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자유인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며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 『살아 있는 과거』 『문학과 시대현실』 『모래 위의 시간』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등이 있음.

mwyom@ynu.ac.kr

 

 

지난 4월 2일 오후 채현국(蔡鉉國, 1935~2021) 선생의 작고 소식이 전해지자 가슴에서 덜컥하는 소리가 났다. 채선생이 그동안 여러해째 병원을 들락거렸고 최근엔 자못 위중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내게는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이 온 것이다. 2017년 9월 초 녹색병원에 문병 갔을 때만 해도 채선생은 병상에서조차 문병 간 사람들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을 만큼 활기가 넘치고 이야기에 거침이 없었다. 늘 그렇게 잔칫집 같은 떠들썩함으로 가까이 계시리라 믿어왔기에 그의 죽음은 온 세상이 적막에 드는 듯한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렴풋이나마 처음 채선생에 관한 소문을 들은 것은 1960년 봄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다들 가난했다. 제대로 학비 내면서 ‘밥 먹고’ 다니는 대학생은 많지 않았고 나 같은 지방 출신들은 형편이 더 어려웠다. 그러니 “빡빡 깎은 머리에 찢어진 바지를 걸친 노숙자 차림으로” 교문 앞 다리에 서서 파격의 담론을 설하는 기이한 철학도 소문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 전설처럼 흘려들었던 소문의 당사자를 오래지 않아 학교 바깥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구문화사란 출판사에 편집사원으로 근무하던 1965년경이었다. 그 무렵 신구문화사에는 시인 신동문(辛東門) 선생이 편집고문으로 계셨다. 신선생은 나름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니 딱한 처지의 동료들 뒷배 노릇을 하는 비주류 문단의 중심이었다. 그는 문학 전문 출판사의 편집자로서 김수영(金洙暎), 민병산(閔丙山), 구자운(具滋雲), 천상병(千祥炳) 같은 직장 없는 문필가들에게 원고 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월간 『세대』의 자문역을 맡아 이병주(李炳注) 같은 대형 소설가를 발굴하고 최인훈(崔仁勳) 같은 유망한 작가에게 장편연재의 기회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내가 채현국 선생을 알게 된 것도 신동문 주변에서였다. 비슷한 경위로 백낙청(白樂晴) 교수와도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서로 친구 사이인 채현국·백낙청 두분은 그들의 또다른 친구인 소설가 한남철(韓南哲) 선생을 통해 신동문과 그밖의 문인들을 알게 됐으리라 짐작한다. 한남철은 1959년 『사상계』로 등단하여 그곳 기자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문단에 발이 넓었고, 따라서 새 잡지의 창간을 준비하던 백선생에게는 그런 한선생의 도움이 요긴했을 것이다. 한선생은 1968년인가에 새로 창간된 『월간중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도 창비에 자주 들르고, 창비 출신 문인들에게 자주 지면 제공의 호의를 베풀었다. 아무튼 1966년 1월 15일 발간된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안표지가 신구문화사의 책 광고인 걸 보면 어떤 경위로 이 광고가 실리게 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돌아보면 『창작과비평』의 창간은 단지 문예지 하나 새로 만들자는 의도만의 산물은 아니었다. 가령 통권 10호(1968년 여름호)에 백선생이 쓴 편집후기 「『창작과비평』 2년반」을 창간 55년을 넘긴 통권 192호의 시점에서 읽어보면 당연히 엄청난 격세지감이 들지만, 그러나 세월을 관통하여 여전히 공감되는 측면도 느껴진다. 척박한 풍토에서 뜻있는 잡지를 ‘2년 반이나’ 버텨낸 것을 스스로 대견해하는 광경은 미소를 자아내지만, “뜻있는 이를 불러 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라던 애초의 기대와 소망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일단의 성공을 자축(自祝)할 수 있을 듯하다”는 발언에 내재된 다짐은 오늘날 더 강조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기대와 소망’의 바탕에는 잡지사업의 중심인 백낙청 선생뿐만 새로운 잡지의 창간에 공감하고 뜻을 함께했던 채현국·임재경(任在慶)·김상기(金相基)·이종구(李鍾求)·한남철 등 동지들의 염원도 깔려 있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물론 채선생 자신은 언제나 멀리서 성원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로서는 부친 채기엽(蔡基葉) 선생이 벌여놓은 사업에 전념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1967년 늦여름 부친 회갑연에 초대받아 가서 집 안과 마당을 가득 채운 흥겨운 잔치판을 보았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기념품으로 받았던 스테인리스 재떨이는 지금도 우리 집 어딘가에 남아 있는데, 2009년 가을 나의 둘째 녀석 혼사를 앞두고 채선생이 축의금 전한다고 일부러 산본까지 오셨기에 재떨이 얘기를 꺼냈더니 무척 반가워하며 자신에게는 그 재떨이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채선생 부친을 회갑 때 딱 한번 뵈었을 뿐이므로 도무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후 흥국탄광 서울사무소를 여러번 찾아갔어도 사장인 채기엽 선생이 자리에 있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채선생이 작고한 뒤에 읽은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 피플파워 2015)과 『쓴맛이 사는 맛』(정운현 기록, 비아북 2015)을 통해 그밖의 다른 사실들과 함께 의문이 풀렸다. 부친은 천부적인 사업가였지만 한군데 정착할 줄 모르는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내 생애에서 아버지는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보다 오히려 짐 같은 존재였다”는 채선생의 언급은 자신의 일생에 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부친은 사업이건 뭐건 저지르기만 하고 수습은 주로 아들에게 맡긴 채 자유롭게 살았다. 그가 서너살 때 이미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났고, 그런 탓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야 했다. 일제 말기 한창 힘들 때엔 사흘을 내리 굶고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생모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낳은 큰아들과 함께 채현국을 생모 못지않은 사랑으로 키웠다.

