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장르들과 접속하는 문학의 스펙트럼
박진 朴辰
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양·특성화대학 교수. 저서로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음. libra3061@ssu.ac.kr
1. 장르문학 vs ‘본격문학’?
장르문학(장르서사)은 추리소설, 판타지, SF등과 같이 각각의 장르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직관적으로 공유하는 일련의 관습들(conventions)과 규약들(protocols)로 이루어진 서사양식을 말한다. 장르문학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현실을 직접 반영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장르의 세계, 또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작품들 전체를 자기반영적으로 비춰 보인다.
이 글의 관심사는 장르문학(장르서사)이 그 경계를 넓혀가면서‘장르 아닌 것들’과 결합하는 양상, 그중에서도 장르적 요소들이‘본격문학’안으로 활발하게 유입되어 장르문학과‘본격문학’이 혼성되는 양상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장르문학의 영역을 공간적으로 구획할 수 있다는 생각,‘본격문학’의 영역 또한 그러하다는 생각, 장르문학은 본질적으로‘본격문학’이 아니며‘본격문학’은 장르문학이 아니라는 생각 등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이 모든 전제들은 의심스럽고 자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논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관례적·제도적인 경계와 직관적인 구분법을 존중하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어쩔 수 없이’이다.
이보다 좀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장르문학의 맞은편에 놓인 문학을‘본격문학’이라 명명하는 일과 관련된 전제들이다.‘본격문학’이라는 말에 새겨진 가치 개념에 딸려나오는 전제들, 그러니까 장르문학은‘본격문학’에 미달한다거나‘본격문학’은 장르문학보다 더 수준 높은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이 그것이다.1 이같은 고정관념은 너무도 완강하고‘문학 하는’사람들에게서는 더욱 그러해서, 우리는 종종 의심의 여지 없이‘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가치론적으로 위계화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최근‘본격문학’작가들이 장르적 관습을 차용하거나 장르소설과 유사한 작품들을 내놓는 경향은 아무래도 불길하고 불편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소설을 옹호하고 그 의의를 밝혀주려는 노력이 흔히 장르문학(장르서사)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먼저 편혜영(片惠英)의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에 대한 언급이다. 이 책의 해설에서 이광호(李光鎬)는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불가해하고 기이한 사건들”은 “대중적인 장르 안에서”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고 결국‘설명 가능한’세계로 귀결”됨으로써 “‘나와 우리’가 범죄의 참혹한 죽음에 연루될 수 있다는 공포와 죄의식”에 “면죄부”(246면)를 주었을 거라고 말한다. 반면에 편혜영 소설은 “이런 스릴과 면죄부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대신에, 시체들이 출몰하는 현실의 악몽을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인간의 문명세계 전체를 지옥도로 그려낸다”(245~46면)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측면은 스플래터(splatter)와 고어(gore)적인 장르서사가 최종적으로 가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피범벅이 된 시체들과 절단된 신체와 쏟아져나온 내장 등을 눈앞에 들이대는 장르서사들, 특히 아무런 죄도 없고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무차별하고 몰도덕한 폭력의 희생자로 누군가가‘선택’되는 이야기들은 얄팍한 피부 안에 우리 자신이 감추고 있는 온갖 구역질나는 것들과 우리를 대면하게 한다. 그 질척질척한 무정형의 덩어리들은 이성과 문명이 억압한 대지의 내장, 원지적(原地的) 자연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하면서 삶과 죽음, 문명과 야만을 안전하게 분리해놓으려는 인간의 모든 기획을 조롱한다. 그것은 꽤나 꺼림칙한 일인데,‘근사한’장르서사는 바로 이 지점까지 우리를 억지로 데리고 간다.
SF장르의‘침공’으로부터‘본격문학’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발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열림원 2004)이 SF라기보다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을 지향한다는 데 안도감을 표하거나(성민엽·최수철의 심사평),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지구적, 문명적 문제들의 상상적 연속-확대상으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을 들어 “상대적으로 공상적이고 오락적인” SF와의 차별성을 언급하는 견해(김예림의 해설, 348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백민석(白旻石)의 『러셔』(문학동네 2003)를 영화 <매트릭스>와 대조하면서 이 소설이 “단순히 앙상하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의 뼈대에 영웅의 활약상을 덧칠한 싸이버펑크 활극만은 아”님을 역설하는 견해(이수형의 해설, 188면)도 있다. 오현종의 「창백한 푸른 점」(『문학동네』 2007년 겨울호)이 “가상의 세계나 과학적 이론으로 제시된 개념 공간을 유영하는 쾌감이 아닌 현재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객관화”하는 데 주력하는 소설이기에 SF와는 구별된다는 주장(강유정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체, SF(Symptom Fiction)」, 『작가세계』 2008년 봄호 251면)도 있다. 이들 소설의 가치와 의의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일단 그것이 SF장르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필요라도 있다는 듯이.
하지만‘지금-여기’의 삶을‘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SF장르의 본질적인 성격이다(「창백한 푸른 점」은 정말 그런 일을 해내고 있는가?‘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지구의 삶과 너무나 흡사해서‘다른 시선’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것은 아닌가?). 또한 현재 우리가 당면한‘지구적, 문명적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성찰하고 재검토하게 만드는 것은 대다수의‘좋은’SF가 지닌 주된 공통점이다. SF장르가 그려내는 미래(적인) 사회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기라보다는 현재에 대한 특정한 관점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기계와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의 미래세계는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의 맹목적인 질주, 그 질주를 추동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법칙, 그리하여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버린 문명 자체의 괴물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형상화한다. <A.I.>와 <공각기동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로봇과 싸이보그의 모습은 개인의 고유성과 진정성, 주체의 자발성을 의심하는 오늘날의 인간 존재에 대한 해석적 논평을 담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 신체의 테크놀로지화, 기억과 정신의 전자정보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SF는 이같은 문제들을 낯선 논리적 질서 속으로 옮겨놓고, 그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달리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시각을 연다. 그‘환상적’세계가 곧바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환원된다면, 이는 SF적인 인식의 전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일 수 있다. 공상적이고 오락적인, 그저 영웅의 활극을 보여주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가상공간의 쾌감을 제공할 뿐인 SF는 분명‘본격’SF가 아니다.
‘본격문학’과‘본격’장르서사 사이에 자명한 위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본격문학’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이 아니라 좋은 문학, 이상적인 문학(문학적인 것)을 모델로 한 개념이라면, 그 비교의 대상 또한 좋은 장르서사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별성에 대한 논의들은 이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문학이 지금 장르적인 것들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가장 장르서사다운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문학적’인 것과 통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일이 필요하다. 참으로‘문학적’이지 않은 것들, 기득권을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자기방어나 정통성에 대한 순혈주의적 집착, 배타적인 유아론 같은 것에 사로잡힌‘본격문학’의 개념이라면 하루빨리 벗어버려야 할 테고 말이다.
2. 장르서사〓대중서사?
장르문학의 대립항을‘본격문학’으로 설정하게 되면, 이로부터 또다른 편견과 혼란이 발생한다.‘본격문학’의
-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문학 편에서는‘본격문학’대신‘주류(mainstream)문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지금 시대에는‘본격문학’이 오히려 더 소외받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문학제도의 승인을 얻은 문학이라는 의미에서‘본격문학’은 여전히 주류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