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전환기를 헤쳐나갈 지혜로운 대안을 찾아서

 

 

지난 몇달은 국내외적으로 유난히 우울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진 시기였다. 2·13합의 이행을 위한 6자회담이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대선을 앞둔 국내정치는 여권의 어지러운 이합집산과 야당 대선주자들간의 저열한 폭로전으로 시종하고 있다. 수많은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 정부는 미 의회의 협상시한에 맞춰 FTA 타결을 서둘러 선언했으며,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이랜드 노사협상은 매장 점거농성과 강제해산이라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한편 7월 하순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무장단체 탈레반세력이 한국인 20여명을 납치한 사건은 온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프간 주둔 한국군 철수 및 인질 교환을 요구하는 탈레반측과 협상불가 방침을 천명한 미국 및 아프간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실질적인 교섭력을 발휘할 여지는 많지 않아 보이며, 이미 희생자가 발생한 이 불행한 사태는 장기화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단련된 한국인의 정서에 비추어보더라도, 지난 몇달 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예측불허의 위험과 불안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서로 알게 모르게 연관된 이 일련의 사태 속에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측면을 특히 주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 삶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와 위험이 국경과 인종, 계급과 종교를 넘어 모두의 일상 속에 만성화되었다는 사실이다. IMF 외환위기의 시련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소비사회의 문턱에 도달했다고 안도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무한경쟁과 실업의 공포, 갈등과 분쟁이 만연한 전지구적 ‘위험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둘째, 특정 사안을 둘러싸고 여러 관점과 견해가 백가쟁명식으로 충돌하는 범사회적 불협화음이다. 실제로 최근에 발생한 굵직한 사건들은 예외없이 다양한 차원의 사회적 논란과 갈등을 빚어내곤 했다. 계급적·이념적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미FTA나 대선관련 논쟁은 물론이고, 아프간 피랍사태는 한국 개신교의 선교방식을 둘러싼 종교논쟁에서부터 미국의 패권주의적 세계정책에 대한 논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논쟁의 스펙트럼을 낳고 있으며, 이랜드사태 역시 양극화 현상과 비정규직, 종교와 자본을 둘러싼 복잡한 논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우울한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몇가지 희망적인 징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특히 오는 8월 28일 평양에서 두번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반가운 소식은 남북경협과 북핵문제의 진전,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을 염원하는 우리 모두의 소망과 기대를 한층 높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세계체제의 구조와 한반도 주변정세가 대단히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국면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아직 이런 혼란과 불화를 생산적으로 수렴할 공적 가치나 표준적인 모델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지러운 사태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소모적인 갈등을 생산적인 불일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겪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좀더 넓은 맥락, 가깝게는 개혁정권 10년의 공과나 교착상태에 처한 87년체제의 구조 안에서, 멀게는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향방과 연관해서 파악하는 시선의 이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갈등과 불화를 항구적인 조건으로 수락하지 않는다면, 이를 극복할 보편적 가치와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발전모델에 대한 집단적 모색 역시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창비가 그동안 각별히 공들여 다듬어온 분단체제론, 87년체제론, 동아시아론, 한반도 선진사회론 등이 추상적인 거대담론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현안과 밀착된 구체적인 고민과 전략적 사유의 소산임을 자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지금 개발독재 모델에서 선진사회 모델로 이행하는 과도기, 분단체제를 넘어 한반도 통일사회로 나아가는 거대한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 이런 과도기적이고 전환기적인 상황이 요구하는 개혁의 방향, 대안적 모델과 전략은 결코 단순하고 일방적인 것일 수 없다. 반대를 위한 반대나 대안 없는 질책이 아니라 진정한 대안의 모색이 한층 적극적이고 내실있게 전개되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최근 세계화의 지배적 담론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역시 복합적인 사고와 전략적 태도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적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제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일상적 용어가 되었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과를 분석한 전문적 연구성과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본적인 작업조차 아직 충분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기본이 부실한 성급한 대안 모색은 대중적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길만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미래인 양 확신하는 태도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신자유주의’란 용어의 오남용 속에서 정당한 개혁의 과제마저 ‘신자유주의 반대’의 구호에 휩쓸려 실종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번호 특집에 ‘신자유주의, 바로 알고 대안 찾기’라는 소박하면서도 어찌 보면 도발적인 표제를 붙인 것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대안적 전망에 두루 충실하려는 기획 의도가 담겨 있다. 유종일 김기원 정승일 서동만 박노자 다섯 필자가 각각 신자유주의의 개념 및 세계화와의 관계,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와 대안체제의 구상 점검, 대안체제 모색과 한반도경제, 그리고 대학사회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의 현황 등 한국사회의 장단기적 과제와 연관된 신자유주의의 핵심 논점들을 면밀하게 점검한다.

