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자본주의 악천후와 이행의 감각
미래를 사유하는 시의 역량에 대하여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지구생활자의 시」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시의 자명종,
세계사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그런 아침이 올까
—진은영 「시인 만세」 부분
평균적 현실과 총체성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작동하는 ‘평균적 현실’이라는 감각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목격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일련의 문단 내 성폭력 폭로는 항상적 재난과 불안의 상태인 여성의 일상이 또다른 ‘현실’임을 드러냈고, 이십년 넘게 계속된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대중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일상이 모든 시민의 당연한 ‘현실’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는 단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미흡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특정 부분을 누락한 바로 그 구멍 난 토대 위에서만 작동 가능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유효성을 획득하는 지점이 여기다. 개인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은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드러내는 일종의 증상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적 현실은 공동의 정치적 현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고 개인적인 것의 정치성은 소수자 프레임과 함께 배제냐 포함이냐의 정치로 축소되었다. 이 파편화된 싸움 속에서 현실에 대한 공통감각을 ‘자본주의 리얼리즘’1이 대체하면서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패배감이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은영은 시가 “세계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이 될 수 있을지 묻는다.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푹신한 세계감이 현실인식과 변화의지를 마비시킬 때 문학은 어두운 잠을 깨워 아침을 여는 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문학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밖에서는 물론 안에서조차 희미해진 듯 보이지만, 현실의 조각난 파편을 맞추면서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통합하고 미래를 그려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 ‘총체성’ 개념과 함께 전체에 대한 사유가 다시 요청되는 맥락2에서 현실에 대한 시적 재현의 양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보편적 성공을 거두어온 것처럼 보였던 자본주의가 그것의 실패와 위기를 드러내는 광범위한 증상으로서 “새로운 보편성”3을 경험하게 하고 있다. 삶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 보편성을 현실의 전모를 파악하고 바깥을 상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다양한 행위자들의 개별적 경험을 매개하는 세계의 총체적 윤곽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을 사유하든 거의 불가피하게 거대담론으로 연결되며, 사유의 실험과 삶의 실험 사이의 거리도 부쩍 가까워진”4 이때, 문학은 스스로 가장 통렬하게 의심하고 뼈아프게 거두어들였던 자신의 역량, 세계에 대한 총체적 사유와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도록 요청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인용한 진은영의 시 제목 ‘시인 만세’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5에서 시작된 질문은 이제 자본주의 악천후를 뚫고 아침의 빛을 끌어올 시의 역량을 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사자성을 넘어서는 일인칭의 역량
전통적으로 시는 일인칭 발화에 가까운 장르로 인식되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통해 일인칭 화자와 자연인 시인 사이의 거리, 일인칭 화자와 그에 의해 재현되는 세계 사이의 거리를 놓고 첨예한 미학적·정치적 쟁점이 던져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서정시의 일인칭 화자가 자기충족적 정원의 주인이라는 비판에 힘입어 분열적 주체나 다양한 인칭의 실험이 확산되면서 한국시의 미학적 가능성이 갱신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를 두기 어려운 참사가 터져나오는 현실 앞에서 일인칭 화자는 다시금 전경화됐고 공동체의 현실에 닻을 내리고 ‘시인’과 ‘시민’이 만나는 주체성을 타진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런데 시인과 시민과 화자가 하나로 수렴되는 자리는 경험의 진정성이 강하게 요청되는 자리로, ‘나’의 당사자성을 정체화할수록 ‘우리’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6 일인칭적 재현 속에서 타자와 우리에 대해 이야
-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은 맑시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사용한 말로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제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을 가리킨다. 최근 자본주의만이 ‘현실’이라고 믿게 하는 자연화된 이데올로기를 언급할 때 문학비평이나 사회비평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참조. ↩
- 황정아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개념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서동진 「팬데믹 위기와 총체성」, 『뉴래디컬리뷰』 2021년 가을호; 정홍수 「단절과 침묵, 그리고 ‘이어짐’의 상상력」,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참조. ↩
-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28면. 라뚜르(B. Latour)는 기후위기로 인해 이미 오래전부터 정복과 식민지배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쫓아낸 사람들까지 포함한 전체가 “발아래 아무 세계도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을 오늘날의 ‘새로운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
- 황정아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한국모델’」,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20면. ↩
- 진은영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
- 앞에 인용한 진은영의 글로부터 촉발된 ‘시와 정치’ 논의 이후 시의 일인칭 화자가 ‘우리’를 말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최근 다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양경언의 “‘우리’를 다시 쓰는 실천”(「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송종원의 “‘우리’를 재발명할 기회”(「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선우은실의 “우리-당사자성”(「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것」, 『문학들』 2021년 여름호), 신형철의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나’”(「시적 시민성의 범주론」,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