해방 후 귀국한 부친은 고향인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하려다가 여덟살 위인 채현국의 이복형이 좌익 쪽에 가까워지자 솔가하여 서울로 옮긴다. 전쟁 동안에는 한동안 다시 대구에서 지냈고, 그런 연고로 전시 연합중학을 다니면서 백낙청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환도 이후 대학 4학년이던 이복형이 휴전조약 당일 “이제는 영구 분단이다”는 말을 남기고 갑자기 자살을 했는데, 이 돌연한 사건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그는 회고한다. 채선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형의 자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도 여러차례 들었다. 이 충격으로 부친은 운영하던 연탄공장을 버려둔 채 집을 떠나 강원도 탄광지대로 갔다. 흥국탄광은 이런 경위로 태어난 것이었다.

내가 채현국 선생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1969년 백낙청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였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장면은 신구문화사의 이종익(李鍾翊) 사장, 신동문 선생과 백낙청 선생, 그리고 나 넷이 장충동의 어느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백선생 안 계신 동안 신구에서 창비를 맡아 책임지기로 이종익 사장이 약속하던 일이다. 그런데 창비 발행으로 생기는 손실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신구는 잡지의 제작만 책임지고 원고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에 나는 1967년 말 신구문화사를 사직하고 대학 조교와 시간강사 노릇으로 밥을 벌면서 창비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원고료가 나오지 않으니 차츰 필자들한테 시달리게 되고 원고를 청탁할 면목도 없어졌다. 할 수 없이 종로1가 흥국탄광 서울사무소로 채현국 선생을 찾아갔다.

