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주혜 李柱惠

1971년 전북 전주 출생.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leestori@hanmail.net

 

 

 

자두 도둑

 

 

이 이야기는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길에 둘만의 대화에 빠져 하트퍼드 분기점을 지나 스프링필드까지 내처 가버린 두 여자의 밤길에서 출발합니다. 역사상 가장 더웠다는 두번의 여름과 싸락눈 날리던 어느 겨울밤을 거쳐 지금 이곳의 3월에 당도했습니다. 3월은 고대 로마력의 첫번째 달로 전쟁과 농업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무렵 대지는 병사와 농부의 발소리로 시끄러웠을까요? 지금 이곳은 고드름 녹는 소리가 한창입니다.

3월의 첫 평일, 겨우내 붙들고 있던 번역 원고를 완성해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원고지 2000매가 넘는 양이었어요. 어느 작업이나 단행본 한권 분량의 번역을 마치면 일단 긴장이 풀리며 그동안 억눌러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온갖 감정이 두서없이 떠오릅니다. 이번 작업은 유난히 힘들었어요. 텍스트 자체도 어렵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사람을 쉬이 가라앉게 만들기도 했고요. 혼자 되어 보낸 첫번째 겨울이었습니다. 처음 원서를 받고 계약서에 서명할 때만 해도 책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잘해내고 싶다’라는 욕심이 앞섰어요.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틀리면 안 된다’라는 쪽으로 마음이 훅 기울더군요. 욕심껏 낚아챈 원서의 뚜껑을 열자마자 자신감을 잃고 허우적거린 꼴이었어요. 정확히 무슨 말인지 해석이 안 되는 문단도 있었고, 그럭저럭 해석까지는 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옮기기가 까다로운 문단도 있었습니다. 겨우 열줄 안팎의 한 단락을 두고 몇시간을 씨름한 날이면 오늘의 목표량을 수정해야 했고, 그런 날 밤이면 인터넷 서점 댓글난에 ‘책 내용은 좋은데 발 번역이 망쳤다’라는 비난이 빗발치는 꿈까지 꿨습니다. 번역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9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태 이런 초보적인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창피했습니다. 한번은 너무 답답해 통번역대학원 동기 K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언니가 텍스트를 너무 사랑하나봐.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잖아” 하는 말을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토끼 모양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왔습니다. 사랑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K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넘길 수도 없었습니다. 텍스트를 너무 사랑해서 번역이 갈팡질팡하는 역자. 너무 잘하고 싶어서 자꾸만 꼬이는 해석. 저는 K의 말을 혼자만의 변명으로 삼으며 기나긴 겨울을 한권의 책과 함께 동굴에서 보냈습니다. 어느새 마감일이 왔고 2000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월이었습니다.

노트북을 소리 나게 닫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입주자들이 공동으로 쓰는 옥상에는 누가 주워 왔는지 모를 낡은 벤치가 서울타워 방향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거기 앉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서울타워를 멍하니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거나 담배를 피우면 딱 좋았습니다. 3월이지만 아직 봄이라기엔 서먹한 날씨였어요. 담배를 두개비 정도 피웠고, 어쩌다 한번씩 “3월이네” “이제 봄인가?”라고 중얼거려도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벤치 오른쪽에 있는 길쭉한 플라스틱 화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루꼴라와 바질과 상추를 심어 재미를 보았던 작은 텃밭형 화분이었어요. 햇빛이 잘 들어 물만 줘도 식물이 쑥쑥 자라더군요. 다른 입주자들이 가끔 상추를 몇장씩 뜯어 가는 눈치였지만 내버려뒀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 다 먹지도 못할 양이었고, 그 사람들도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았으니까요. 올해는 어떤 씨앗을 심어볼까? 언제 어떤 씨앗을 심어야 어느 무렵 잎이나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꺼내 ‘씨앗’ ‘텃밭 채소’를 검색했습니다. 온갖 푸성귀가 화면에 뜨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인터넷 정보의 텃밭에서 놀다가 버릇처럼 메일 앱을 실행했습니다. 벌써 편집자의 답장이 와 있더군요. 편집자는 간결한 인사말과 다정한 안부, 애틋한 치하의 말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맨 끝에 짤막한 용건을 깔끔하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모월 모일까지 몇장 분량의 역자 후기 원고를 보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역자 후기라니요. 차라리 반성문을 쓰는 게 낫지 싶었습니다.

