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넘어서

 

 

박영도 朴榮道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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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 동안 세계사적 사건이 집중하여 발생했다. 냉전의 종식을 필두로, 아시아 금융위기, 코소보전쟁 등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질서의 구도를 예고한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동은 당연히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고 심화시킨다. 공동체의 규범적·정치적 의미를 둘러싸고 진행된 자유주의/공동체주의의 논쟁도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이 논쟁에 개입하는 형태로, 오늘의 상황에서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향방과 관련된 규범적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공동체가 중요한 규범적·정치적 관심사로 부각된 상이한 맥락을 논쟁의 다양한 이론적 차원과 연결하여 간단히 개괄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첫째, 공동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 뒤에는 현대성의 실천적·규범적 자기이해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개인화와 사회문화적 다원화의 경험적 결과에서 출발하는 이 문제의식은 먼저 탈현대논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다. 탈현대주의는 그 경향을 근대 계몽주의의 허구적 보편주의를 극복하는 발달경향을 보여주는 사회적 기호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똑같이 현대성의 프로젝트를 비판하면서도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화·다원화를 공동체적 연대성의 해체와 여기서 비롯되는 정체성의 위협 내지 존재론적 안정성의 위협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탈현대주의보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현대의 규범적·정치적 자기이해를 공격하면서, 원자적으로 고립된 추상적 개인에 대항하여 구성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추상적 개인에 기초한 정의(正義)의 윤리에 반대하여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는 ‘좋음’(the good)의 윤리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 뒤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이 있는데, 종래 사회정치적인 갈등에 대한 메타 해석틀을 제공했던 냉전구도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유형으로 분출되는 ‘인정(recognition)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민의 증대로 늘어나는 다문화사회의 소수민족 문제, 다양한 삶의 양식의 공적 인정 문제, 페미니즘, 그리고 민족주의 문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인정의 정치는 개인주의적 어법을 지닌 근대법의 구조가 집합적 권리에 대한 인정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와 함께 로크(J. Locke)와 루쏘(J.J. Rousseau) 이래 계속된 인권과 주권, 입헌주의 원리와 민주주의 원리,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의 전통적 긴장이 더 첨예해지면서 동시에 두 원리의 매개라는 이론적 과제를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세계화 과정도 공동체 문제를 부각시킨 중요한 요인이다. 이 과정에서 인정투쟁도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나 ‘문명충돌론’이 보여주듯이 국민국가 맥락을 넘어 세계적 맥락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국민국가적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인권과 주권의 대립을 첨예화하고 있다. 이 대립은 단순히 학술적 쟁점이 아니라, 코소보전쟁의 딜레머가 보여주듯이, 당면한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하였다. 이 상황은 세계적 내전의 시대를 넘어 세계적 규모의 내치(內治)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개인, 국민국가, 초국가적 정치공간이라는 세 가지 맥락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적 자율성과 공적 자율성, 보편적 인권과 국가주권의 관계라는 세 가지 이론적 차원과 관련해 공동체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대립하는데, 이 글에서는 두 견해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성찰적 현대성의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규범적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적 현대성의 관점은, 하버마스(J. Habermas)가 제시했듯이, 독백구조에서 상호주관적 구조로의 선회를 통하여 현대의 규범적·정치적 자기이해를 달라진 조건 속에서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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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지배적인 규범적 자기이해는 추상적 개인에서 출발했다. 이 출발점은 한편으로는 개인화의 경향을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문화적 다원화 때문에 실체적 ‘좋음’의 관점을 추상하는 형식적 정의의 윤리가 요구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쌘델이 롤즈(J. Rawls)의 정의이론에 함축된 추상적 자아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유주의를 향한 공동체주의의 포문을 연 것이나, 테일러가 ‘자아의 원천’을 추적하면서 자유주의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1 특히 쌘델의 롤즈 비판은 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동시에 공동체주의의 문제점까지 잘 보여주는데, 그 기본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의이론에 전제된 인간은 맥락(context) 없는 자아이다. 둘째, 이 추상적 자아 개념 때문에 자유주의는 개인 혹은 집합체가 갖는 좋음의 관점을 제거하는 추상적 도덕의 관점을 우선시한다. 셋째, 그러나 주체는 구체적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는 삶의 목표나 가치정향과 무관하게 기술될 수 없고, 개인적 정체성은 집합적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 넷째, 따라서 모든 의무론적 도덕이론은 파산한다. 요컨대 맥락 없는 주체는 없으며, 맥락 없는 도덕도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자유주의의 윤리적 기초를 정면으로 겨냥하지만,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듯하다. 즉, 자아의 정체성 형성에서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명제 자체는 자유주의의 몰사회적 관점을 정당하게 지적한 것이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구성적 공동체’ 개념은 너무 짙은 실체적 동질성을 상정함으로써, 내적·외적 다원성 때문에 제기되는 당연한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먼저, 구성적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비판적 거리두기가 어떻게 가능한가? 공동체주의는 이 비판적 반성의 가능성과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며, 그런한 ‘구성적’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자유와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둘째, 문화적

  1. M.J. Sand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1982; C. Taylor, Sources of the Sel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