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작가들, 장편소설을 말하다

창비는 장편소설 특집을 기획하면서 현재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장편소설에 관한 짧은 산문을 청탁했다. 다음의 몇가지 질문을 예시하고 그중 선택해서 자유롭게 글을 쓰는 방식으로 했다. 물론 질문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편집자.

 

☐ 현재 한국 장편소설이 침체상태이고 해외 장편소설이 득세하고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한국의 작가가 장편소설을 집필하기 위한 여건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이와 관련해서 평론가나 독자, 출판사나 문예지에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 작가의 문학관에 큰 영향이나 변화를 준 고전 장편소설이나, 해외와 국내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또는 의미있게 읽은 최근의 장편소설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작가의 입장에서 비교해주십시오. 집필에 관련된 체험적인 사례를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전업의 고통으로 감당하는 문학의 본령

황석영│장편『손님』『오래된 정원』『심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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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장편소설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국 장편소설이 득세하고 있다고들 한다. 문제의 촛점을 두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으로서의 장편소설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적으로 ‘많이 팔리는’ 소설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인지. 앞의 문제점을 생각해보건대 이미 나는 의견을 여러번 내놓았는데, 벌써 십년 가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우선 인터넷의 대중화로 책을 읽는 풍조가 많이 사라졌다거나, 과거에 비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움츠러들면서 현실로부터 멀어진 데도 원인이 있다거나, 서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면서 개인화 파편화 내면화하고 또는 문체와 문장을 강조하면서도 이야기 구조에는 맥이 빠지게 되었다거나, 문화 전반이 점점 대중화 연예화 오락화하면서 인문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등 끝이 없겠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가난을 무릅쓰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일이 당연한‘선비’의 책무라고 하던 것이 이제는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신인작가로 문단에 나왔을 적에는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서 처자식과 함께 극도의 가난을 견디며 대충 삼사년은 견디어야 했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평자들이나 독자들의 눈에 띄어 원고료와 인세 수입으로 중산층 생활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의 가난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욕망을 참고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장편소설이 나오는 토양은 이렇게 글 쓰며 견디는‘전업작가’가 많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요즈음은 좀 알려졌다 하면 대학 문예창작과에 교수 자리가 나서 들어가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내가 신문에 인터뷰하면서‘기초예술’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연전에 민예총 회장 시절에 문예진흥원 원장 현기영씨와 함께 국회로 총리실로 뛰어다니며 얻어낸‘지원정책’으로 단편소설이나 창작집에 대한 지원이 생겨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역으로 이런 결과 때문에 단편소설 쓰기로만 역량이 몰리고 장편소설의 침체에 끼친 영향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장편소설이야말로 한 작가의 역량이 제대로 드러나는 분야이며, 문학의 본령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편 한편을 쓰려면 우선 그만한 서사와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의 인생이 녹아들어야 할 텐데, 그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대하소설은커녕 천매 내외의 경장편 한편을 쓴다 해도 최소한의 준비기간을 합쳐 일년은 걸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편을 써서 얻는 원고료와 인세 수입으로 적어도 이삼년은 살 수 있어야 쓸 의욕이 생기겠는데 한해를 허비한 것이 되고 말면 다시는 쓰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종이매체가 이제는 내리막길로 가는 게 아니냐 하는 의견도 끝없이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서구 특히 유럽의 경우를 보면 독서인구와 판매부수는 안정되어 있는 편이다. 꾸준히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현재 새로 쓴 작품들을 전보다 안 읽는 데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는 고전을 거의 안 읽는다는 것이다. 전 세대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중고교 시절에 꼭 읽어야 할 세계명작이나 고전의 목록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문학의 위기는 소비자보다 생산자측에 책임이 더 많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흔한 말로 한국영화를 보면 아직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예전에 문학이 발휘했던 대중적 힘을 모두 가져가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근년에 폭발적으로 대중을 동원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가 탄탄한 서사와 현실이 뒷받침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 개인만 놓고 보더라도 「살인의 추억」에서 보이는 서술과 구성 능력이 빼어나고 현실의 반영은 절제되어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긴장미가 대단하다. 그의 「괴물」이 가진 대중적 설득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씨지를 일종의 메타포로 감추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현재 한국영화의 설득력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문학은 서사와 현실을 등한시하면서도 대중에 대하여는 고답적인‘겉멋’으로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느 시절 어느 사회에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 있었고 이 양자를 결합시킨 다행스러운 예도 많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분이 사라지고 얼마나 많이 팔리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가 쏠리면서 본격문학의‘가치’를 상실했다는 자평이 있을 정도이다. 혹자가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내가 그때 일본에 있어서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아는데, 젊은이들은 좀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무겁다’라고 하든가 약간의 비판적인 논제만 화두로 떠올라도‘어두워’라고 말하는 풍조였다. 현재의 일본 유행 소설들은 한때 우리 청소년들에게 성행하던 인터넷소설처럼 가볍고 말초적이고 부담스럽지 않고 도회적으로 세련되어 보이는 듯하다. 도회의 소비시장의 쎄트장치들 속에서 잘 어울리고 속내를 깊이있게 드러내지 않는 그야말로‘쿨’한 것이라고 하겠다. 정답던 고향의 이미지를 언제부터인가‘촌스럽다’는 조어로 표시하는 세태의 반영일까. 이미자의 가슴속에 휘감기는 노래가 아니라 이별도 슬픔도 발라드처럼 경쾌한 것이다. 이것이 소비시장의 장치에 어울리는 것이다. 문학은 이미 씹고 버리는 껌이나 시간 죽이기용 게임처럼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아직 위축되기는 이르다. 문학은 삶의 기본적인 콘텐츠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한 영원히 지속될 테니까. 나는 요즈음 서사와 현실이라는 화두에 덧붙여 형식과 상상력을 가세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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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연재소설 집필 관계로 다른 작가의 장편소설들을 많이 읽지는 못하고, 책이 나오는 대로 따라 읽기도 쉽지 않다. 문학 이외의 책들은 더러 일하다가 들춰본다. 작년 말에 읽은 작품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르 끌레지오의 『아프리카인』 정도였다. 모두 동시대의 동료작가들이라 진작부터 읽어야지 벼르고는 있었다. 파묵의 소설은 내가 늘 말했듯이‘다중적 서술’또는‘화자의 끊임없는 이동’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넘나들고 있다. 사람에서 동물로 그리고 사물이나 심지어는 그림 속의 빨강 물감까지 서술에 끼어든다. 그러면서도 한 줄거리의 이야기를 관통해내면서 집요하게 감추어놓았던 사건의 핵심을 드러낸다. 르 끌레지오의 작품은 자전적인데, 자신이 어째서 탈서구적인 관점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식민지 의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아프리카 벽지마을의 일화들을 통해 얘기한다.

