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정박하지 않는 시정신, 고은 문학 50년

등단 50주년 기념 대담

 

 

이장욱 李章旭

시인, 소설가.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있음.

 

고은 高銀

시인. 시집 『피안감성』 『새벽길』 『만인보』 『백두산』 『네 눈동자』 『내일의 노래』 『독도』 『두고 온 시』 등이 있음.

 

ⓒ오성수

 

 

비가 내리는 중간중간, 흐릿하게 햇빛이 났다. 흐린 햇빛 사이로 생각났다는 듯 새들이 날아다녔다. 서교동 세교연구소에서 고은 선생을 만난 날의 날씨가 그랬다. 나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한국의 대표 시인이 아니라, 문청(文靑)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내 마음의 시인을 만나러 갔다. 날씨 탓이었을까. 흥분이나 설렘보다는, 오래 낯익었으되 언제나 낯설었던 그의 시들과 그 시들의 50년이 아스라하게 느껴지던 오후였다. 50년이라니. 그것은 어떤 세월이었을까. 전쟁과 허무와 민주주의를 거쳐오면서, 그의 50년은 이미 개인사적 회상의 대상이자 동시에 우리 근대문학의 한 장(章)이 되어 있지 않은가.

먼발치에서는 뵈었으되,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대신 소주를 청했다. 어쩐지 반가웠다. 나는 시력(詩歷) 50년을 기념하고 회고하는 대담 자리가 아니라, 아마도 사적인 술자리에서 시인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장욱 장마철이라 습하기도 하고 비도 자주 오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고은 타고난 대로 살고 있는데, 특별히 건강을 위해서 하는 건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저녁밥 먹은 다음에 아내와 함께 논길을 30분쯤 거닐지요. 여느 사람처럼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일하고 놀고……

이장욱 어느 대담을 보니까 먼 길을 이동해도 시차를 별로 안 느낀다고 하셨더군요. 건강체질이시라 다행입니다.

고은 새들의 이동에 좀더 가까이 가려는 운명인가 봐요. 대체로 새는 남북으로 왔다갔다 하지만 별 시차 없이 현지의 시간에 맞춰서 바로 적응하잖아요. 서쪽으로 갔을 때보다 서쪽에서 돌아왔을 때가 더 시차의 긴장을 느끼게 되지요.

이장욱 최근에 『시와 시학』에 신작시 36편을 실으셨지요. 맨 앞의 「인도양」이라는 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운다//이 멸망 같은 적도 인도양 복판 벗어나며/지난 50년을 운다”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50년이라는 게 선생님께서 등단한 1958년 이후 지금까지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요. 시의 말미에 보니까 “어느새/시뻘건 일몰/어서어서 캄캄하거라”라고 쓰셨더군요. 어떤 비감 같은 것도 느껴지고, 또 어떻게 보면 어둠에 대해 초연해진 목소리 같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고은 그 시는 형이 지적한 대로 나 자신의 50년이기도 하고, 또 굳이 그걸 나라고 하는 것 바깥에 의미를 부여하면 한국의 원양어업이 아마 그런 정도의 세월을 지니고 있지 않았나 싶고, 그런 것도 염두에 둘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양이라는 내 상상체계가 사실은 현실의 여러 일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원양어업의 50년을 돌아보는 것과 나의 50년을 기록하는 것, 두가지를 접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50년이나 100년이란 것은 어떤 우주의 짐승이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일 수 있겠고, 그런데 그것이 사람인 바에 시간이라는 걸 만들어서 의미를 부여하니까 새삼스럽게 50년이다 또 100년이다, 이런 것에 우리가 구애받는지 모릅니다. 나는 나 자신 전생의 연보라는 걸 설정했습니다. 1933년부터 시작하는 내 현생의 삶이 왠지 제한적이어서 과거로 연장해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지금의 시인 노릇 50년보다 훨씬 더 많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엄연한 현실은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50년이고, 그럴 때 그것을 돌아보는 행위가 있을 텐데, 공교롭게도 이 50년은 내가 있게 된 한국 근대시 100년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근대시 절반을 내가 살아왔다, 그런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50년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인 최남선(崔南善)을 만나 그와 차도 마셨고, 또 내 또래의 친구 김관식(金冠植)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육당(六堂)의 수제자로 자처하고, 또 홍은동 산꼭대기에 집을 지었을 때 육당을 추모하는 집이라 해서 육모정(六慕亭)이라 이름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시인 1세대와 50년대의 우리가 같은 비구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때 이광수(李光洙)는 납치되어서 만날 길이 없었지만 그 부인과는 자주 왕래가 있었어요. 효자동 산부인과에 가면 이광수가 『원효대사』를 쓰던 방을 기념으로 텅 비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년과 50년의 시적 시차 같은 게 거의 없이 한통속으로 살아왔지요. 그리고 그후에 김소월(金素月), 정지용(鄭芝溶) 같은 사람들도 요절이나 전란으로 못 만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동시대 삶이었지요. 사실 내 50년은 요절 시인이 많은 근대 한국시사로 보면 두번 이상의 요절이 가능한 세월이기도 합니다.

