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장강대하로 흘러가는 조선 문장

김성동 장편소설 『꿈』, 창작과비평사 2001

 

 

정희성 鄭喜成

시인 jhs3491@hanmir.com

 

 

보내온 책들이 적잖이 쌓여 있는 머리맡에서 유독 김성동(金聖東)의 『꿈』이 눈에 띈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책을 뽑아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서재가 따로 없는 형편이라 잠자리에서 글을 읽는 게 버릇이 되어 있는 터였다. 세상이 뒤숭숭한 판에 그러다 잠이 들어 꿈이나 한자리 꾸면 그만이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몇장 넘기다 말고 “얼래, 이게 뭐지?” 어느새 나는 김성동 특유의 말투로 감탄사를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전을 찾으러 나가야 할 참이었다. 서가 쪽으로 발을 옮기다보니 문득 내 집에 사전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대장장이 집에 칼이 없다고 벌써 오래 전에 너덜거리는 사전을 버리고 나서 새로 장만한다는 게 지금까지 그냥저냥 버텨온 것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서점으로 달려갈 양으로, 찾아봐야 할 어휘에 밑줄을 긋다보니 책이 새카맣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대충 읽어나가면 못 읽을 바도 아니지만 그렇게 개 머루 먹듯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책장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백석 시집을 읽기 위해 평안방언사전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우리말 용례사전을 구해야 할 판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낱말의 뜻을 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연스런 쓰임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저잣거리에 나온 우리말 용례사전은 고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한가지밖에 없는 터라 비싼 값을 치르고 사왔는데, 웬걸, 밑줄 친 단어는 나와 있지도 않았다.

애홉다. 그 사전 책머리를 보니 일상에서 쓰이는 말의 빈도수에 따라 어휘를 선정했다는 것인데, 김성동의 문장은 완연한 문어체였던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장강대하로 흘러가는 만연체 조선 문장”의 호흡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완급을 이처럼 교묘히 조절해낼 수 없었을 터이다.

쓰는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어지간히 고문에 친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김성동 문장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어려울 듯싶기도 하다. 나는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면서 한 일년 남짓 창덕궁 낙선재 문고를 판독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 공부에 지나지 않았는데, 김성동은 어느 결에 조선 문장에 젖어서 스스로 대하 장강이 되어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김성동의 문장이야말로 우리말 용례사전임을 모르고 공연히 헤맸던 것이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어떤 이는 감옥 안에 제대로 된 책 한권이 안 들어오자, 오기로 우리말 사전을 들여보내라 해서 그걸 통째로 외우다시피 읽고 나왔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그 뒤 그가 발표하는 글을 보니 어휘가 전과 달리 풍부하기는 한데 왠지 말들이 제자리를 차지한 것 같지 않게 어정쩡해 보였다. 내 경험으로도 언제고 한번 써먹어야지 하고 눈 익혀둔 낱말이 들어앉은 자리는 늘 편편찮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김성동의 문장은 기운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자주는 아니더라도 어쩌다 인사동 거리 어느 술집에서 그와 마주하게 되면 그 언사가 소설의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무슨 소설의 한 대목에 골똘하다가 막힌 구석을 뚫느라고 이렇게 거푸 술을 마시며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와 함께 앉아 있기는 해도 그의 생각을 따라잡을 길이 없어 우두망찰하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그의 일상에 문학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탓이리라.

그런 그가 『국수』를 내놓고 시야에서 사라진 뒤 6년 만에 『꿈』을 보내왔다. 촌평을 쓰라고 해서 즐겁게 읽을 소설을 괜스레 힘들게 읽긴 했지만, 이 글이 서평 꼴을 갖추기는 애시당초 그른 일이지 싶다. 그냥 김성동이가 어디 가서 딴짓 한 게 아니고 이런 명품을 만들어내느라고 고생깨나 했겠구나 생각하며 꼼꼼히 읽었다는 표시로 사전을 두 권이나 샀다는 말을 했던 것인데, 편집자가 궁했던지 바로 그 얘기를 써달라고 낚아채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들린 꼴이었다.

내 얘기가 자꾸 여기서 맴도는 데는 까닭이 없지도 않다.

몽자류(夢字類)의 효시는 『삼국유사』 소재 조신(調信) 설화이다. 이 이야기 틀거리는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많은 소설을 낳았다. 이광수의 『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많은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몽유자가 지닌 현실적인 불만이나 욕망이 꿈속에서 해소되는 듯하나 깨고 보면 허망하다는 걸 느끼고 어떤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달콤한 한 시절도 지내보니 허망하다.

나도 모르게 근심 속에 이 몸이 다 늙었네.”

113-371조신몽 끝에 붙은 글귀다. 어찌 보면 결과가 뻔하기도 하고 빈약하기도 한 틀거리를 가지고 이만큼 흥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일찍이 춘원의 『꿈』을 본 적이 있지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다른 소설들과 김성동의 『꿈』을 구별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의 하나는 바로 그의 특징적인 문체에 있다. 읽다보면 사설시조나 민요나 한시나 염불을 듣는 듯,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판소리를 듣는 듯 착각이 들기도 한다. 김성동은 내가 눈여겨보는 몇 안되는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젊은 소설가를 향해 “네가 소설을 쓰냐? 찍는 거지” 하고 다소 민망하다 싶을 만큼 핀잔을 주는 걸 보면 짐작되는 게 있다. 자연스런 말 부림이 아무리 체질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피를 찍어 쓰듯 절제하는 노력이 없이 남한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리야 없지 않았겠는가.

그가 오랜만에 힘들여 『꿈』을 펼쳐 보여줄 즈음 나도 근근이 시집 한권을 묶어 그에게 보내주었다. 피차에 책을 받았다는 전화 한통도 못한 터이지만, 그가 어디 있건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에 걸친 인간고”(최원식)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뼈저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문장이 재미있게 읽히는 데는 춘색이 도도하다는 느낌도 한몫을 거든다. 실은 고은 선생이 내 시집의 발문에서 “춘색완연”이라고 점잖게 한마디 한 것인데, 김성동의 글에서도 그걸 느끼고 혼자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글에 젊음의 생기를 불어넣는 바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