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자연의 매트릭스와 현실의 사막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2

 

 

시, 자본주의의 ‘무가치한 잉여’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시는 오늘날 인공물과 자연물을 통틀어 자본주의에 복속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시가 위대한 거절과 강력한 저항을 계속해왔기 때문은 아니다. 답은 극히 일차원적이다. 시는 상품성이 없거나 매우 적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는 자본화하지 않는다(/못한다).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본화하지 않는(/못하는) 것보다 더 곤혹스러운 대상은 없다. 자본에 대한 무관심과 절연은 자본에 대한 저항보다 훨씬 치명적인데, 거기에는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는 자본주의사회의 이 ‘순정한 잉여〓바깥’의 자리에 무심하고 적요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진술은 참이면서 참이 아니다. 경쾌하게 팔리는, 자본화에 유연하게 성공한 대중시들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근본적인 데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출판시장의 상품으로 유통되며(팔리든 안 팔리든), 출판시장에서의 1차적 상품성의 결여는 교육시장(각종 문화쎈터, 학교, 특히 대학의 국문과와 문창과 등. 교육시장은 시 교육자들의 취업시장이기도 하다)에서 2차적 상품성에 의해 보완된다. 여기에 각종 문학상과 지원금이 ‘명예’와 ‘보상’의 명분으로 시의 상품성을 측면에서 한번 더 보완한다.

‘무가치한 잉여’와 상품성 사이에서, 자본에 대한 무관심/절연과 예속 사이에서 오늘날 시의 입지는 굳건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중심에 거대담론의 몰락과 미시담론의 번성이 맞물려 있음을 말하는 것은 이제 사족에 가깝다. 변화된 현실은 시의 외적 조건에 머물지 않고, 시의 내용과 형질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이제 한국에서도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말은 우리 문학의 전면적인 형질변화를 단적으로 증언한다.1 이런 상황에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특집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은 우리 시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창비의 자기점검을 아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과 점검은 크게 세 차원에 걸쳐 있다. 첫째, 최원식(崔元植)이 ‘시의 대중화 현상’2과 시비평의 직무유기가 원인이라고 진단한, 시와 시비평이 위축된 현실에 대한 각성. 둘째, 시와 시비평의 새로운 활로에 대한 대안 모색의 필요성 절감. 셋째, 창비가 출판사이자 문학생산의 기지 혹은 복수적 주체로서 근래에 제출한 시(인)들이 ‘갈림길에 선 한국 시’의 현실에 명쾌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창비가 생산해온 시비평 역시 부진한 데 따른 자성.3

이 특집이 작년 여름의 소설론 특집과 짝을 이루는 점을 감안할 때, 창비 필진이 총동원된 소설론 특집이 화제의 작가·작품론을 꼼꼼히 작성함으로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적 충돌’을 예비한 것이었다면, 비평가와 시인이 동석한 이번 시론 특집은 ‘시와 시비평의 위기론’을 필두로 최근 시와 비평에 대한 이견을 다소 산발적으로 개진하면서 ‘공동의 토론과 모색’을 제안한 (데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발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안’에 머문 특집의 고민은 총론에서부터 드러난다. “낡은 시학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학은 도래하지 않은 이 회색의 때에 누군들 자신있게 자력을 말할 수 있을까만, 촉수(觸手)를 예민히하여 자력의 빛을 강잉(强仍)히라도 밝힐 수밖에 없을 터”(최원식 24면)라는 요지의 「자력갱생의 시학」은 의고체의 비장함 속에 정작 ‘자력갱생의 시학’의 실체를 제시해야 할 임무를 미래의 논객들에게 이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원식의 글을 위시한 창비 특집이 오늘의 시현실에 대한 ‘생산적인 대화’를 위한 것이며, 이것이 창비가 홀로 떠맡아야 할 사안이 아닌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대화의 장에 초대받은 자의 몫으로서, 이 글에서는 두 개의 의제를 구체화하는 것으로써 대화의 진전에 조금이나마 일조해보고자 한다. 두 개의 의제는 ‘자연의 매트릭스의 분화’와 ‘현실의 사막―‘현재의 시’들’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의 분화

