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나희덕 羅喜德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최근 시집으로 『야생사과』 『사라진 손바닥』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끝나지 않은 술루세(Chthulucene)는 미친 정원사처럼 인류세의 쓰레기, 자본세의 박멸주의, 그리고 부스러기와 찢어진 조각들과 퇴적물들을 그러모아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과거들과 현재들과 그리고 미래들을 위해 훨씬 뜨거운 퇴비더미를 만들어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

 

 

1. 지구는 불타오르며 녹아내리고 있다

 

2016년 『싸이언스』(Science)에는 얼 엘리스(Erle Ellis)를 비롯해 이십여명이 공동집필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연구진은 그린란드 빙하 지역의 퇴적물 단면을 시각화하고 그 성분을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이끼 등 유기 조직물이 빙하 위를 덮고 그 아래 흙, 유기물과 뒤섞인 플라스틱 찌꺼기, 콘크리트 잔해, 혼합시멘트, 핵물질, 살충제, 금속 성분, 바다로 유입된 비료 반응성 질소(N2), 온실가스 농축 효과의 부산물 등”1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일어난 이 지질층의 변화는 인류세라는 담론의 증거물이자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될 만한 것이다. ‘인류세’(Anthropocene)는 현재의 ‘홀로세’(Holocene)를 잇는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류가 지구를 공멸시킬 주범이라는 위기의식을 담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이 글의 제목에 ‘인류세’ 대신 ‘자본세’를 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는 생태맑스주의자인 제이슨 무어(Jason Moore)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등이 인류세 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도 인류세 개념으로는 당면한 문명적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류세라는 말에는 지구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 담론이 지구의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는 대책들도 기존의 시스템 이론으로부터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위기관리라는 명분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개량화되거나 관료화될 위험도 적지 않다.2 그런 데다 인류라는 막연하고 보편적인 가해자를 상정함으로써 어떤 경제적 계층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대립하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책임을 은폐하고 모든 사람의 책임인양 문제를 희석한다.3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호주에서는 산불이 계속되었다. 작년 9월부터 시작된 산불로 벌써 10억마리가 넘는 야생동물이 폐사되었고, 수많은 생명체가 멸종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존 화재나 호주 산불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2013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우파 정당(자유국민연합)과 보수 미디어들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며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왔다. 줄곧 석탄 수출국 1위를 지켜온 호주는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마구잡이식 삼림채벌을 용인해주었고, 대화재는 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가 지금 같은 속도로 심각해질 경우 2100년이면 해수면이 1미터 이상 높아지고 해안가에 살고 있는 호주 국민의 대다수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한다.4

이런 사정은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에 토대를 둔 이 위험사회는 산업화가 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체계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고, “기술적 선택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그 결과의 계산 불가능성도 커”5졌다. 최근 빠르게 확산되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을 생각해보라. 먼 나라의 산불이 아니라 언제든 나와 가족이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에 온 세계가 사로잡혀 있다. 오늘날 자연재해와 사회적 재난은 무관할 수 없고 국지적 양상을 띠지도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화석연료에 의존한 성장사회를 멈추지 않는 한, 부유한 계층이 기득권과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환경파괴와 노동착취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인류세’ 논의를 주도해온 과학자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는 지구의 급박한 위기상황을 “연료가 바닥난 비행기, 구멍이 난 배, 불타고 있는 집”6에 비유했다. 이 총체적 재난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7이라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의 말처럼, 특정한 나라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책임과 영향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며,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이다.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8 생태문제가 정치체제나 경제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생명정치’ 또는 ‘정치생태(학)’라는 말이 시대적 키워드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1년에 창간된 이래 생태 사상과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녹색평론』의 글들을 일별해보면 생태적 전환을 모색하는 범위나 접점, 문제의식 등이 계속 확대되어온 것을 확인하게 된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에서도 에콜로지가 농업,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민권력 등의 문제와 전방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리 순환적 삶의 질서의 회복과 흙의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회로 방향전환을 하자면, 우리의 집단적 삶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이 “지금 인류사회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환경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이다”라고 했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8면)

 

십대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2019년 9월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지도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꿈을 저당 잡힌 채 미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다음 세대들의 항변 앞에서 시를 쓰는 일이 과연 툰베리의 호소만큼 강렬한 울림과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되묻게 된다. 전지구적 생태위기와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 앞에서 시인은 어떤 공포와 불안과 슬픔과 분노와 우울에 갇혀 있는가. 그 정동(情動)은 시인들의 몸-언어를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가. 이 글은 그런 질문에서 시작해 자본세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몸이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는 지배적 감각체계를 바꾸고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 특히 생태정치가 세계의 위기와 삶의 고통을 발화하는 공통지점으로 등장하고, 다양한 정동의 양태와 언술방식으로 분화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지만, 이 글에서는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최근 시를 중심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이 시인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구조 속에서는 다른 경향을 지닌 것 같지만, 생명과 죽음, 노동과 계급, 문명과 자본주의, 전쟁과 폭력 등에 대한 지속적 탐구와 시적 실천을 해왔다는 점에서 친연성을 지닌다. ‘자본세’의 디스토피아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그들의 몸은 언어라는 가장 무력한,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 주체 중심의 증언과 선언이든, 타자 지향의 질문과 대화이든, 타자-되기의 연행과 제의이든, 그 모두를 ‘저항’9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

 

 

2.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

 

백무산의 시는 일종의 폐허의식에서 출발한다. 「패닉」(『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에서 ‘나’는 한밤중 산길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하얗게 쏟아지는 우주//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나는 드러난다/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자연이나 우주의 풍경이 폐허를 인식하게 하는 거울이 되어준 셈이다. 그 순간 ‘나’는 다짐한다,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고. 마치 인류세의 지질층을 보여주려고 그린란드 빙하 지역의 퇴적물을 탐사한 과학자들처럼, 시인은 패닉에 빠진 세계의 폐허를 언어로 인양해내려고 한다. 그러나 폐허를 인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양」에서처럼 “가라앉은 것은 건져올리지 못한다 그것은 항해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캄캄한 수심 아래 무거운 정적 속으로 배는 멈추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배’가 위험을 적재하고 어둠 속을 항해하는 현대문명의 상징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폐허를 인양하다』가 2015년에 출간된 사실을 감안하면, 이 ‘배’는 구체적으로 ‘세월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참사, 2018년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폭력과 무책임에 의해 일어나고 방치된 사회적 재난들은 ‘지금 여기’의 삶이 폐허임을 말해준다.

이성혁은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들이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미학적 방식으로 ‘증언의 시학’을 채택하고 있음에 주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