기세 좋게 나갔다가 30분 만에 돌아온 집 안은 그새 공기도 빛깔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미세하게 달라진 탓일까요? 책상 앞에 섰습니다. 노트북은 살짝 틀어져 있고, 독서대 위의 원서는 맨 앞장도 뒷장도 아닌 애매한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참고자료로 살펴본 저자의 다른 책도 펼쳐진 채였는데, 그 위를 크리스털 문진이 지그시 누르고 있었습니다. 빛을 머금은 문진이 큼직한 물방울처럼 반짝였습니다. 안경집은 왠지 꼭 닫혀 있지 않았고 팔각의 연필통에는 필기구가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습니다. 노트북 왼쪽에는 붉은 찻물이 여기저기 묻은 백자 찻잔이 있고 잔 받침에는 다 우려낸 얼그레이 티백들이 싸늘한 자루처럼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었습니다. 방금까지 제가 존재했던 공간에 저만 쏙 빠져 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제가 없는 제 자리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다시 보는 풍경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빠져나온 공간과 시간은 어떤 기도를 동원해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했습니다.

다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지난 4개월을 돌이켜봤습니다. 쌉싸름한 얼그레이 향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많은 얼그레이를 마셔댔는지, 홍차 카페인이 얼마나 많은 밤을 얕고 어수선한 잠으로 물들였는지, 수면과 불면이 뒤엉킨 시간 곳곳에 오역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깊은 허방이 되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쓰면 역자 후기가 될까요? 프랑스의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는 번역을 두 말에 담긴 정신의 무게를 다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따르면 역자는 곧 저울이지요. 그런데 저울이 저울질은 엉망으로 해놓고 자기변명만 늘어놓는다면 지면 낭비가 아닐까요?

편집자의 냉정한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럴 시간에 그냥 후기를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당분간 컴퓨터 화면은커녕 활자도 꼴 보기 싫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노트북을 닫은 지 한시간도 안 되어 주섬주섬 컴퓨터를 켰습니다. 역자 후기를 쓰든지, 그것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쓰든지, 아무튼 뭐라도 써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화면이 살아나자마자 저는 뉴욕시에서 보스턴까지 가는 자동차 길을 검색했습니다.

 

나는 엘리자베스 비숍을 직접 만나기 전부터 그의 시를 잘 알고 있었고, 언제나 그 여성보다 그의 시를 더 잘 알았다. 일찍이 그의 초기 시집 두권의 돋보이는 음색에 끌렸고, 문학계 모임에서 한두번 만난 적도 있지만, 수줍음과 나이 차, 명성의 차이를 깰 만큼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시간이 훌쩍 흘러 1970년대 초반이 되었을 때 뉴욕에서 비숍을 만나 당시 우리 둘 다 살고 있던 보스턴까지 내 차를 함께 타고 온 적이 있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 삶에서 최근 겪은 자살에 대해, 자기 이야기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하트퍼드 분기점으로 들어서야 하는 걸 깜박 잊고, 그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스프링필드까지 계속 차를 몰았다. 그날의 대화는 내가 엘리자베스 비숍과 나눈 단 한번의 친밀함이었고 단둘이 만난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 Adrienne Rich, Essential Essays: Culture, Politics, and the Art of Poetry.

 

원고지 2매 정도의 이 짧은 문단은 전체 원고 2000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분량만이 아니라 내용으로 봐도 사적인 경험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에 따라서 얼마든지 삭제할 수도 있었을 에피소드지요. 이번에 넘긴 원고는 미국의 여성 시인 에이드리엔 리치가 평생에 걸쳐 발표한 주요 에세이, 강연문, 기고문 등을 묶은 산문집입니다. 두툼한 원서 면면에 여성운동, 레즈비언운동, 인권운동 등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어 제도로서의 모성과 가부장제에 관해, 그리고 여성이자 소수자의 글쓰기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던 저자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이번 작업이 유난히 어려웠던 건 저자가 쓴 단어와 문장이 어렵고 현학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왜 그 단어와 문장을 선택했을지 헤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리치가 말한 ‘레즈비언 연속체’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mothering은 ‘어머니 되기’일까 ‘어머니 하기’일까? 그렇다면 어머니는 자격인가, 상태인가, 아니면 행위인가? 적당한 한국어를 고르기 전에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만, 작업 내내 저는 이해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애초에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위 문단을 만났고 이상한 환기를 경험했습니다. 단호하고 냉철하고 때로는 신랄한 문장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적이고 솔직한 고백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저자가 드물게 내비친 사담을 향해 저속한 호기심이 발동했던 걸까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엔 그 문단이 가시처럼 뇌리에 박혀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목표량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불면과 싸울 때면 간혹 가본 적도 없는 그 고속도로 언저리를 더듬었습니다. 혼자 상상하고 짐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떤 식으로 서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습니다.

