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자본주의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최백규와 최지인이 노동과 우울을 그리는 방식에 대하여

 

 

성현아 成炫兒

문학평론가. 평론 「사랑의 파편을 의심하며 믿는 마음」, 저서 『아직 오지 않은 시』(공저) 등이 있음.

dhdlshsp93@naver.com

 

 

1. 분노 없이도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분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분노 이외의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 움직임으로 보고 긍정할지 세계와의 대결 의지를 잃은 것으로 판단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1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많은 논자들이 그 원인으로 주체의 위상 변화를 꼽는다.

박상수는 ‘몰락하는 시대감각’ 속에 나고 자란 젊은 시인들이 그 감각을 체화함에 따라 시적 주체가 왜소해졌으며, 축소된 시적 주체에게는 “‘분노’와 ‘격렬한 파토스’가 스며들 여지가 별로 없”1어 무덤덤한 정서가 폭넓게 발견될 뿐이라고 진단한다. 꿈꿀 미래도, 세상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 무기력해진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이 강렬한 분노를 표출하기는 어렵다는, 그 ‘불가능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인다. 이후 박상수는 양경언의 비판을 일부 수용하며 “현실의 위력을 앞세우는 글은 늘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에 둔감할 수 있음”2을 인정하지만, 젊은 시인들이 변화한 시대감각을 시에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다면 “과연 시인은 달라진 경제조건에 조응하는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일에만 골몰하는 자들일까?”3라는 양경언의 질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고봉준 역시 “지금 한국시의 주력으로 평가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의 감정이 표면에 드러나는 장면을 찾기”4 어려워진 사정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주체화 방식, 즉 주체성의 위축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고봉준은 분노의 부재가 결핍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젊은 시인들이 세계와 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것일 뿐 부조리한 세계에 여전히 항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표출 방식이 변화한 것이라는 고봉준의 해석은 타당해 보이며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인들이 “‘분노’라는 익숙하고 투박한 길보다 유쾌한 반란과 분열의 길을 선호”5한다고 서술하면서도 ‘선호한다’라는 술어에 담긴 능동성이 무색하게 현시대에서는 분노가 발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듯 보여 의문이 남는다. 고봉준은 분노란 강력한 주체성에서 발현되는 감정이기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희미해진 주체에게서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삶과 노동의 가속화”6가 분노가 일어날 여지 자체를 없애버렸다고 이야기하며, 분노가 생기기 어려운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전제하는 ‘주체의 왜소화로 인해 분노가 배면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는 인과는 자칫 젊은 시인들이 변화하는 주체의 위상과 시대감각을 그저 ‘수용’하고 그에 부합하는 실감을 시에 ‘반영’하는 수동적 존재로 비치게 할 위험이 있다. 개인의 고립이 시적 주체의 축소로, 열악해진 경제적 여건에 기반한 시대감각이 무기력한 시적 태도로 직결되지는 않듯, 분노라는 감정이 생겨나기 어렵게 된 현실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시적 경향성으로 곧바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적 경향이란 물론 시인들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에 응전하기 위해 현실적 조건과 길항하며 구축하게 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젊은 시인들이 놓인 현실의 특수성과 이에 대응하는 방식, 나아가 그 둘의 상호작용 양상까지 헤아려 분노를 선택하지 않게 된 사정을 살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젊은 시인들이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게 된 데는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기보다, 자본주의에 잠식된 세계와 맞서기에 분노가 충분히 효과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된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분노란 겨냥할 대상이 분명해야 하는 감정이기에 파편화된 현 사회에서는 확산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격렬한 감정의 분출은 영악해진 자본주의 앞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대적하는 일에는 몇가지 곤경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미 치밀한 방식으로 일상에 침투하여 다양한 대상들과 결탁했고 인식되기 어려울 만큼 자연화되었기 때문이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든다. 이는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7까지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선택 가능한 체제 중 하나가 아니라 대안 없는 유일무이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본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했던 기회비용과 숱한 갈등은 지워지고 가치판단은 중단된다.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향해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작업은 어떤 감응도 창출해내기 어렵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극심한 불평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도리어 그것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질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향한 직설적인 비판이 오히려 자본주의는 공고하며, 혁명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하게 되는 셈이다. 실재하는 불의의 세력이 비교적 선명히 눈에 보이던 시기에는 분노가 효과적인 저항의 동력이 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의 자연화된 구조 앞에서는 바위에 부딪혀 그 내구성을 증명해주는 계란 신세가 된다. 비판을 거두고 냉소로 일관하는 태도도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냉소적인 거리 두기’ 또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8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결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다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가담하는 상태가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리며 공동체는 위축되었다. 지금의 시인들은 자본주의와 맞서기 힘든 최악의 여건 속에 있다. 치밀해진 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영리한 방식이 필요하다. 일격을 가할 강력한 힘보다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그것이 우연성에 기대고 있을 뿐임을 짚어내는 유연한 예리함이 요구된다. 정면으로 돌파하여 깨부술 수 없기에 오히려 세밀한 묘파 작업이 중요해진다. 꼬리를 끊고 달아나버리는 적의 꼬리를 잡고 꼬리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꼬리가 본디 어떤 몸체를 가졌는지 상세히 포착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2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집을 선보이는 최백규, 최지인에게서 그 긍정적인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2. 아버지-아들, 나란히 노동자인 이들

 

최백규의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2022)와 최지인의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9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시집 전반

  1.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2010년대 시인들의 무기력 혹은 무능감 2」,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367면.
  2.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2010년대 시와 시비평에 관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291면.
  3. 양경언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544면.
  4. 고봉준 「분노의 시대, 분노하지 않는 시」,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b 2020, 181면.
  5. 같은 책 192면.
  6. 같은 책 192~93면.
  7.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36면.
  8.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68~69면.
  9. 이하 이 두 시집에서의 인용은 제목만 표기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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