이장욱 두번 이상의 요절이 가능한 세월이라고 하시니 또 새롭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선생님의 시력 50년은 우리 근대문학사와 겹쳐지는 시간이었을 텐데요. 최근에는 해외에도 많이 다녀오시고……

고은 해외에서 초청을 받기 시작한 게 10년 안팎입니다. 10년 전쯤에 처음 나갔을 때는 가슴이 두근댔어요.‘아, 저 사람이 활자를 통해 본 그 사람이구나’싶고. 서구시를 풍문으로 듣다가 시의 실체를 만나니까 마치 독자가 작자를 만났을 때의 고전적인 설렘 같은 것이 끼어든 셈이에요. 그런 낯선 단계가 10년 안에 다 닳아서,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더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다가옵니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웃음)

이장욱 긴즈버그(Allen Ginsberg)나 스나이더(Gary Snyder) 같은 시인들과 친분이 있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과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이 서양 시인들과 동질감이라든가 또 차이 같은 것도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고은 나를 동아시아 운운으로 얘기하셨는데, 분에 넘칩니다. 그렇지만 한국시가 예컨대 일본 근대시보다 늦게 시작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근대시를 받아들인 일종의 2차 이식이라고 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보다 한국입니다. 그리고 유구한 고대 이후에 명시를 많이 가진 중국의 현대시조차 오늘의 한국시보다 결코 월등할 수 없다는 국제적인 긍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곽말약(郭沫若)과 최남선의 신시 비교는 이제 벗어났습니다.

내가 최초로 만나기 시작한 서양 시인은 미국 시인들이었습니다. 긴즈버그가 한국에 왔을 때 당시 한국은 신군부정권의 강박된 사회였는데, 그것을 직감한 그가 이게 아니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았지요. 창비 주최로 그와 내가 합동 시낭독회를 가졌어요.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이 나에 대한 인상을 갖고 돌아간 후에, 스나이더와 전화하면서 한국에 가면 고아무개가 있으니 만나봐라 했더랍니다. 긴즈버그는 뉴욕에 살고 스나이더는 서쪽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나이더도 만나기 전부터 나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내 시집이 미국에서 최초로 나왔을 때 긴즈버그가 격찬했고 그는 얼마 후에 타계했습니다. 내가 그때 미8군 방송을 틀어보다가 긴즈버그가 죽었다는 걸 알고 술을 많이 마셨지요.

그러고 나서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스나이더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때 “긴즈버그가 나더러 뉴욕에 오면 그냥 가지 말고 서쪽에 가서 스나이더를 만나고 가라고 했는데 이제야 만났습니다” 했더니 스나이더도 “나에게도 긴즈버그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했는데 이제야 만났다” 하더군요. 그때 나는‘죽은 한 시인이 살아 있는 두 시인과 함께 있다’는 시를 쓴 적도 있습니다.

이장욱 긴즈버그도 불교와 연관이 있지만, 스나이더는 가까운 일본에서 불교에 깊이 몸담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친연성을 느끼셨겠습니다.

고은 긴즈버그는 티베트불교입니다. 그리고 스나이더는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이고요. 임제종이지만 그의 세계는 결코 종파주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나더러 지구 저쪽의 형제시인이라고 하고, 또 최근 시집에는 나에게 주는 헌시도 있고, 또 나를 노래하는 시도 따로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입니다.

 

오늘 쓰는 시가 가장 축복받은 시

 

고은 시인은 천생 북방계다. 생김새가 아니라 영혼의 구조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정주보다 유목의 삶이 어울린다. 이 유목적 삶은 그러나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지목되는 소위‘탈근대적’유목이 아니라 고대적 기상을 간직한 떠돎의 유목에 가깝다. 그러니 시시콜콜한 세부묘사보다는 초원의 포효가, 도시의 뒷골목보다는 유장한 산과 폭포의 풍경이 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시민의 영혼보다는 고대적 영매의 영혼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호방함 이면에 존재하는 섬세한 감각이야말로 그의 힘일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시적인‘고향’이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떠나는 것 자체를 고향으로 삼은 시인의 내면, 혹은 고향을 끊임없이 창안해온 시인의 본능이 궁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장욱 최근에 발표하신 시로 다시 돌아가서요. 「눈 내리는 날」이라는 시에 보면, “소월 형/지용 형/당신네들 어렴풋이 알았을 거요/인류 맨 처음의 언어가/아아/였던 것//블레이크 형/횔덜린 형/당신네들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요/인류 맨 마지막의 언어가/아아/이리라는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아마‘아아’라는 건 언어 이전의 언어, 의미 이전의 언어일 것 같고 좀더 근원적인, 고향 같은 것이기도 할 텐데요.