1973년 3월 미국이었습니다. 뉴욕의 한 모임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엔 리치는 마침 둘 다 보스턴에 살고 있어서 리치가 모는 차를 타고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갔습니다. 비숍은 리치보다 20년 가까이 연상이었고, 훨씬 일찍 주목과 인정을 받은 선배 시인이었습니다. 문단 모임에서 몇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선뜻 가까워지기에 두 사람 사이는 멀고 어려웠습니다. 시에 대한 관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단둘이 자동차 안에 앉아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밤의 마력 때문이었을까요? 미국 북동부의 3월 공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냥 둘 다라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러니까 어느새 행군을 시작한 3월의 봄밤 때문이었다고. 6년 전 비숍은 16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던 브라질의 건축가이자 동성 연인 로따 쏘아레스를 자살로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비숍이 먼저 쏘아레스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한편 리치는 이른 결혼으로 서른살이 되기 전에 아들 셋을 낳아 키웠지만, 60년대 반전운동, 인권운동,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을 찍어 누르는 우울감과 고립감의 원인이 가부장제에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면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뉴욕 근교의 숲으로 들어가 권총 자살로 리치의 요구에 대답했습니다. 1970년의 일이었습니다. 리치는 순식간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간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에이드리엔 리치는 ‘자기 이야기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죠. 실제로 리치는 그 어느 허구보다 극적이었던 그 ‘사건’에 대해, 그후 세 아들과 함께 그 경험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거라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봄밤에 두 여성 시인이 돌이키기 싫었을 지난날의 상실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뿐입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자살로 잃고 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했던 공통의 경험이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차이를 훌쩍 뛰어넘게 했겠지요. 마침 3월은 비숍의 연인 쏘아레스가 태어난 달이었습니다. 쏘아레스가 떠나고 얼마 후 발표한 시에서 비숍은 로빈슨 크루소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프라이데이, 사랑하는 나의 프라이데이는 홍역에 걸려 죽었다. 17년 전 3월이 온다.’* 시 속에서 프라이데이는 17년 전 3월 문명세계의 질병인 홍역에 걸려 죽었습니다. 혹시 비숍은 로빈슨 크루소의 입을 빌려 이렇게 자책했던 건 아닐까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프라이데이가 목숨을 잃었다고. 쏘아레스는 비숍을 만난 지 17년이 되어가는 가을에 죽었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비숍은 쏘아레스의 생일을 17번째로 축하해주었을 테지요. 그러나 그 일이 있었기에 17번째 3월은 고통 자체였을 것입니다. 리치는 남편이 떠나고 몇년 후 비숍보다 훨씬 더 직설적으로 사건 이후를 말하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 Elizabeth Bishop, “Crusoe in England,” The Complete Poems, 1927-1979.

 

다음해면 이십년이 되네요

당신은 죽은 채 세월을 낭비하고 있어요

우리가 얘기하곤 했었던, 지금은 그러기엔 너무 늦은,

도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난 지금 살고 있어요

그런 도약은 아니라도,

짧고 강렬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말예요

 

각각의 움직임은 다음 것을 약속해주거든요*

* 에이드리언 리치 「어떤 생존자로부터」, 『문턱 너머 저편』, 한지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리치는 군중의 돌을 맞는 와중에도 의연하고 꿋꿋합니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지금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지요. 살아남기 위해 짧고 강렬한 움직임을 계속합니다. 이 시의 제목은 「어떤 생존자로부터」입니다.

