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정인 徐廷仁

1936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사상계』로 등단. 소설집 『강』 『붕어』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장편 『달궁』, 연작소설 『용병대장』 등이 있음. sujisn@hanmail.net

 

 

 

쟁몽두

 

 

“전산기 장만했소?”

“했다.”

“반년 버텼으면 오래갔소. 그것 없을 때도 그것 썼지 않소?”

“썼다.”

“그렇다면야 그것 있고 없고 무슨 차이요?”

“차이 없다. 불편만 하더라.”

“공연히 공해 없앤다고 공해를 찾아갔소. 어떻게 불편했소?”

“전자우편 헐라고 우체국도 갔고, 동사무소도 갔다.”

“근천 떨었소. 젊은 아들이 존경했겄소.”

“궁기야 흘렀겄냐, 허라고 놔둔 거 했는디? 귀찮더라. 옛날 편지 부칠라고 우체국에 다닌 것은 까맣게 잊었다. 사람이 간사하더라. 존경이사 했겄냐? 쳐다도 안 보더라.”

“십년 너머 쓰던 것을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소?”

“왜 못 끊냐? 헌 차 한대 몰다가 처분했더니, 그렇게 가뿐하더라. 옛날 얘기다.”

“이번에도 내친짐에 끝을 볼 걸 그랬소? 안 서운허요?”

“불편하다.”

“있어도 불편허고 없어도 불편허고, 그요?”

“시간을 뺏겨. 그것 벌라고 자가용 굴리고, 비서 두고, 비행기 탄다.”

“그것으로 시간을 버는 사람들도 있소. 도서관, 백화점, 여행사, 우체국, 은행, 병원, 소식, 미인, 그 밖에 그 안에 없는 것이 없소.”

“집에 책 많다. 살 물건 없다. 매일 여행허냐? 편리해서 빠져들면 한나절이 후딱 간다. 손해더라.”

“손익을 따지자면 이익이 많지요.”

“나는 손해가 많다.”

“그러면 안되지요. 일반적으로 사회에 좋다 나쁘다를 따져야지, 내 좋다고 좋고, 내 싫다고 나쁘면, 어떻게 가치가 정립되겄소?”

“왜 안되냐?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 거의 전부를 나쁘다고 생각한다. 못된 것들만 가려서 좋아한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말세론이요?”

“아니. 고치고 끝내야지. 지옥 갈 일 있냐?”

“벌써 갔소. 무엇이 그렇게 비위에 안 맞소?”

“니가 대라. 맞는 것을 찾아봐라. 그게 빠를 거다.”

“젊었으면 부모 구존하고, 늙었으면 자식들 잘 자라고, 그러면 복 아니요?”

“니는 양친부모 모시고, 초가삼간 집을 짓고, 토란 같은 새끼들하고, 천년만년 살래?”

“나야, 뭐.”

“왜?”

“축에 낄 자격이 없소.”

“아무도 천년만년 못 산다.”

“집도 오두막이 아니고 서른평 공동주택이요.”

“괜찮어. 요즘 양회궤짝에서 안 사는 사람 어디 있냐?”

“나는 안 괜찮소. 그 얘기 그만 하쇼. 이 갈리요.”

“니도 내 딸 얘기 하지 마.”

“내가 언제 소장 말 꺼냈소?”

“아까 쟁몽두에서 봤단 아는 대장이냐?”

“아, 그건 사실 아니요? 허위를 혐오하고 의견은 의심해도, 진실은 직면허쇼.”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나의 말은 내 의견이다. 니 말도 같다. 사실이 어딨냐?”

“왜 없소? 내가 영순이를 오거리에서 만난 것은 사실 아니요?”

“그때 거기에 가 하나만 있었냐? 가 하나만 만났냐?”

“아, 딴사람들이야 관심 없소.”

“니가 걸어간 길거리가 거기뿐이냐? 딴 오거리, 딴 네거리, 딴 세거리는 안 갔냐?”

“왜 딴소리요? 내가 딴사람들 만난 것하고 이것하고 무슨 상관이요? 그건 만난 것도 아니고 부딪힌 거요. 부딪힌 것도 아니고 스친 거요.”

“선택은 니가 했다. 니 의견이고, 니 욕심이다. 누구는 안 스쳤냐? 누구는 안 스치냐?”

“누군지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스치는 것 아니요?”

“사람의 만남은 스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십년 같이 산 여자하고 저자에서 어깨를 부딪힌 여자하고 같소?”

“같다.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이 많으면 같은 것 아니냐? 둘 다 모른다. 찬거리 사러 나온 동네 처자가 더 알기 쉽다.”

“동네 각시가 아니란 말이요.”

“그 여편네라고 사는 데가 없겄냐?”

“내가 모르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요?”