고은 우리 언어는 인류사회의 시간으로 보면 극히 최근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듯이 우리는 언어에 주박당하고 있고, 또 언어 속에서 도저히 떠날 수 없이 살고 있고, 또 다른 삶의 체계와는 전혀 달리 언어 내의 독특한 자기만의 존재 자체를 살아간다는, 인문적인 허상 속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류사에서 언어생활은 아주 짧은 기간일 뿐이지 우리 이전에 생명계를 이끌어온 모든 생명체들은 언어 없이 존재해오지 않았습니까? 그 엄청난, 무한한 언어 부재의 시기를 지나 거기서 가까스로 태어난 것이‘아’라든지‘어’라든지 감탄, 공포, 아픔, 이런 것을 통해서 나온 소리기호일 텐데요. 그런 것들에서 우리 시의 비언어적 선사(先史)를 이어왔다는 그 까마득한 시의 고향, 거기에 한번 닿아보자는 의미에서 소월(素月) 형, 또 저쪽의 횔덜린(Hölderlin) 형, 이런 분들에게 우리 언어의 시작과 끝을 상기시켜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언어라는 것이 세계의 자기 한계와도 한통속인지, 결코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언젠가 다 없어집니다. 그처럼 엄연한 불안으로서의 공간을 언어로 채우고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시 또는 언어의 고향이 어디쯤인가, 그 끝이 어디쯤인가, 비언어도 언어도 아닌‘아’‘어’이런 감탄사의 행방에 다가가보았습니다.

이장욱 언어의 한계랄까, 그런 걸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통해 말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존재가 시인이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150권 이상의 책을 펴내고, 2002년에는 각권 600면 안팎의 분량으로 38권짜리 전집을 내셨지요.

고은 그것도 온전한 전집은 아닌 셈입니다. 누락된 것도 있고 못 찾은 것도 있고. 그런 것까지 전집에 넣는다면 40권쯤 될 겁니다. 2002년에 나왔으니까 장차 추가해야 될 분량도 있습니다. 당시 그 전집이 나왔을 때 러쎌(Russell)이 생각났어요. 얼마나 썼냐고 누가 물으니까 “나의 저서는 나의 키만큼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실제로 내 전집도 내 키 173쎈티미터 정도는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 집에 보리가 몇가마니 있다, 쌀이 몇가마니 있다” 하고 자랑하는 것 같은데, 술 마시고 일하고 놀고 하다 보니 그 자취입니다. 아마도 이 성과들은 근대시 100년 전기의 선각시인들이 기껏 시 몇편 내서 시집 한권쯤으로 생애를 마감해온 사례들에 대한 반동일 것입니다.

이장욱 지금까지 내신 방대한 양의 시집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나요? 일종의 시적인 고향 같은……

고은 나는 우선 내 작품을 기억하는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두줄짜리 짧은 시…… 가만있어보세요. 그것도 지금 당장은 생각이 안 납니다. 내가 이상해요. 『만인보』의 세계나 다른 시세계의 소재들은 기이할 정도로 기억이 아주 잘 나는데 정작 내 작품에 대해서는 아주 치매입니다.(웃음) 따라서 어떤 작품에 대한 애정 따위는 아예 성립이 안됩니다. 그리고 내게는 오늘 쓰는 시가 제일 축복받은 시이고 제일 좋은 시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내일 모레의 작품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버리지요. 그러니까 내 체질은 자기 작품에 대해 철저하게 무책임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웃음)

이장욱 어느 자리에서인가 선생님은 허무주의든, 민족이든, 선(禪)적인 세계든 스스로 터를 잡았던 어떤 것이든 그것들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극복하고 넘어서면서 지금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 쓰는 시가 제일 축복받은 시라는 말씀도 아마 그런 맥락이겠네요. 시인에게는 모종의 율리시스 콤플렉스랄까, 그런 귀향의식이 있는 것 같지만, 선생님께서는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걸 부인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은 아까 여러 곡절을 겪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는데, 그것을 율리시스적인…… 어디 우리 현대사 속 시인의 길이 유독 나에게만 벅찬 역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율리시스의 행로에 내 세계가 반영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저기까지, 또 그다음 저기에서 다른 저기로 떠나는, 그 표류와 표착의 연속과정이 나하고 맞지, 이타카(Ithaca)로 귀향하는 율리시스와는 맞지 않아요. 그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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