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용준 鄭容俊

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소설 『바벨』 『프롬 토니오』 『유령』 『세계의 호수』 『내가 말하고 있잖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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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열걸음에 한번씩 멈춰야 한다. 힘들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호흡이 가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손발. 낡은 육체가 거추장스럽다. 부축하려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 로비 소파에 앉았다. 병실까지 모시겠다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까다로운 환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움이 없으면 대부분의 일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대부분의 도움을 거부한다. 센터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되 참여하지 않는다. 미소와 친절 뒤에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시선을 느낀다. 불량하고 악독하고 고집스러운 노인. 맞다. 하지만 나는 애쓰고 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간호사가 이끄는 대로 하고 싶다. 그러나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과 입술이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을 본다. 오랜 투석으로 손등과 팔, 발목과 쇄골까지 혈관이 툭 튀어나와 있다. 피부 밑에 검푸른 거머리가 잠들어 있는 것 같다. 내 것이지만 징그러워 쳐다볼 수가 없다. 투석을 끝낸 핏속엔 해로운 것도 유익한 것도 없다. 움직이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입맛이 쓰다. 구린내 나는 치즈를 구겨 억지로 입에 집어넣는다.

 

노래교실이 한창이다. 기타를 멘 살찐 무명가수가 노인들을 애 취급한다. 형님. 박수 두번 짝짝. 누님. 박수 세번 짝짝짝. 두 손 높이 들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아버님. 해가 떴습니다. 어머님. 해가 졌습니다. 옳지, 잘한다. 늙은이들은 웃고 기침하고 손을 떤다. 노인들은 아기처럼 보이고 좀비처럼 보이고 이제 막 진화를 시작한 원숭이처럼 보인다. 그들을 귀여워하고, 혐오하고, 신기해하는 젊은이들의 눈빛. 내 뜻과 상관없는 이런 미친 짓을 참는 일. 바보들을 상대하는 일. 내가 바보로 변하는 일. 모두 괴롭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니 한 노인이 힘겹게 일어서서 사람들 앞에 선다. 왕년의 인기 개그맨. 지금은 췌장에 암을 달고 있는 시한부 인생. 그는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린 지나간 유행어를 한다. 흘러간 개그고 센터에서만도 지겨울 정도로 보고 또 봤지만 매번 통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걸 볼 때마다 좋아 죽으려고 한다. 나는 속으로 개그맨을 증오하고 비웃지만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 역시 웃음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쿵짝. 쿵짝. 기타 반주에 맞춰 개그맨은 박자에 맞지 않은 노래를 부르고 경련에 가까운 춤을 춘다. 나는 봤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남았을 때 머리를 감싸고 지독한 자괴감 속으로 빠져드는 그의 모습을. 아직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서 편지가 끊이지 않고 선물도 도착한다. 하지만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편지든 소포든 뜯어보지도 않고 간호사들에게 다 줘버린다. 가수가 흘러간 노래를 메들리로 부르고 노인들은 ‘옛날’이라는 바다에 깊이 빠져든다. 나는 팔짱을 끼고 힘겹게 다리를 꼬고 앉는다. 내가 나를 붙잡는 힘에 안정감을 느낀다. 어느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싶다. 어떤 멜로디에도 반응하고 싶지 않다.

졸았던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프로그램은 끝났고 노인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빠. 아빠.”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 막내가 내 옆구리에 팔을 깊숙하게 집어넣고 일으켜 세웠다. 나는 헝겊인형처럼 축 처져서 기립됐다. 한 팔은 막내에 주고 나머지 한 팔은 병원 복도 벽을 잡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센터에 거주한 지 일년이 다 돼간다. 입소한 아내를 보호자 자격으로 반년 돌봤고 지금은 내가 입소자로 산다. 방 한칸. 침대가 있고 티브이가 있고 협탁과 선반이 있다. 소형냉장고 속엔 물과 토마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막내가 문 앞에 서서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작게 말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작게 말한다. 간호사가 티브이를 켰다. 나는 손을 흔들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티브이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전했다. 막내는 휘젓는 내 손을 잡고 그저 미소만 짓는다. 간호사는 채널을 조정하고 몇개의 버튼을 누른 뒤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막내는 내 귀에 속삭였다.

“마지막 축제 안내와 ED 관련 영상이래요.”

