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자연의 존재론과 무위의 윤리학

따르꼬프스끼의 「쏠라리스」의 경우

 

 

이진경

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저서로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등이 있음. trans@korea.com

 

 

영화로 시를 쓰고 영화로 철학을 하는 안드레이 따르꼬프스끼(Andrei Tarkovsky)는 소설로 철학을 하던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폴란드의 저명한 SF 작가 스따니스와프 렘(Stanislaw Lem)의 동명의 원작(1961)1을 각색한 영화 「쏠라리스」(Solaris, 1971) 역시 그가 서 있는 자리를 재확인해주는 작품이다. 어떤 해설자의 말대로 렘의 소설 『쏠라리스』가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갖고서 “우주는 은하계 규모로 확대된 지구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우주에 대한 어떤 비판적 성찰을 전개한다면,2 따르꼬프스끼에 의해 각색된 영화 「쏠라리스」는 그토록 다른 어떤 우주의 본질을 인간인 우리 자신의 주위로 끌어당겨,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행동, 사고 자체를 당혹 속에서 반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주보다는 인간에 대해서 매우 심오한 비판적 성찰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19세기 이래 모든 사유와 판단의 중심에 선 존재, 푸꼬(M. Foucault) 식으로 말하면 ‘선험적-경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3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적 명제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혹스런 형태로 나타나는 우주와 자연을 통해 당연시된 인간의 관념과 행동, 그리고 그것을 현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근대적 사유 전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자고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쏠라리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다시 사유하도록 촉발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가?

 

 

1. 경이: “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하는가?”

 

「쏠라리스」가, 혹은 쏠라리스가 던지는 이 첫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그 반대의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지 않게 하는가?”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나 사태 앞에서도 놀라지 않으며 당혹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게 시작한다. 수십년을 끌면서도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한 쏠라리스 연구 프로젝트의 ‘정리’를 위해 쏠라리스로 떠날 크리스의 집에, 아버지의 친구가 찾아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쏠라리스 초기 탐사단의 한 사람이고, 실종자를 찾아 쏠라리스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그래서 쏠라리스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기이한 현상을 직접 목격한 이 일급 조종사는 자신이 과학자와 행정가가 모인 중앙의 한 위원회에서 증언했던 기록을 크리스의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을 발견한 그는 그 사실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증언하지만, 기록물에 등장하는 어떤 과학자도—물론 행정가도—그 놀라운 사실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역시 과학자(심리학자)인 크리스도 그의 증언에 대해, 그리고 화를 내면서까지 그것이 진실임을 설파하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역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여러분 중 누구도 그런 사실 앞에서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무들이 동물로 변하고, 동물이 사람의 모습으로, 더구나 자신의 모습으로 변하는 저 놀라운 현상에 대해 그들은, 또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놀라지 않는가? 물론 나나 여러분이나 놀라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즉 그것은 착각이거나 착시 현상 혹은 환각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의 혐의마저 있는 공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증언의 기록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이나 크리스의 반응도 그것이었으며, 여러분의 반응 또한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녹음기에 똑똑히 녹음되었다고 해도 환각이나 착각 등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야말로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M. Heidegger)가 지적한 바 있지만,4 그리스시대에 과학, 기술을 뜻하던 ‘테크네’(techne)란 사실 놀라움과 경이에 결부된 개념이었다. 1년이 지나면 정확히 저 자리로 다시 돌아오다니, 저 별의 운행은 놀랍지 않은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를 갖는 것인데, 나무로 된 건 물에 뜨고 돌로 된 건 가라앉으니, 이 또한 놀랍지 않은가? 등등. 이러한 경이가 대체 왜 그럴까 하는 질문을 낳은 것이고, 바로 이것이 세상의 운행과 우주의 질서(cosmos)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시동력(始動力)이었다.

반면 근대의 과학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따라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놀라움과 경이로 그것을 보면서 “왜 그럴까?”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리 끌어다 맞추려고 해도 되지 않는 그 현상이 반복하여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때론 그것을 사소하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밀치며 시야에서 지워버리고, 때론 멀지 않아 설명될 것으로 유예해둔다. 그리고 아예 법칙이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타나면, 환상이나 환각, 착시로 ‘설명’하거나(대체 무얼 설명했다는 걸까?), 미신이나 신비주의적 공상으로 간주하여 비난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건 마치 놀람을 어떻게든 피하고 모면하려는 집요한 노력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놀라운 현상을 눈앞에서 지워버리고, 진실에서 몰아내며, 거짓과 착각으로 만듦으로써, ‘비놀람’의 세계와 비당혹의 세계 안에서 안주하고 안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과학자들은 놀라고 당혹한다. 그 정도가 너무도 강렬해서, 크리스가 우주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친한 친구이자 우수한 물리학자 개버리언은 이미 자살해버린 뒤였다. 조종사의 증언에 전혀 놀라지 않았고, 진실임을 강변하는 그의 주장을 쉽게 조소해버릴 수 있었던 크리스도 놀라며, 그것을 통해 과학적 사유에 익숙한 우리도 놀란다. 무엇이 저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과학에 대해 확신하고 우주정복을 꿈꾸는 조종사를, 그리고 그 조종사를 비웃었던 크리스마저 한없는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미신이나 착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령 강한 신념을 가진 과학자의 바로 앞에 직접 다가온다면 어떻게 될까? 가령 과학자는 ‘유령’ 앞에서 놀라지 않을까? 아니,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니 접어두고 다시 묻자. 과학자들은 악몽에 놀라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터무니없는 사건이 자신의 목전에서 실제로 벌어질 때,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손님들’의 출현으로 지칭되는 새로운 사건 때문에 쏠라리스는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에 거주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극도의 불안을 수반하는 극한적 놀라움을 야기한다. 마치 말로만 듣던 유령을 직접 대면하게 된 아이들과도 같은. 이 경우 이해될 수 없는 사실조차 미래의 이해를 기대하며 미루어둠으로써 불안을 제거하던 이전의 방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미신이나 환각으로 간주하던 치사하지만 편리한 ‘과학주의’도 힘을 쓰지 못한다. 여기서 쏠라리스란 과학자들의 모든 양식(良識, bon sens)을 벗어나는 사건이고, 모든 종류의 ‘알음알이’를 벗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당혹하지 않는 이 과학자들을 극도의 당혹 속으로 몰아간다. 양식이 파괴되는 곳에

  1. S. 렘, 강수백 옮김 『쏠라리스』, 시공사 1996.
  2. 같은 책 288면.
  3. M. 푸꼬, 이광래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1986, 365〜69면 참조.
  4. 박찬국 「현대기술문명의 본질과 위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상」, 『시대와 철학』 제4호, 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