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읽고 쓰고 저항하라

페미니즘 출판의 가능성

 

 

김영선 金永善

창비 청소년출판부 편집자. kys1212@changbi.com

 

 

먼 곳에서 온 목소리들

 

올해 1월 타계한 미국의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오래된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1973)에는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1 윤리적 딜레마가 등장한다. 오멜라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건강하고 지적이며 성숙하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과 번영은 한 아이의 비참한 희생에 빚지고 있다. 오멜라스의 아이들은 말뜻을 알아들을 열살 무렵에 이러한 사실을 다 알게 된다. 도시의 운명이 한 아이에게 달려 있고, 그 아이는 지금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갇혀 제 배설물을 깔고 앉아 제발 내보내달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그러나 누군가 이 아이를 꺼내 보살피려 든다면 그동안 유지되어온 오멜라스의 행복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아이의 처참한 현실에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점차 메말라간다. 그 대신 자신이 변제해야 할, 그러나 결코 다 갚을 수는 없을 빚을 깨달은 댓가로 더욱 높은 선(善)과 이상을 좇으며 번영을 일군다. 가령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자기 아이에게 자애로울 수 있는 것은 지하실 아이의 불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평온한 세계란 그렇게 유지된다.

타자의 희생과 세계의 균형에 관한 빛나는 통찰이 깃든 이 단편은 1974년 휴고상을 수상하며 이후 숱한 서사에 영향을 끼쳤다. 워낙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이 소설을 보지 않았다 해도 ‘소수의 희생을 담보로 한 다수의 행복’이라는 설정은 익숙한 클리셰처럼 여겨질 법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마다 새삼스러운 전율에 휩싸인다. 우리는 흔히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단순히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적극적인 외면에서, 나아가 그 고통을 제물로 삼으려는 미필적 고의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어떨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런 날카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찌른다.

페미니스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르 귄의 소설에 빗대어 말하자면 ‘지하실 아이’를 더이상 외면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아이는 과거의 상처에 갇혀 버려진 채 옹송그리고 있던 자기 자신일 수도, 여성 일반일 수도 있다. 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과 억압에 눈뜨고 나면 이전과는 달라진 시선으로 보게 되는 유사한 종류의 이분법들, 예컨대 정상과 비정상, 국민과 비국민, 주류와 비주류 등의 구분 속에서 만나는 또다른 약자일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그 아이의 희미한 목소리에 서로의 목소리를 보태어 지하실 바깥의 세상으로 발신하려 한다. 그 중첩된 목소리들이 이제 말과 글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하고 있다.

 

 

페미니즘 웹툰과 만화의 약진

 

오늘날 독자들은 이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다. 페미니즘 작품은 누군가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강렬한 독서체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나와 닮았다’고 느끼는 인물을 만나고, ‘내 이야기 같다’고 생각되는 서사를 만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자신과 비슷하게 느끼는 다른 이들의 감상과 교류할 때 더욱 증폭된다. 1990~2000년대 여성문학의 수혜를 조금이나마 받은 독자이자 청소년문학서를 만드는 편집자인 내 경우에도 최근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 작품에 열광하고 작품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사주는 모습을 보면서는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우리가 『이갈리아의 딸들』2 말고도 여러 작품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와 기쁨이었다.

물론 페미니즘 작품의 열기 한편에는 우려의 말들도 존재한다. 예컨대 남녀관계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나 도식적인 갈등구조,

  1. 『바람의 열두 방향』(개정판), 최용준 옮김, 시공사 2014, 465면.
  2.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뒤바뀐 가상세계 이갈리아의 모습을 그린다. 1977년 출간되어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라면 꼭 읽어야 할 여성학 입문서로 이야기된다. 한국어판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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