 

‘자연의 매트릭스’는 자본에 대한 자율성과 예속 사이에서, 동종이형에 불과한 거대 이데올로기와 미시 이데올로기의 교체 속에서 많은 시들이 무반성적으로 함몰된 ‘아름답고 온유한 자연에 대한 가상(假想/假象)’을 의미한다.4 이 가상체제는 현실과 유리되었거나 현실을 왜곡한 결과로서의 자연, 시인의 갖가지 욕망의 투영체인 자연을 영토로 한다. ‘자본’과 ‘현실’의 반대편에 ‘내면’과 ‘미학’의 이름으로 축조된 ‘자연의 매트릭스’는 근래 우리 시의 폐쇄적 자족성과 현실인식의 결핍을 반증하는 부정적인 사건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에는 ‘생태’를 표방하는 시들의 획일적인 인식과 상상 체계도 포함된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생태’와 ‘자연’은 동일한 범주를 갖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한 ‘근대’의 특수한 경험과 인식의 산물로, 생태시는 근대시가 ‘자연’을 형상화하는 하나의 유형에 속하는 시이다. 또한 생태시의 대상은 자연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도시의 물화된 공간은 파괴된 자연의 대립쌍으로서의 생태시의 제2의 탐구영역이 된다(이문재에 의해 전면적으로, 최승호와 김기택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생태시는 ‘자연을 노래한 시’의 부분집합이거나 외부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매트릭스’라는 개념적 도구가 부각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생태에 대한 가상’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가상’이지, 생태시나 생태적인 것 자체가 아니다. “생태적인 것은 무조건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는”(최원식 30면) 지적은 생태시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적절치 않은데, 오늘의 시에서 ‘생태적인 것’은 아직 충분히 조형되지 않은, 본격적으로 구성해나가야 할 미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시의 주제가 되는 현상은 초역사적이지만, 자연이 시에 등록되는 방식과 관점은 역사적이다. ‘자연의 매트릭스’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적 주체와 미학이 처한 역사적 균열의 부정적 반사체이다. 세계를 전유하는, 혹은 세계와 투쟁하는 시적 주체와 미학이 현실의 파행성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가 무갈등의 자연풍경의 양산으로 귀착된 것이다. 오늘날 서정시(인)의 운명은 이 균열을 다루는 태도와 직결되는바,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본질적인 세계와 조각난 현실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고자 하는 시인들”은 “내적 지향에 있어서는 동일성의 미학을, 현실을 포착하는 데는 타자성의 미학을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5 이 이중적인 태도의 견지에는 두 가지 단서가 붙어 있다.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려는 ‘현실의지’와, 동일성과 타자성의 미학의 동시적 실천의 불가피성을 자각하는 ‘미학적 자의식’이 그것이다. 이 요건들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시와 시인은 현실적·미학적 무중력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현실성을 잃은 탓에 미학적으로도 불구가 되는 상태, 현실적·미학적 생산성이 결핍된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들이 노출하는 최대 문제점은 이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매트릭스적 자연이 실제의 현실을 은폐하

  1. 카라따니 코오진 「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 참조.
  2.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20면.
  3. 이 가운데 첫째 항목의 ‘시와 시비평의 위기론’은 둘째와 셋째 항목에 대한 창비의 돌파구로서 채택된 측면도 없지 않다. 창비는 내부의 문제의식을 우리 시 전체의 위기감에 투사한 후, 그 위기의 발화주체가 됨으로써 비평(특히, 위기상태라고 강조한 시비평)의 소임을 대행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난 ‘자연’의 문제점」, 『파라 21』 2004년 겨울호 참조.
  5. 졸고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풍경 속의 빈 곳』 문학동네 2002, 19~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