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

주체 과정으로서의 시 그리고 정치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얼굴 없는 노래』가 있음. husaing@naver.com

 

* 살아서 불태워졌으며 죽어서 얼어붙은 자들이 있다. 300여일이 지나도록 수습되지 못한 채 냉동창고 속에 갇혀 있는 용산의 유령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필자.

 

 

1. 회귀하는 유령들

 

많은 주검들이 생겨났다. 그 주검들 중 일부는 사후적으로도 정중히 수습되지 못했다. 하지만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이 공적 살해에는 가해자가 없다. 사실의 부인과 책임의 회피, 그리고 애도의 부재. 궁극적으로는 말의 총체적인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국면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정치’ 그 자체의 실종이라는 현실이다. 위기는 예상보다 전면적이고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했던가(김수영 「절망」). 한국문학의 내부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자연과 일체화된 서정의 우주를 구가하던 서정시인이 사회의 분열상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사물과 언어 사이의 부조리 탐구에 몰두하던 모더니스트가 정치체 속에서의 언어의 이데올로기를 따져묻기 시작했으며, 비평은 문학과 정치라는 해묵은, 그러나 잊혀졌던 주제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말의 타락이 곧 삶의 타락이고 시의 타락임을 직관하여, 일상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탈신화함으로써 시(詩)와 비시(非詩), 문학과 정치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던 김수영(金洙暎)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일까. 물론 진은영(陳恩英)이 당혹감 속에 토로한 대로 시의 내적 변화는 시인의 변화보다 훨씬 더디다(「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시인의 정치참여와 시의 정치성 간에 존재하는 이 작지 않은 간극은 이장욱(李章旭)의 견해대로라면, 시는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모든 부면과 맞닥뜨리면서 삶 자체의 근저에서 형성된 육화된 언어를 요청하기 때문일 터이다(「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그러나 이 간극은 ‘정말’ 불가피한가?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만일 이 간극을 넘어설 수 있다면/넘어서야 한다면 이는 어떤 식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이 간극을 넘어서는 일은 ‘지양’과 같은 변증법적 모티프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시는 논리적 봉합의 산물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시’는 시인의 이성을 통해 논리적으로 지양되거나 그의 의지를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시의 주체적 거점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도래하는 시라는 작품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항구적인 정체성을 지닌 일자(一者) 또는 시의 중심이 아니다. 시인은 시 작품이라는 주체적 거점 구성에 참여함으로써만, 참여하는 순간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주체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이론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 거점 구성에 참여하는 주체 과정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점에 존재하는 그 주체 과정의 형식들 중 일부를 적는다.

 

朝刊은 訃音 같다

사람이 자꾸 죽는다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죽였을 것이다

사람입니다, 밝히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다고,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지만,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을 것처럼 哀悼해야 할 텐데

 

죽인 자는 여전히

얼굴을 벗지 않고

心臟을 꺼내 놓지 않는다

 

여전히 拉致 中이고

暴行 中이고

鎭壓 中이다

 

計劃的으로

卽興的으로

合法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戰鬪的으로

錯亂的으로

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아, 決死的으로

總體的으로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죽은 자는 여전히 失踪 중이고

籠城 중이고

投身 중이다

 

幽靈이 떠다니는 玄關들,

朝刊은 訃音 같다

-이영광 「유령 3」 전문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상황 일단에 대한 문학적 폭로의 일종인가? 아니다. 조간을 ‘訃音’으로 읽는 이 시는 ‘폭로의 미학’에 근저를 이루는 원한(ressentiment)이나 분노 같은 감정의 층위보다 더 깊숙한 지점에서 발원하고, 그래서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운동할 보이지 않는 모종의 에너지, 그러므로 더 근본적인 어떤 지점에 닿아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의 무의식은 정치적 현실의 표면이라기보다는 그 아래에서 표면을 결박하고 있는,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다시 그 표면 위로 넘쳐 회귀할 수밖에 없는 어떤 잉여의 에너지와 만난다. 따라서 부음 자체가 된 조간에서 ‘사람’의 죽음은 시인에게 하나의 기사, 단신(短信)으로 전달되는 어떤 정보 같은 것이 아니다. ‘訃音’이 된 조간은 삶의 공동체가 어느새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총체적인 ‘표지’로서 ‘나타난다’. 시인이 읽은 ‘朝刊-訃音’은 그러므로 기호체계 속에서 소외되고 미끄러지는 앙상한 기표가 아니라, 세계상의 ‘실재’를 드러내는 알레고리적 기호, 예컨대 거북이 등뼈에서 재앙의 징조를 읽어내던 갑골문의 그것에 육박하는 표지이다. 그리고 거기, 원한의 감정보다 더 근원적인 바닥의 층위에서 시인의 무의식은 살의(殺意)로 가득찬 망령 같은 국가폭력의 무의식을 ‘객관적으로’ 마주한다.

“납치 중이고/폭행 중이고/진압 중”인 공권력, “계획적으로/즉흥적으로/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공권력의 무의식은 “죽이고 싶었다고”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합법성을 갖추고 우연을 가장하며 필연을 동원한 이 국가폭력의 스펙터클은 사물화된 권력-폭력의 기제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을 향해 분출하는 신랄하고 맹목적인 살의의 욕구 그 자체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낸다. 일체의 감정적 수사와 은유를 배제한 시인의 직관, 선언적 언표 속에서 공권력의 무의식은 벌거벗겨지며 그것은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