더는 두 시인의 일화를 검색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왜 가시처럼 콕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았는지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리치와 비숍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았던 그 몇시간이 미치도록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몰이해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진술하는 일은 리치가 말한 ‘짧고 강렬한 움직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해 여름은 모질게 더웠습니다. 사람들은 툭하면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했던 1994년의 여름을 소환했습니다. 최고기온이 경신될 때마다 뉴스는 94년의 자료화면을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 앉아 저마다의 그해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낡은 선풍기 한대에 의존해야 했던 답답한 교실 공기를,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며 느꼈던 어지럼증을,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만큼 달려야 했던 뜨거운 연병장을 용케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94년의 여름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한기로 기억됩니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학원 방학특강을 들으려면 좌석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했습니다. 버스는 한번도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었고 그늘 한조각 없는 정류장에 서서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으면 티셔츠는 금세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잔뜩 찌푸린 이마를 타고 진득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무더위의 ‘무’가 ‘물’을 뜻한다는 것도 그 계절에 처음 배웠습니다. 피부에 습기가 가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학원에 가기 전에 식탁에 내놓은 소금을 조금 집어 먹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날도 티셔츠가 푹 젖을 만큼 땀을 흘리고 나서야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종점에서 가까운 정류장이라 버스 안에는 승객이 별로 없었습니다. 냉방이 잘되어 있어서 볕 아래 있다가 차가운 물에 첨벙 뛰어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야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자인지 아나운서인지 흥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 스피커를 통해 쏟아졌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목소리는 속보를 전달한다며 자꾸 같은 내용을 반복했지만 저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는데 먼 나라의 언어처럼 말들이 자꾸 귓가에서 튕겨 나갔습니다. 그때 기사 아저씨가 혼잣말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허허, 김일성이도 사람이었구먼? 세상에, 김일성이가 죽었어! 아저씨는 어쩐지 조금 신이 난 것 같았고, 조금 놀란 것도 같았습니다. 순전히 기쁘거나 후련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중학생이었지만 그 정도의 감정은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앉은 자리의 통로 건너편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어떤 여자가 보였습니다. 창가 좌석에 웅크리고 앉은 여자의 어깨가 흔들렸어요. 여자는 킥킥대다가 금방이라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어요. 저는 왠지 조마조마해져서 자꾸 여자와 기사 아저씨를 번갈아 흘끔거렸습니다. 아저씨는 여전히 허허, 탄식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어요. 여자는 계속 어깨를 떨었고요.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한폭탄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임을 하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뉴스 소리가 너무 커서 여자 쪽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어요. 여자는 정말로 웃고 있었을까요? 설마, 어깨를 떨 만큼 흐느끼고 있었을까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속보가 연달아 흘러나오는 좌석버스 안은 열네살 여자아이에겐 도무지 해석할 길 없는 어리둥절한 세계였습니다. 땀으로 젖은 티셔츠가 에어컨 바람을 맞아 금세 차가워졌습니다. 불쑥 한기가 들었습니다. 웅크린 여자는 제 쪽으로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계속 어깨를 떨었고 저는 겨울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아이처럼 몸을 떨었습니다. 누가 제게 94년 더위에 뭘 했느냐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지금은 사라진 72-1번 좌석버스 안의 냉기입니다.

그 여름도 94년 못지않게 더웠지만, 아슬아슬하게 94년의 기록을 깨지는 못해서 사람들은 약이 오르는 듯 기를 쓰고 94년을 소환했습니다. 저는 그 여름의 한복판을 대학병원 소화기내과 병동에서 보냈습니다. 병원 안은 냉방이 세서 얇은 긴소매 옷을 걸쳐야 했습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그해 여름 저는 아파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게 제가 맡은 일이었으니까요. 직장인처럼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실을 지켰습니다. 시아버지가 담도암으로 세번째 입원 중이었습니다. 노인의 담도는 자꾸 막혔고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노구 안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암을 수술로 들어내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일단 암이 일으키는 부수적인, 그러나 사실은 결정적인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는 치료를 하느라 입원이 잦았습니다. 그 여름에는 몇개월 전 삽입한 스텐트가 막히는 바람에 온몸의 염증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치솟아 막힌 관을 뚫고 새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과 염증 치료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옆구리에 뚫은 구멍으로 안쪽에 고인 물을 빼내고 엑스레이 촬영으로 시술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매일 채혈로 염증 수치를 살폈습니다. 시아버지는 20여년 전 배우자와 사별하고 홀로 아들 하나를 뒷바라지했습니다. 이제 늙고 병든 시아버지의 보호자는 아들과 며느리, 이렇게 둘이 되었습니다.