“그건 니 탓이지 그 여자 잘못이냐? 댁의 사정 아니면, 다 똑같어.”

“이쁜 여자들을 보면 눈알이 튀어나오요. 그것도 내 불찰이요? 저쪽 책임 아니요?”

“관심이 없으면 안 보인다. 니가 가를 본 것, 그것을 나한테 얘기한 것, 다 니 욕심이다. 탐욕에서 주장말고 무엇이 나오겄냐? 탐진치를 버려야 뭣이 보인다.”

“내가 가한테 무슨 못된 마음을 가졌겄소?”

“그야 니가 알지. 지나가는 처녀 보고 반죽 한번 잘됐다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싫다는 여자 염치없이 좇아다니는 찰거머리도 있고, 생각이야 천차만별이다.”

“탄식도 욕심이요? 여자가 머리가 좋으면 용모가 빠지고, 이목구비가 반듯하면 골이 비기 일쑨디, 영덕이는 재색 겸비한 재원이요. 언제 봐도 괜히 기분이 좋소. 미인은 가만있어도 기쁨이고, 의사는 남자가 해도 선생소리 듣소. 이게 바로 금상첨화요.”

“안 이쁜 여의사는 보기에 즐거움이 아니다. 영덕이가 누구냐?”

“덕철이라는 놈 말이요, 그놈이 음흉허요.”

“내버려둬라. 동네 크네기 쳐다보도 못허냐?”

“못 올라갈 나무를 왜 쳐다보요? 지가 어디라고 언감생심!”

“가 나이 서른다섯이다. 낼모래 마흔이여. 여자 나이 마흔이면 잘생긴 년이나 못생긴 년이나 같고, 쉰이면 배운 년이나 못 배운 년이나 차이 없고, 예순이면 서방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마찬가지고, 일흔이면 자식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매일반이고, 여든이면 돈 있는 년이나 없는 년이나 매한가지고, 아흔이면 밥술 든 년이나 논 년이나 다를 것 없다. 근데, 니가 왜 화를 내냐?”

“걱정도 마쇼. 스물에 배우한테 시집가고, 서른에 감독하고 눈이 맞고, 마흔에 가수하고 배가 맞고, 쉰에 의사하고 살림허요. 이런 일은 옆에서 챙겨야 해요. 중이 어떻게 제 머리 깎소? 동네에서 말도 못허요?”

“줄줄이 줄을 섰냐, 번호표 탈라고?”

“앞뒤뿐만이 아니요. 좌우로도 장사진이요.”

“시집도 안 간 아한테 니가 지금 헐 소리냐? 누구 복장 터지는 꼴 볼 일 있냐?”

“과년한 딸을 촌구석에 처박아둔 죄요. 대처에다 내다놔야 짝이 나설 것 아니요?”

“누가 처박았냐? 헌 고리짝이냐? 누가 가 짝 없다더냐? 그걸 왜 니가 걱정허냐?”

“자식이 처박혔으면 부모가 꼴아박은 거요. 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했으면 대학병원에 떨어지요. 보건소가 뭐요, 보건소가? 짝이 있소? 짚신짝도 짝이 있는디 짝 없을라고? 내가 괜한 염려를 했나?”

“가 배필이 없어도 니보고 근심허라는 말 안한다. 좋은 데 있으면 중신은 해라. 보건소가 아니라 보건지소다.”

“남자가 있소, 없소?”

“있다. 감옥소에 있다.”

“그 좁은 데서 뭘 헌다요?”

“들어앉아 있는 놈 나무랠 것 없다. 학생 때는 학생 때고,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됐으면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려야지, 옛날 소꿉장난을 못 잊냐? 그것이 성한 년이냐? 과 껍데기가 뭣이다냐? 공부하는 것들이 어느 겨를에 쌍쌍이냐?”

“공부할 때 눈 맞춰뒀다가 나중에 짝짓소.”

“식 안 올렸으면 백번 눈도장 찍어봤자 소용없다. 열녀 났냐? 지가 무슨 로미오라고.”

“줄리엣.”

“동거하다가도 돌아선다.”

“이혼도 허요.”

“그건 평생 가는 불도장이지만, 언약은 흔적이 없다. 말이 허공에 남긴 형체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기 전에는 찾을 수 없다. 젊은것들이 미래에 살아야지 과거에 연연하냐? 갈길 다 간 늙은이도 뒤돌아보면 눈을 못 감는다. 앞길이 구만린데 몇년 정분을 못 벗어나냐?”

“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요? 그게 있으면 눈도장도 금강쇠줄이고, 그게 없으면 불도장도 얼라들 불장난이요.”

“그것도 변한다. 세상에 안 변하는 것이 어디 있냐? 정이 있으면 인연이 생기고, 인연이 있으면 정이 생긴다. 정이 다하면 인연이 끊어지고, 인연이 다하면 정이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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