 

리본과 풍선이 가득한 연회장. 겨자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은 백발의 노인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사람들은 노인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였다. 노인은 축하와 인사를 받았다. 가족 친지들과 포옹하고 전 직장 동료와 센터 직원들과 악수한다. 담소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노인은 말했다.

“마지막 여정이 즐겁네요.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따뜻할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해요. 이 마음 그대로 영원한 꿈속으로 들어가겠죠.”

화면이 전환되고 위아래 까만 예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밝은 표정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고통 없고 슬픔 없는 세계에서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더이상 아픔을 참지 마세요. 자신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슬픔에서 벗어나세요. 당신의 존엄을 지키고 안락을 누리십시오.”

그래, 당신 말이 맞다. 더는 아기처럼 기저귀를 차고 싶지 않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비참을 겪고 싶지 않다. 몸에서 냄새나는 것을 참고 싶지 않다. 끔찍한 통증. 내일은 더 나빠질까봐 두렵고. 죽을 때 아플까 두렵고.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도 두렵다. 나도 이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정말로 너희가 말하는 영원한 꿈이라는 게 있어?

 

옆방에 있던 소프라노는 한달 전 죽었다. 마지막 축제 전까지 그녀는 쌩쌩했다. 정신도 온전했고 말도 정확했다. 박자는 늘어졌지만 성대가 짱짱해서 죽기 전까지도 「울게 하소서」를 문제없이 불렀다. 혈압이 낮고 당뇨가 있어 멀쩡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지금처럼 관리하면 최소 오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축제가 시작되고 그녀는 점점 느려졌다. 의미 없이 웃고 계속 하품을 했고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았다. 마지막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86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그녀는 ED에 들어갔다. 당일 휠체어에 앉은 그녀를 복도에서 만났다. 그녀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아빠.”

고개를 돌려 막내를 봤다.

“기분이 어때?”

“기분이랄 게 뭐 있니. 이제 때가 된 거지. 마지막 축제는 싫다. 사람들 부르고 마지막을 기념하는 이상한 파티 안 하고 싶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약도 안 먹을 거다. 간호사에게 전해줘. 그래도 주겠지만…… 나는 안 먹을 거야.”

막내는 알겠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등과 팔뚝에 튀어나온 혈관을 쓰다듬을 뿐 다른 말은 보태지 않고 인사했다.

“주말 잘 보내. 월요일에 올게.”

 

방문은 닫혔고 방에 혼자 남았다. 또 몸에서 냄새가 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음식을 흘리고 옷에 침을 묻힌다. 기저귀는 무겁고 짓무른 사타구니와 엉덩이는 가렵고 따갑다. 하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우군이 씻겨줄 때까지 견뎌야 한다. 억눌렀던 화가 솟구친다. 이마와 귀가 뜨겁다. 끔찍한 장례식을 축제라 속인다. 형을 선고하고 정해진 시간에 집행하는 것을 크나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포장한다. 안락사가 허용됐을 때 노인들은 안도했다. 고통의 저주와 치욕의 형벌에서 벗어나 존엄을 지키고 진정한 안락에 이를 수 있다 믿으며 박수쳤고 환영했다. 하지만 몰랐다. 허용이 곧 강제가 되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만 85세가 되면 마지막 6개월은 국립요양센터에 입소해야 한다. 센터에서는 삶의 끝을 목격할 수 있다. 광대한 밤이 시작되고 사막 같은 날들이 펼쳐진다. 낮엔 뜨겁고 밤엔 차가운 모래밭에 푹푹 발이 빠진다. 국가는 노인을 보호하고 건강을 책임진다. 쉴 곳을 마련하고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교육하고 믿게 한다. 죽음 이후 영원한 꿈의 세계가 있고 그곳엔 나만을 위한 해변과 안락의자가 준비되어 있다고. 늙어 겪게 될 몸의 통증과 마음의 슬픔을 경험해서는 안 될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고통으로 과장한다. 치료제는 없고 진정제만 있는 센터. 마음의 안정과 몸의 통증을 잠재우는 약은 노인을 아이와 바보와 식물로 변하게 한다. 센터의 일꾼들은 노인들의 손을 잡아끌고 어깨를 붙잡아 푸른 초장으로 이끈다. 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 그 밑으로 예쁜 꽃밭. 그 곁에 흐르는 맑은 강. 바람이 불 때마다 꽃가루가 휘날리는 아름다운 세계.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 한발을 더 내디뎌 낙하하는 것. 운이 좋다면 센터에 있다가 ED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꿈꿨고 간절히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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