세진의 연인이 되어 처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시아버지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들었어도 낯간지러웠을 말을 직접 들은 게 하도 인상적이라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짙은 라일락 향기가 온몸에 휘감겨왔던 일도 잊지 않습니다. 봄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런 극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결혼하고 나서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대할 것이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고, 실제로 제 부모보다 더 살뜰하게 저를 ‘딸처럼’ 대했습니다. 길을 걷다 즉흥적으로 가게에 들어가 반짝이는 큐빅이 잔뜩 박힌 머리핀을 사서 직접 머리에 꽂아준다거나 가판대에서 꽃무늬 스카프를 사서 목에 둘러준다거나 하는 행동도 퍽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버님은 참 사랑이 많은 분 같아.” 언젠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세진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했습니다. “너도 아버님 닮아서 사랑이 많은가봐.” 어느새 저도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 제 부모는 시아버지가 홀몸이니 같이 사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정말로 한집에 살게 될까봐 걱정되는 마음까지 깨끗이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신혼부부 끼고 사는 추태를 부리면 되겠냐며 먼저 깔끔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나이대 남자 노인 같지 않게 혼자서도 살림을 잘 꾸려갔습니다. 24평 아파트 베란다와 거실에 각종 식물 화분이 즐비했고, 부엌 냉장고 문에는 방송에서 본 음식 조리법 메모가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낡은 싱크대 겉면을 화사하게 리폼할 줄도 알았고 계절에 따라 식탁보를 바꿔 깔 줄도 알았습니다. 요일에 맞춰 노인대학과 주민센터의 다양한 강좌를 들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울렸습니다. 매주 목욕탕에 가 몸을 씻으며 노인 특유의 체취를 경계했고, 남보다 일찍 세어버린 백발을 멋지게 다듬었습니다. 비싼 옷 브랜드는 몰랐지만 늘 옷차림을 깔끔하게 신경 썼습니다. 제 결혼식에 왔던 친구 하나는 혼주석에 홀로 앉은 시아버지를 보고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이구나”라고 속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아버지가 무학에 맨손으로 상경해 갖은 고생 끝에 가정을 일궜다는 사실은 결혼 전 세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평소보다 술이 과했던 세진이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자신의 아버지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저는 그때 세진에게서 연인이 자기 아버지를 무시하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을 감지했습니다. 잠시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심정이 들기도 했지만, 세진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사람을 학력이나 재산 정도로 판단하는 속물이 아님을 세진에게 입증할 자신이 있었고, 뒤집어 생각하면 오히려 제가 세진에게 평가를 당하는 형국이었지만 그마저 크게 불쾌하지 않을 만큼 세진을 이해한다고 믿었습니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무작정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바탕에는 세진과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고요.

시아버지는 세진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전 세진의 집에 드나들 때부터 그는 ‘많이 배운’ 며느리가 생겨 기쁘다며 스스럼없이 제게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가전제품 실행 버튼이나 거리 간판에 당연한 듯 쓰여 있는 알파벳을 어떻게 읽냐고 물었고, TV를 보다가 모르는 외래어가 나오면 세진이 아니라 제게 물었습니다. 그의 지적 욕구는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어린 시절 겨우 한글만 뗐다는데 성인이 된 후 꾸준히 한자와 역사, 상식 등을 독학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존경심이 솟구쳤습니다. 세진은 결혼하자마자 제게 노트북을 선물하면서 결혼 전 제가 쓰던 컴퓨터를 시아버지에게 드리면 좋겠다고 귀띔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낡은 컴퓨터를 어찌나 반기는지 새 컴퓨터를 사드릴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컴퓨터가 생긴 시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제게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쇼핑을 하고 한글 프로그램으로 동네 친목회 주소록을 만드는 정도였지만 시아버지는 신나게 새로운 기술을 배워갔습니다. 주말에 저와 시아버지가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 세진이 점심으로 비빔국수를 만들어 내왔습니다. 결혼 첫해 초여름은 활짝 열어놓은 창을 통해 커튼을 부풀리며 들어오는 바람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 그리고 자꾸만 표 밖으로 도망쳐서 시아버지를 쩔쩔매게 했던 화살표 모양의 커서로 기억됩니다. 시아버지의 극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입원이 반복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제가 병상을 지키고 저녁부터 밤 동안은 퇴근한 세진이 지키는 일상이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세진과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을 대충 처리하고 밀린 번역 일을 하다 늦게 잠들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일어나 세진이 갈아입을 옷과 환자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 또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9시쯤 병실에 도착하면 시아버지는 혼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TV를 보고 있거나 병동 휴게실에 나가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보호자용 의자 밑에는 세진이 벗어놓은 빨랫감이 쇼핑백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저는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잤을 간밤의 세진을 떠올리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은 병상의 환자를 향하는 게 옳았지만, 솔직히 연민과 사랑은 정확히 비례하지 않던가요.

