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시

 

전통 미학과 교감하는 시인들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탈신비화된 세계

 

인간의 상상력이 발아되는 지점에는 발아를 가능케 하거나 방해하는 여러가지 요인이 혼재한다. 그 가운데 시간과 공간은 상상력의 활동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필연적 전제이며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근대는 기존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재편성함으로써 기능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도시 건설을 촉진해왔다. 근대의 도시들은 첨단 통신망을 통해 이질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를 세계 곳곳에 전파한다. 이제 지구상에 인간에 의해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란 남아 있지 않다. 아프리카의 쎄렌게티 초원이나 남극의 설원도 우리의 시야에서는 더이상 신비로운 미지라 할 수 없다. 이같은 탈신비화 과정으로서 공간의 재편성은 곧 일상적 시간의 재편성을 의미한다. 영원과 지속의 시간의식은 파열되고 불연속적으로 분절된 시간이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비감이 사라진 세계,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것이 세속화되고 평균화되어버린 세계에서 시인들의 꿈과 사유를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창조를 가능케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시적 상상력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이같은 질문은 오늘날 시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가 불가피하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생각대로 과연 예술에 관한 19세기적 내러티브가 종말을 고하고 전혀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궁극적으로 낡은 것과 새것의 경계를 가름할 단서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아직 이에 대한 확실한 미학적 인식은 마련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확실한 진단이 지연되는 데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때로는 그 자리가 뒤바뀌어 경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첨단의 도시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시에 못지않게 간혹 전통적 문법을 변형·고수하는 시편들도 신선한 감동으로 경험되곤 하는 것이다. 이대흠(李戴欠)의 「바닥」 같은 작품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태어난 그곳 여자들은

널을 타고 바닥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구강포 너른 뻘밭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간 바닥은 몇평쯤일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

몸이 갈 바닥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 마을 바닥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된다

—이대흠 「바닥」(『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전문

 

가난 혹은 그와 결부된 어머니의 삶이라는 주제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반복돼온 시적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가난은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얘기되었던 수많은 가난의 시편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이며 생을 이끌고 가야 하는 하층민에 대한 옹호와 연민의 태도 또한 우리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시적 지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는 힘을 지닌다. 그 힘은 새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숙함에 있다. 물론 이 시에는 친숙함이 진부함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시적 발상이 내재한다. 예를 들어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몸이 갈 바닥”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는 처연한 맛이나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어머니 전기문의 활자”에서 보이는 비유가 그것이다. 이같은 발상은 보편적 정감이라는 시의 전체적 국면에 용해되어 있다. 이때 보편성에 호소하는 친숙한 정감 또한 새로운 시도만큼이나 시의 긴장감을 생성해내는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더불어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전통은 보존되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감동과 관련해서 한가지 더 부연할 것은, 새로운 예술적 시도가 언제나 감동과 등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복제해놓은 앤디 워홀의 유명한 그림 「마릴린 두 폭」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예술사에서 분명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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