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자유와 혁명과 사랑을 향한 여정

김수영의 시세계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왜 아직 김수영인가?

 

김수영(金洙暎, 1921~68)이 떠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포연은 아직 자욱한 것만 같다. 그처럼 한국 근현대시 역사상 격렬했던 시인이 드물어서일 것이다. 또 만만찮은 ‘물음’을 남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설령 ‘신화화’라는 부정적인 현상을 인정하더라도 한국시는 김수영의 자장 안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김수영은 시인들에게 평생 넘고 싶은, 또는 넘어야 할 ‘적’이기도 하다. 니체의 말대로 진정한 적은 자신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창조하게 만든다.1 진정한 적은 친구가 되기도 하며, 친구를 적으로 삼을 줄 아는 역량만이 시를 쓰게 한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어떤 점이 이렇게도 끈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있는 걸까? 단지 그가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어서일까? 그래서 그것에 대한 예의 혹은 오마주 때문일까? 하지만 현재의 삶에 아무런 파고를 일으키지 않는 ‘기념비적 역사’란 조용히 그 움켜쥔 손을 놔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역사인식은 1960년 중반 무렵부터 김수영 자신도 가졌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무거운 역사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만큼 명랑하고 긍정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시인도 드물 것이다. 이 점은 나중에 살펴볼 주제이기도 한데, 암튼 김수영이 떠난 지 50년이 되도록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수영을 적으로 삼을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김수영에게서 받아야 할 유산과 청산해야 할 유물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려면 그가 남긴 작품들과 그 작품을 통해 드러낸 의지와 인식, 그리고 정신을 우리 시대의 것과 함께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아봐야 한다. 문학에서, 특히 시에서는 이런 작업이 어떤 층위에서건 행해져야 하며 도리어 두말을 하는 게 췌언에 가깝다.

그의 시적 공생애에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든 아니면 역사적 사건의 개입 때문이든 ‘차이’가 우글거린다. 이 말은 그가 남긴 작품 사이에, 심지어 한 작품 안에서도 크고 작은 전회(의 기미)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그동안 도드라지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의 시의 난해성 때문일 것이다. 그 난해성이 차이를 가렸거나 또는 난해성 자체에 붙들려서 독자들이 그 차이를 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 이 난해성에 연구자들이 어떻게 접근했는지는 솔직히 소상히 알지 못한다. 대략 남은 기억으로 말하자면, 김수영 시의 난해성은 문학사적 관점에서, 즉 근대에 등장한 문예사조에 입각해 정리된 면이 있다. 이런 현상은 김수영을 계승했다는 특정 한국시의 흐름에 다소 맥락 없는 난해성을 기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 우리는 아직도 김수영인가? 결론을 일부 당겨 말하면, 그의 시는 싸움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싸움이 행동주의자의 방식이 아니어서 필연적으로 그의 시에 난해성이 부여되었을 따름이다. 물론 김수영 시의 난해성은 김수영 특유의 인식 방법 또는 표현 방식에 큰 원인이 있다. 새로움을 위한 고투야말로 그의 시 전체에 흐르는 전류인데, 그의 새로움은 근대적 양식으로 새로워지던 현실에 대한 응전에서 시작되었다. 「서시」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새로움에 대한 기투에 끼어든 허위 또한 인식하고 있었고, 현실과 자신의 응전 사이의 괴리로 인한 피로를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수영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2(「달나라의 장난」)을 평생 간직했다. 그런데 이것은 의지였던가? 아니, 다소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은 그의 기질이었고 그의 본래적 역량이었다.

 

 

자유

 

이제는 진부하게 들리기까지 하지만 ‘자유’는 김수영의 시를 설명하는 데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열쇳말이다. 그가 바랐던 자유는 1960년대에 생산된 산문에서도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가 느끼기에 그만큼 대한민국의 현실에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일성 만세」는 그가 얼마나 근원적인 자유를 갈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 산문 「창작 자유의 조건」에서도 자유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면서, 자유에 대한 시인들의 불철저한 인식을 질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김수영이 가졌던 긴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유’는 추상어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4·19혁명 당시 “위대했던 것은 한국 시인이 아니라 자유였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유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시를 보는 기준은 이 ‘자유의 회복’의 신앙이다. 작품이 좀 미흡한 데가 있어도, 그 시인이 시인으로서의 자유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때는 좋게 보이고 또 좋게 보려고 한다”(이상 산문 「자유의 회복」)고까지 했다. 김수영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언론(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와 ‘반항의 자유’를 넘어서 해방의 이미지를 갖는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직후 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病捕虜) 동지들에게」는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가 실존적인 깊이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부분

 

이 대목은 한국전쟁 때 끌려간 의용군으로서 “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왔다가 뜻밖에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 자전적 경험을 압축하고 있다. 그가 전쟁과 포로수용소 생활을 통해 얻은 자유에 대한 뼈저림은 사실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시가 그의 전쟁 체험을 압축해놓았다 해서 과거를 단순하게 상기한 작품인 것은 아니다. 도리어 “악귀의 눈동자” 같은 시간을 딛고 앞으로의 여정을 말하고 있기에 심각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보는 각도에 따라 이 작품은 마치 ‘반공시’로도 읽힌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김수영의 몸에 깊게 새겨진 전쟁 그 자체의 기억이다. “북원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

  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134면. “내가 나의 적들을 향해 던지는 창이여! 결국 내가 창을 던질 수 있게 되었으니, 내 적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2.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2018. 이하 김수영 작품의 인용은 모두 이 책(전2권)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