퇴근 무렵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면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조선일보의 임재경과 이종구, 동아일보의 이계익(李啓謚) 등 기자 친구들이 주로 왔고 가끔은 소설가 이호철(李浩哲)과 시인 황명걸(黃明杰)도 어울렸으며 흥국탄광 도계 현장소장 박윤배(朴潤倍)와 노무과장 이선휘(李璇輝)도 나타났다. 물론 내가 채선생의 사무실을 찾아가는 목적은 언론계 선배들의 종횡무진 담론을 경청하자는 것이 아니라 창비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하고 원고료 후원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새삼 확인한 사실은 채선생의 창비 후원에는 그럴 만한 까닭도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취직했던 방송국을 3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그가 찾아간 곳은 부친이 운영하고 있던 강원도 삼척의 흥국탄광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부도 직전의 상황이어서 채선생은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녀야 했는데, 이때 그의 사업을 살린 것은 백낙청 선생의 모친이라고 했다. 당시 모친은 백병원 수납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음을 현금화하여 부도를 막아주셨다는 것이다. 모친 입장에서 채현국은 아들의 친구일 뿐 아니라 같은 대구 사람이라는 지역감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후일 채선생은 창비 운영이 어려울 때 자금을 보탠 것은 “모친이 베푼 은혜를 갚은”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채선생한테 받은 후원금과 필자들에게 지급한 원고료 액수를 또박또박 적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몇천만원이 될지 모르는데, 돈의 액수도 액수지만 그보다 나름의 역사적 기록이 될 터였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기록이 유죄의 증거로 악용되던 시대도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물론 채선생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늘 원고료가 모자라, 아마 떼먹고 지나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더러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특히 어느 선배 소설가한테 받은 모욕은 잊히지 않는다. 그때 원고료를 못 받고도 눈감아주신 필자들께는 늦었지만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그 무렵, 그러니까 1971년 늦봄 나는 수유리 산비탈에 15평짜리 조그만 주택을 사서 집주인이 되었다. 손바닥만 한 좁은 마루지만 거기 앉아 눈을 들면 봄에는 진달래가 보였고 겨울에는 눈 오는 경치가 황홀경을 연출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이름의 문패가 달린 집에 살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있던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한남철 선생이 앞서고 채현국·박윤배 두분이 뒤따라 예고 없이 우리 집을 찾았다. 북한산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박윤배 소장은 작고한 지 오래되어 이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백낙청·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이종찬(李鐘贊, 전 국정원장) 등 유명인사들과 비슷한 때 고등학교를 다닌 분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알아주는 협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났을 무렵의 박소장은 단지 강한 주먹의 소유자가 아니라 맑스의 『자본론』을 읽고 체득한 행동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1965년경부터 흥국탄광의 현장소장으로 내려가 있으면서 가족이 있는 서울로도 자주 왔다.

