),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창작과비평사 2002)를 출간하였고,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현대문학 1998), 『삿뽀로 여인숙』(이룸 2000), 『내 영화의 주인공』(작가정신 2001) 등을 펴냈다.1999년에는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2000년 한국일보문학상,2004년 이수문학상을 받았다. 간단한 이력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상당히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옆집 여자』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곰팡이꽃」과 함께 주목되는 작품집이다. 우선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작품집에는 삶의 유기체성을 잃고 떠도는 도시인들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덜덜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세탁기와 이야기를 하는 여자(「옆집 여자」)와 자기 삶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자동차 쎄일즈맨(「깃발」), 강간을 당하고 정신착란 상태에 있는 여자(「악몽」),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함께 야유회를 가는 상가회 사람들(「즐거운 소풍」)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뜻하지 않은 성장으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체조 선수(「촛농 날개」)와 도둑질을 하는 여자와 함께 탈출하는 상가의 감시원(「당신의 백미러」), 타인에 대한 기묘한 호기심으로 쓰레기 뒤지는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곰팡이꽃」), 성형미인으로 다시 태어나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광고모델(「치약」), 모범생과 날라리의 두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올콩」),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만난 여자와 함께 도시를 떠났지만 자동차 사고로 파국을 맞게 되는 횟집 요리사(「양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민 아파트와 그 주위를 둘러싼 상가의 생태학(과수원을 배경으로 한 「악몽」만이 예외)이라 할 만큼 하성란이 그려내고 있는 인물군상은 복닥거리면서 얼크러져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에 밀착해 있다.하지만 그들의 관계, 그들의 운명을 그려내는 방식에선 하성란만의 독특한 색채가 느껴진다. 작가는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들의 일상에 촛점을 맞춰서 무심코 지나치던 사물들에 각인된 삶의 흔적들을 주워올리고 있다.(영화 「스모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고는 고요한 일상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징후와 급격히 무너지는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고장나기 직전인 세탁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마지막으로 한번 더 힘을 내자꾸나, 영미야”(12면)라고 격려하는 「옆집 여자」의 위태로운 상황처럼 일상은 덜덜거리며 파국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깃발」의 쎄일즈맨은 전봇대에 허물만 남긴 채 틈새로 사라졌으며, 「촛농 날개」의 체조선수는 급격한 성장으로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