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자명성의 감옥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부쳐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critikim@chollian.net

 

 

 

1. 논쟁은 아무리 지독한 논쟁이라도 좋다

 

아직도 리얼리즘론이라니…… 짐작이지만 90년대 세대들이라면 이렇게 혀를 찰 만도 하다. 해방 전까지 갈 것도 없이 70년대부터만 해도 그후 30년 동안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의는 우리 비평사의 단골손님이었다. 다만 7, 80년대의 리얼리즘 논의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양상을 띠었다면, 90년대 이후의 리얼리즘 논의는 소극적이고 암중모색의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90년대 초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제를 둘러싼 리얼리즘론자들 내부의 추상수준 높은 논쟁이 썰물처럼 급격히 빠져나간 뒤, 중반 무렵부터는 일종의 리얼리즘 해소론이라고 할 만한 논의들이 고개들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일부 완고한 리얼리즘론자들의 꾸준한 단속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최근에는 이른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는 명제가 제출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90년대는 리얼리즘론이 여러모로 곤경에 빠져든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리얼리즘론의 강점은 그것이 역사적·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체계와 관련된 강한 역사의식과 총체적 세계인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데, 90년대를 경과하면서 통시적 역사인식에서도 공시적 세계인식에서도 리얼리즘론은 돌아가 의지할 확실한 정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리얼리즘론은 확실히 일종의 답답한 동어반복이 되고,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어갔다. 리얼리즘의 가장 단순한 원리가 ‘현실 혹은 실제에 즉하는 것’이라면 90년대의 리얼리즘론은 그 현실과 실제에 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릇인가를 뼈저리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목하 또다시 ‘리얼리즘’이 출몰하고 있다.

임규찬(林奎燦)이 『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에 발표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이라는 글은 새로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시작이 되었다. 2001년에 나온 세 비평가의 평론집, 즉 최원식(崔元植)의 『문학의 귀환』(창작과비평사), 윤지관(尹志寬)의 『놋쇠하늘 아래서』(창작과비평사), 황종연(黃鍾淵)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에 대한 리뷰 형식의 이 글은 이 세 비평가들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관한 견해들에 대하여 자못 논쟁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윤지관에 대해서는 도구화된 당파성론에 매달리고, 자유주의와 모더니즘을 혼동하여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모더니즘까지도 부정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어 황종연에 대해서는 리얼리즘을 일개 반영론으로 격하시키고 있으며, 모더니즘에 의한 리얼리즘 흡수통합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황종연의 90년대 작가들에 대한 독법을 문제삼고 있는데 황종연이 장정일(蔣正一)과 최인석(崔仁碩)을 ‘비루한 것에의 매혹’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은 것, 신경숙(申京淑)과 윤대녕(尹大寧)을 ‘내면의 탐구’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은 것을 사회성의 문제를 간과하고 스타일과 기법의 유사성에만 착목한 ‘모더니즘적’ 입장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최원식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에 대해서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라는 대립물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 일종의 중도통합론, 또는 버먼식의 포괄주의로 기울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윤지관이었다. 그는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에 기고한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에서 임규찬의 예의 ‘삼각형 그림’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다시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환영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리얼리즘의 심화를 통한 모더니즘의 통합’론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그는 나름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특수한 지위와 성격에 대한 통찰을 펼치면서, 백민석(白旻石)·장정일 등 90년대 소설계의 총아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통해 한국 모더니즘문학에 대하여 ‘자기 안의 계급과 민족’을 발견함으로써 모더니즘적 한계를 넘어 리얼리즘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 뒤를 황종연이 이음으로써 논쟁은 한층 제 꼴을 갖추게 된다. 황종연이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에 기고한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 자체가 “차이의 통제에 의존하는 동일성 구축의 논리”를 지니고 있으며, 사실상 둘 사이의 경계가 칼로 베듯 확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먼저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임규찬·윤지관 등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논전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임규찬과 윤지관 등 리얼리즘론자들이 펼치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의 법정”이며, 임규찬과 윤지관, 나아가 최원식과 백낙청(白樂晴) 등은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경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도모할 뿐이다. 이어서 그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에 기대어 “액체 근대에 적응·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말하고, ‘고체 근대’에 속박된 윤지관 등을 비판한다. 다만 그가 끝부분에서 90년대 문학의 나르씨시즘을 비판하고, 개인을 넘어서 개인 사이의 제휴를 독려함으로써 ‘리얼리즘’과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전의 논쟁들이 주로 ‘리얼리즘론 진영’ 내에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면, 이 일련의 논쟁은 각자 공공연히 리얼리즘론자, 모더니즘론자로 자처하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전개됨으로써 본격적인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이름에 값한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 점에서 논쟁에 과감히 뛰어든 황종연의 자세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 논쟁이 지니는 또 하나의 의의는 그것이 이전의 논쟁들과는 다르게 담론논쟁으로 일관되지 않고 90년대에 산출된 구체적인 작품을 매개로 하는 해석논쟁의 형식을 띰으로써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이 현단계 한국문학의 실상과 함께 나아가는 바람직한 양상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이 잘 발전하면 마치 70년대가 그랬듯이 작품이 이론을 산출하거나 통어(統御)하는 ‘생산적 전환’도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정의 관례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지만 적어도 문학비평계에서는 그 반대가 옳다.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논쟁은 없이 모양만 바꾼 온갖 흥정들이 횡행하던 우리 평단에는 싸움다운 싸움이 정말 아쉽다. 아직은 관찰자적 위치에 있는 나의 이 글이 벌어진 싸움을 더 키우는 데 얼마나 기여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흥미로운 논쟁을 목도하는 내겐 옅은 흥분이 인다. “논쟁은 아무리 지독한 논쟁이라도 좋다. 제발 순조롭지만 말아다오.” 이것이 이 논쟁을 바라보는 솔직한 내 심정이다.

 

 

2.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그 이항대립을 넘어서

 

임규찬의 ‘선언’과 ‘사고’ 사이에는 일정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황종연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가 윤지관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체계가 아닌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할 때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하는 길로 나선 것처럼 보이는 반면, 황종연과 작품해석을 다툴 때는 틀림없는 루카치주의자로 나타난다. 과연 그가 말하는 ‘리얼리즘론의 근원적 재구축’ 프로그램에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나 작품들에 대한 ‘루카치주의적 편견’에 대한 재검토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일종의 악순환이다. 하나의 글 안에서 “리얼리즘을 근본에서 지지하는 입장”이라는 진술과 그러면서도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이 이런 식으로 순환하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윤지관의 경우는 이런 식의 착종이나 충돌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경우 리얼리즘에 대한 신념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념은 그가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를 리얼리즘이라는 체계 속으로 환원시키며 리얼리즘의 절대적 지위를 고수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