소주 두어병과 약소하게 안주가 놓인 소반을 갖다 놓고 네 사람이 둘러앉자 방은 그득해졌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 채선생은 말이 속사포처럼 빨라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날은 흥국탄광의 경영방침과 노사문제에 관한 박윤배 소장의 거센 공세에 밀려 채선생은 벌 받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삼척지역 흥국탄광은 단순한 탄광이 아니었다. 박정희정권의 유신체제에 반대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피신하는 활동가들을 숨겨주는 것은 차라리 소극적인 역할이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투사의 교육을 위한 민주주의의 후방기지를 꿈꾼 것이 아닐까 막연하게 짐작한다. 그런데 이 대담한 일을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박윤배 소장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처음 고백이지만, 그 무렵 갓 결혼한 소설가 황석영이 중편 「객지」의 발표로 성가를 높인 다음 어느 자리에선가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박소장은 한동안 나를 통해 황석영 부인에게 생활비를 전한 적도 있다. 그 무렵 황석영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4·19묘역 근처에 세들어 살았다. 아마 채현국 선생은 이 일련의 사실들을 대강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체 묵인하는 선에서 넘어갔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사업가로서는 힘든 선택이었다. 그러나 결국 1973년 흥국탄광은 자진해서 문을 닫았다. 그때 퇴직금으로 열달 치 봉급을 광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백선생이 귀국하자 나로서는 채선생을 만날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창비가 신구문화사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하고 나도 덕성여대에 전임으로 취직을 한 것이 일차적인 이유였지만, 창비의 재정적 책임을 백선생이 전담하게 된 것도 채선생 찾아갈 이유를 줄였다. 하지만 시국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박정권은 유신선포에 이어 긴급조치를 발령했고 민주진영의 저항도 점점 거세어갔다. 이런 와중에 백선생이 대학에서 파면된 데 이어 나도 대학에서 해직되었다. 창비라는 최소의 근거지를 더 단단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 무렵 채현국 선생은 친구들과 종로1가에 흥국통상이라는 업체를 차렸다고 하나, 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1979년에는 그 흥국통상도 접고, 채선생은 1980년대부터 개운중학교(1968년 인수)와 효암고등학교(1974년 개교)의 운영에만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자택이 있는 서울과 학교가 있는 경남 양산을 오르내리며 풍류객처럼 사는 것 같았다. 1990년대부터는 노는 곳도 서울의 인사동 쪽이 중심이 되고 어울리는 사람들도 민병산 선생이 돌아가신 뒤 신경림(申庚林)을 비롯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았다. 내가 영남대에 재직하는 동안에는 가끔 대구에도 내려와 때로는 여럿이, 때로는 단둘이 만났다. 한번은 수성못 쪽으로 걷다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생모가 살았던 곳이라 했고, 또 한번은 동화사와 파계사가 갈라지는 지점에 이르러 “이 근처에서 내가 태어났다지……”라고도 했다. 어느 땐가는 소설가 방영웅(方榮雄)과 구중관(具仲琯)을 대동하고 영남대에 와서 박현수(朴賢洙)·정지창(鄭址昶)·김종철(金鍾哲) 등 후배 교수들과 어울려 잔디밭 위에서 막걸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채현국 선생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분이었다. 그는 색다르다 싶은 분의 소문을 들으면 기를 쓰고 찾아가 격의 없이 사귀었다. 사귀되 나이, 신분, 재산, 학벌, 남녀 따위를 가리지 않고 사람됨의 근본을 향해 곧장 다가갔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됨됨이에 대한 채선생의 비상한 간파능력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몇마디 주고받으면 벌써 전광석화처럼 그의 사람됨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 외형적 차림새 같은 것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약삭빠른 사람과 말재주가 번지레한 사람, 위선적이거나 출세 지향적인 사람을 그는 잡아먹을 듯이 미워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한 문인과 교수들이 채선생의 통렬한 입담 앞에 가차 없이 무너지는 것을 나는 여러차례 목격했다. 반면에 서투르고 무던하고 좀 모자란 듯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애정을 베풀고 정성을 다해서 보살폈다. 친구이자 사돈인 임재경 선생을 통해 일찍이 리영희(李泳禧) 선생을 소개받아 친해지고 좋아했는데, 까닭인즉 리선생이 똑똑하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순박하고 정이 많아서”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오래 살펴본 바로는 채선생 자신은 결코 단순하고 순박한 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복잡함과 자기의 사유 안에서 들끓는 번다함에 대해 필생의 투쟁을 벌였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병산·권정생(權正生) 같은 소박하고 순수한 분들의 삶을 찬양하고 그런 사람들이 고르게 잘 사는 세상의 도래를 더욱 절실하게 소망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채현국 선생은 2014년 정초 한겨레 인터뷰(이진순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2014.1.4.)를 계기로 갑자기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건강에 문제가 많았음에도 그는 쏟아져 들어오는 강연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팔순을 넘긴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침없는 언변과 거기 담긴 전복적인 사고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를 좋아하고 그와 인연을 맺어온 문화예술인들이 이색적인 전시회를 연 것도 그런 분위기의 결과였다. 원로화가인 이우환(李禹煥)과 방혜자(方惠子)를 비롯해 신학철(申鶴澈), 배수봉(裵水鳳), 박재동(朴在東), 전각예술가 정병례(鄭昺例), 도예가 김용문(金容文), 조각가 박상희(朴相嬉) 등의 출품으로 2017년 11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쓴맛이 사는 맛 그림전: 건달 할배 채현국과 함께하는 예술가들’이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린 것이었다. 지금 이 글도 그때 만들어진 팸플릿에 기고했던 것을 보완한 것이다. 팸플릿의 글 마지막 단락을 여기 그대로 옮겨, 드문 기인(奇人)이자 광기의 철인(哲人)이고 쉴 줄 모르는 학인(學人)이자 통 큰 대인(大人)이었던 채현국 선생의 별세를 삼가 애도한다.

“글과 그림과 춤과 노래에 대해서도 채현국은 어쩌면 세상의 통념과는 다른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채선생 자신도 ‘내게는 그런 거 없어!’라고 할 것 같다. 어떻든 그의 기준이 기득권체제의 내부에서 통용되는 전문가들 위주의 고답적 기준이 아닐 거란 점만은 분명하다. 사람이 고루 평등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예술형식들이 각자의 특성과 지향을 지닌 채 모여들어 용광로 같은 대동(大同)을 이룬 세상… 아마 이런 게 그의 꿈일 것이다. 촛불 1주년을 기념하듯 열리는 이 특별한 전시가 채현국의 그런 꿈의 일단을 세상에 알리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