우리에게서는 아직도 해외문학에 대한 턱없는‘상찬과 오해’가 그치지 않고 있다. 내가 언급할 입장은 아니지만 예컨대 베르베르인가 하는 프랑스 작가는 프랑스 문단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으로 SF대중작가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꼬엘류라는 브라질 작가도 통속작가로 기자들도 점잖게 언급을 피할 정도이다. 『다빈치코드』니 뭐니 하는 것들도 아무리 대중적으로 서점에서 팔려나가도 교양인은 모른 척한다.

해외문학에 대한‘오해’는 좋은 문학에 대해서도 편식을 종용하게 되어 일부의 문학만이 서구의 흐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현대 한국문학은 다채롭고 힘이 있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처럼 서구문학에까지 오히려 많은 영감과 반성을 줄 수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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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고 나서 장편소설은 예술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는데, 그것은 자기 시대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창작물의 개념에 대한 못마땅함도 있었을 테지만, 대서사를 다룬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장편소설은 철학 역사 사회 인류학 풍속학, 하여튼 인문학적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이른바 총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른 예술장르는 거대한 모자이끄 벽화의 한 모퉁이나 부분 세부묘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단편소설은‘예술’적인 작업이다. 인생의 한 단면을 날렵하게 잡아채어 짧아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등장인물과 사건 전체의 모습을 뚜렷이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편 창작이야말로 작가수업에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기도 하다. 인물 구성 형식 문장 등을 주제에 따라 달리 여러가지로 실험해볼 수가 있다.

세계적으로 소설이 차츰 짧아지고 있으며 우리 원고매수로 천매 내외의 경장편과 그 절반쯤의 중편 정도가 하나의 흐름이 된 것은 그것이 단편의 압축적인 긴장감과 장편의 서사구조를 함께 지닐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강조해서 말하지만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그 특성이나 장르로 보더라도 전혀 다른 작업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어느 작가처럼 평소에는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길 적마다 수공예품을 만들듯이 단편소설을 쓰는 경우도 있다. 평생 이런 식으로 단편소설만을 창작한 외국의 작가들도 많다.

그러나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장편소설은 전업작가가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역량도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째서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장편소설을 문학의 본령으로 보았나 하는 점이 여기에 있다.

 

 


삶의 보편적 통찰을 복원하는 장편소설

공지영│장편『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사랑 후에 오는 것들』『봉순이 언니』등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다. 가본 길이 아니면 거의 가지 않고 어떤 경우든 모험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모험심이 많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게으름 때문에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그냥 웬만하면 선택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밖의 사물들에 대해 평균적인 호기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어느날 나 자신에게도 호기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인생, 그러니까 사람들의 삶 자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 사람은 왜 나와 다르게 저런 결정을 내렸을까, 저 사람은 왜 하고많은 말들 중에서 지금 저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저 사람은 왜 지금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이 결코 한순간의 기분이나, 한순간의 무심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에 이런 내 관찰의 결과를 쓴 적이 있었는데,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전체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기 전, 나는 막연히 내가 문학을 하고 싶고, 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쓰고 싶으며, 소설 중에서도 장편소설을 선호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나 말 혹은 생각 뒤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있으며 일생 뒤에는 그 사람의 배경을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