벌써 세번째 입원이었는데도 시아버지는 저를 보자마자 왜 왔느냐, 얼마든지 혼자 있을 수 있으니 집에 가서 쉬라고 채근했습니다. 한창 일할 사람들 시간을 이렇게 뺏어서 어떡하느냐, 안 그래도 바쁜 애를 맨날 간이침대에서 재워서 어떡하느냐,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암 환자라도 혼자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고 혼자 수저질도 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세진이나 저나 환자의 곁을 지키면서 딱히 몸을 써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몇번 찾아오는 간호사와 담당 의사를 만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엑스레이나 CT 촬영을 위해 다른 층으로 이동할 때 동행하는 것, 식사 때 식판을 가져와 침대에 놓아주고 다 먹으면 다시 복도에 내다 놓는 것 등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란 정말로 옆에 있어주는 것, 곁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는 정도였어요. 시아버지는 원래 자식들과 대화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입원하면서 말이 더 늘었습니다. 말하기 외에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요.

노인의 기억은 수십년 전 경북 산골의 어느 개울가에서 처음 인공비누 향기를 맡았을 때의 경이로움에서 출발해 무작정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던 첫사랑과의 도피행각까지 온갖 시공을 누비며 제게 전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수굿해지는 오후, 환자가 잠시 낮잠에 빠지면 그제야 저는 기억의 결계에서 풀려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면 조용히 노트북을 꺼내 밀린 작업을 하기도 했고, 1층에 내려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오기도 했습니다. 병실은 2인실이었는데, 입원 기간이 긴 시아버지가 창가 자리를 차지했고 입구 쪽의 침대는 단기 입원 환자가 들어올 때도 있고 비어 있을 때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창밖의 맹렬한 무더위와 차단된 유리벽 안에서 안온하게 잠든 환자와 저만이 세상이 모르는 깊은 바닷속을 잠영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곳은 통증도 죽음의 공포도 닿지 않는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이었습니다. 아직 원망도 미움도 당도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끼리 순진하고 평온했습니다. 적어도 그 풍경에 금이 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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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모님.

잘 부탁드려요, 여사님.

터무니없는 인사였습니다. 대학병원 순환기내과에서 일하는 세진의 친구가 간병인 파견업체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세번째 입원 일주일 만에 우리의 평온한 풍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온 징조는 시아버지의 불면이었습니다. 지난번 입원과 비교해 염증 수치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환자가 그 사실을 예민하게 느꼈는지 갑자기 심각한 불면이 찾아왔습니다. 밤을 지키는 세진의 말로는 한시간에 한번은 일어나 화장실에 가거나 잠이 안 온다며 어둑한 복도를 돌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수액 거치대를 쇠고랑처럼 끌고 잘그락잘그락 밤의 복도를 천천히 걷는 시아버지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진의 눈 밑이 푹 꺼진 걸 보니 환자의 불면은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안 그래도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는 세진이 잠까지 못 자니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낮에도 10분, 20분 깜박 조는 시간을 빼면 거의 뜬눈으로 보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는 시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니라 행여 잠이 들까 두려워 사투라도 벌이는 사람 같았습니다. 잠과 대치 중인 불침번 병사 같았달까요? 잠에 지는 순간 삶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환자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찾아오면 제발 자고 싶다고 하소연했지만, 그 말이 제게는 왠지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잠이 그에게 무엇을 연상시키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요? 하지만 며칠 새 푹 패어버린 노인의 양쪽 뺨을 보고 있으면 마력을 써서라도 재우고 싶어졌습니다. 담당 의사는 수면유도제를 처방했다고 했는데, 양을 늘리고 종류를 바꿔봐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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