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재난과 고립을 넘어, 전환의 상상으로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문과 교수. 저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등이 있음.

gamunbie@hanmail.net

 

 

1. 에세이를 읽는 사람들

 

소설이나 시의 동향만 살피다보면 놓치기 쉽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대형서점 문학 코너의 주인은 에세이였다. 이른바 ‘에세이 열풍’ ‘힐링 에세이 전성시대’ 등으로 요약되는 에세이 약진 현상은 2010년대부터 출판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 현상은 최근 장기화되는 팬데믹 국면과 그에 따른 ‘코로나 블루’로 인해 더욱 명료해지는 중이다. 이십대를 겨냥하여 집필되고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2010)는 이러한 현상의 기원에 대표주자 격으로 놓여 있다. 이후 ‘~해도 괜찮아’부터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에 이르기까지, 일명 ‘괜찮아’ 류(類)로 약칭해도 좋을 만한 에세이들이 무수히 명멸했고 지금도 여전히 발간되는 중이다. 표제에서부터 명백하게 유추가 가능한 것이지만, 이 에세이들은 특히 젊은 세대의 고충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십여년에 걸친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 표제가 의미하는 ‘괜찮다’의 함의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당부를 향한 청년세대의 냉소, 즉 ‘아프면 환자이지 왜 청춘인가’라는 되물음은 이런 변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염려와 위로라는 호의에서 시작된 당부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 되물음은 표제의 인과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그것은 젊음이 언제까지 ‘노오력’의 동의어가 되어야 하느냐를 되묻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피해서 운 좋게 사회에 안착한 세대의 출발점과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게임을 시작해야 하는 세대의 출발점이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는 인식이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에 ‘~해도 괜찮아’라는 에세이 특유의 문법은 점차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일정한 질서에 대한 이탈과 거부의 방향을 가리키는 언명이 된다. 요컨대 이러한 에세이가 세대적 취향의 일부이자 또래문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이는 오히려 기성세대가 ‘괜찮다’며 권해온 ‘모범적인’ 삶의 방식을 하나둘 포기하고 버리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에세이의 대중적인 영향력이 강해지는 배후에 ‘번아웃 증후군’이 있다는 출판 관계자들의 분석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1 최근 몇년간의 에세이 열풍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떤 직무를 수행하느라 신체적·정신적 기력이 소진되는 것이 ‘번아웃’의 정의임을 감안하면, 직무를 수행할 준비와 의욕은 충분하되 기회조차 얻지 못했거나 직무의 임시적 성격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정의 자체가 사치스러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번아웃이 될 만큼 몰두할 일을 찾는 것부터가 요원해 보인다는, 그처럼 열정과 기력을 바칠 만한 대상을 얻지 못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생겨나는 우울과 무력감이 요체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일을 해보기도 전에 미리 찾아온 번아웃이 에세이 열풍의 배경인 것이다.

에세이의 유행 현상이 한국 청소년(9~24세)의 자살률 증가 현상 2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사태는 가슴 아프지만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의 노력이 장차 다른 결의 시간을 만들어낼 것 같지 않다는 비관, 그리하여 ‘이번 생애’ 안에 무언가 더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는 시간의 광장공포가 만연한 결과다.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할진대, 오랫동안 제도화되고 어떤 면에서는 반복적으로 강요되어온 삶의 패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부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로 인해 삶의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 자기 위주로 살아도 괜찮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 등등 무엇인가 되지 않아도 좋고 더이상 참을 필요도 없다는 다짐과 표명이 넘쳐난다.

팬데믹 시대의 우울은 그간 누적되어온 세대적 불안과 그에 따른 출구 찾기의 간절함을 보다 명료하게 표착되는 정동의 형태로 밀어올린다. 서적 판매대를 빼곡하게 채운 에세이들을 향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파고드는 출판 상술의 일종이라 비판하는 이도 분명 있겠으나, 그 지적이 그리 유효한 것 같지는 않다. 시장주의 속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유영하며 살아온 세대인 만큼 선택지야 많으면 좋은 것이다. ‘내가 곧 내 삶의 소비자’이고 결국은 ‘나’의 선택이다. 이때 ‘~해도 괜찮아’라는 에세이의 문법은 일종의 세대적 공용어이다. 기성세대와는 등을 돌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마련한 새로운 세대가 ‘~해도 괜찮아’라며 자기 자신을 혹은 서로를 다독이는 모양새를 띤다. 누가 발언하는가의 문제, 즉 발언하는 자의 자격 또한 친교의 장 속에서 달라졌다. 이제 에세이는 더이상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나 인간사에 대한 통찰을 요구받는 종교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이가 직접 우울의 다스림을 이야기하고, 육아로 직장을 그만둔 이가 경력 단절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한 이가 아웃사이더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야말로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일인칭 글쓰기의 전성시대가 열린 격이다. 저마다 자신이 선택한 어떤 삶의 방식과 그 삶을 떠받치는 소신을 털어놓는다. 더이상 세계에 ‘나’를 무조건 맞추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익숙하게 보아온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설렘과 두려움을 ‘괜찮다’는 말로 포괄한다.

 

 

2. ‘나’의 세계, ‘나’의 시계(視界)

 

에세이 열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젊은 세대에게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답 없는 세상에 지쳤다고 푸념할지언정 윗세대의 조언은 사양하겠다는 단호한 ‘나’의 목소리가 그 열풍을 떠받치는 힘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세이와 같은 진열대에 놓인 소설에 이러한 세태가 담기지 않았을 리 없다. 아니, 담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기존 ‘당신들’의 사회질서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고루한 것인지를 일인칭의 글쓰기를 통해 그려내려는 열망이 젊은 세대 소설의 몸통 전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인칭대명사 ‘나’의 사용에 관한 시점 이론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일인칭이라는 시점의 선택이 곧 세계를 향한 입장(stance)의 선택으로 보편화되는 사태,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시야가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추세가 근 십년간 에세이나 소설의 글쓰기에 차곡차곡 누적되어왔다는 이야기다. 자기중심적으로 제한되고 좁아지는 시야는

  1. 「불황에 지친 심신 힐링 에세이 열풍… 6가지 키워드로 본 2012 출판계」, 국민일보 2012.12.27.
  2. 「[2020 자살 리포트]위기의 10대 “어른한테 털어놓으면 나아져요?”」, 『시사저널』 1597호(2020.6.2). 이 기사에서 박성의 기자가 인용한 미미시스터즈의 노래 「우리, 자연사하자」의 가사 일부를 재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마. 일단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너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지 마.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야. 힘들 땐 ‘힘들다’ 무서울 땐 ‘무서워’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