상식과 통념에 대한 발본적 성찰을 통해 대안적 모색의 내실을 기하려는 문제의식은 한국 민주주의와 통일담론, 이주민과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논단과 현장’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김선철은 사회운동과 민주화의 관계를 바라보는 몇가지 가정들을 재검토하면서, 민주주의를 정적인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할 때만이 현실운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론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이승환은 6월항쟁 이후 전개된 시민사회 통일담론의 주요 흐름을 개관한 뒤, 국가적 경로와 차별되는 평화의제를 확보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성찰적 변화’를 앞당기자고 주장한다. 미국의 이민법 파동에 비추어 다인종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의 이주민 문제를 성찰한 하승창의 글은 우리에게 과연 이 ‘새로운’ 한국인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존 란체스터는 작가다운 위트와 통찰력으로 지구온난화의 명백한 위험을 외면하는 여러 사례를 제시하면서 지구 차원의 구조변화를 겨냥한 즉각적인 행동만이 다가오는 재난을 모면할 유일한 방도라고 충고한다.

오랜만에 문학분야로 돌아온 도전인터뷰는 여성 평론가 심진경이 얼마전 신작 장편 『바리데기』를 펴낸 소설가 황석영을 찾아 이해와 공감, 충돌과 논박을 넘나들며 흥미로운 대담을 펼쳐낸다. 자발적인 난민의 경험과 당대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녹여 ‘시적 서사’의 형식으로 제련하는 작업에 몰두중인 황석영이 문학의 위기 혹은 종언과 관련된 갖가지 수상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살아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다.

열한분의 시인과 다섯분의 소설가를 모신 이번호 창작란에서는 대가의 원숙함과 중견의 단단함, 신예의 발랄함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창비 지면에 처음 소개되는 이승원 신용목 박상수 송승환 신미나의 시, 그리고 정미경 하재영의 단편소설에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한국문학의 첨예한 비평적 논점을 생산·심화하기 위한 본지의 노력은 이번호에도 계속되는데, 그 초점은 서정시와 노동시라는 의제이다. 먼저 박형준은 흔히 전통적 서정시로 분류되는 고형렬 김사인 장석남 문태준 등의 작품에 구현된 ‘시적인 것’의 형상을 정밀하게 재구성하면서 그간 시단의 화제가 되어온 ‘미래파’와의 논쟁적 대화를 시도한다. 박수연은 최근 본지를 통해 진행된 김수이 고봉준의 노동시 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노동시는 육체노동과 비물질노동에 대한 언어적 형상화를 모두 포괄할 수 있어야 하며, 노동운동의 심미적 실천으로서의 노동시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한편 김영찬은 『남한산성』을 위시한 김훈의 ‘역사소설’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지지가 ‘포스트 IMF시대’의 현실감각 또는 정치적 무의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의 개성적인 소설세계 속에는 2000년대 문학의 행로를 짐작할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고 진단한다.

계간지 리뷰의 모범적인 형식으로 정착한 촌평란에는 열분의 필자가 참여하여 철학과 역사, 정치와 종교, 문학과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난 계절의 주목할 만한 단행본들을 다루고 있다. 이번호에 참여해주신 모든 필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삼복더위를 무릅쓴 그분들의 노고가 독자 여러분의 즐겁고 유익한 독서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陳正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