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성중 金成重

1975년 서울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중편소설 『이슬라』 등이 있음.

hippieshow@naver.com

 

 

 

정상인

 

 

사년 만에 메일을 받았을 때 주영은 그려려니 했다. 정선배는 육년 전에도, 팔년 전에도, 십이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장황하게 근황을 묻고 그보다 길게 자신이 몰두한 일들을 늘어놓다가 ‘한국에 가면 보자’로 마무리되는 뜬금없는 메일. 이러다 끊어지겠지 싶다가도 그들은 몇년을 주기로 영양가 없는 안부를 주고받았다. 정선배가 우울증 내력을 고백하기도 하고 주영이 해고 직후의 곤궁함을 털어놓은 적도 있지만 서울과 런던이라는 거리 때문에 내밀한 편지가 각자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 일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메일의 말미에는 예상 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선배는 아예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갈무리하고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5월 5일에 만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비혼인 그들에게 5월 5일은 어린이날이 아니라 맑스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지만, 굳이 그날로 약속을 잡은 모양새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답신을 쓰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더니 선호에게서 카톡이 왔다. 같은 소식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 주영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선배에게 밝히지 않았지만 주영은 선호와 조심스럽게 다시 만나는 중이었다.

퇴근 후에 주영은 책장 앞에 오래 서서 한권의 책을 찾았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91년에 초판이 나왔고 95년에 5쇄를 찍었다. 가격은 만 팔천원이고 책등은 3.5센티미터쯤 된다. 얼마나 책장 깊숙이 꽂혀 있던지 이 책을 꺼내자 옆에 있던 다른 책들이 비명을 질렀다.

내친김에 주영은 한무더기의 책을 더 꺼내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스무살에 보던 책의 밑줄 친 부분을 마흔 넘어 읽어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이십년 전의 나를 만나는 일이구나. 열자리 휴대폰 번호며 책 가두리의 낙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신의 글씨가 낯설었다. 얄팍한 개론서를 펼치자 털어내지 못한 지우개 가루가 고스란히 박혀 있기도 했다. 변증법을 설명하는 나선형 계단을 이십년째 감싸고 있던 지우개 가루들은 털어도 잘 털어지지 않았다. 주영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몇조각처럼.

 

“네가 우리 캠에서 마지막이야.”

나경 언니가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어묵탕에 숟가락을 넣다 말고 주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부로 깃발 내린다.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할 거야.”

언니의 표정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저 전설적인 파마머리는 언어 성폭력을 저지른 토목과 남학우들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던 날 기념으로 한 것이다. 생머리에서 굵은 파마머리로 바뀌자 나경 언니의 카리스마는 네배쯤 불어났다.

새내기인 주영은 리얼리즘 문학회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맛보다가 고학번 선배에게 제안을 받았다. 더 집중적으로 유물론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겠느냐는 말이었다. 주영은 그러겠다고 했고, 나경 언니의 지도 아래 『철학의 기초이론』과 『경제학의 기초이론』을 비롯해 개론서들을 뗐다. 오늘은 『공산당선언』에 들어간 날이었다. 그런데 저녁 겸 반주를 하는 자리에서 언니가 느닷없이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세미나가 캠에서 하는 마지막 운동이라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졸업 즉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처지라고 했다.

주영은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가 되어 보이지 않는 바통을 건네받은 것 같았다. 자기가 이 바통을 집어들 것은 분명한데, 트랙이 어디로 이어질지 몰라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맑스의 진짜 문장을 본 날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얼마나 선동적인가! ‘잃은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세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주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끓는 피를 식혀보고자 소주를 마시던 참인데, 언니가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한총련 끝물 세대인 주영은 강력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선배들의 무협지 같은 시절이 막을 내렸고 이 판을 기웃거려봐야 ‘오늘부로 깃발 내린다’ 같은 소리밖에 들을 수 없음을. 마음속에 환멸인지 실망인지 모를 안개가 피어났는데, 주영은 그게 또 싫지 않았다. 그 와중에 캠퍼스를 ‘캠’이라고 줄여 부르는 선배의 말을 새겨들었는데 캠퍼스는 캠, 공산당선언은 공선언, 마르크스는 당연히 맑스. 이렇게 줄임말을 사용하면 뭐랄까, 그 세계를 친근하면서도 전문적으로 대하는 느낌이 든다. 캠퍼스를 캠으로 부르니까 평범한 대학가가 하나의 진지처럼 동그랗게 뭉쳐지는 것 같았다.

“내 말 듣고 있어?”

어느새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온 나경 언니는 딴생각에 빠진 주영의 정신머리를 퉁겨주었다. 주영이 끝내 운동권 꿈나무가 되지 못한 것은 시대 탓이라기보다 옆길로 새도 너무 새는 부족한 집중력 때문일 것이다.

“끝낼 때 끝내더라도 넌 확실히 책임질 거야. 네가 공부할 곳은 이미 알아놨어. 그 전에 나랑 책 한권만 더 보고 그리로 가면 된다.”

‘자꾸 어디를 가라 마라 해……’ 반감을 느끼면서도 주영은 선배들이 가라는데 가지 않은 적이 없다. 얼마 뒤 타 대학에서 하는 외부 세미나에 간 다음에서야 주영은 자신이 이어달리기 주자가 아니라 ‘바통’ 그 자체였다는 것을, 선배들끼리 이야기되어 이 세미나에서 저 세미나로 자신이 인수인계됐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주영은 신촌에 있는 ‘오늘의 책’에서 나경 언니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자유롭게 둘러봐.”

언니는 서점 안을 익숙하게 오가며 책을 꺼내거나 메모를 했다. 반면 주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서점 전체에서 가장 쉬운 책을 읽을 사람이 자신인 것 같은데, 심지어 그 책조차 오늘 살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주영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가판대에 놓인 책들을 살펴보았다. 목차부터 무슨 소린지 당최 모르겠다. ‘그러게 『철학용어사전』이라도 사지 그랬어.’ 턱수염과 긴 머리의 혁명가들이 책표지에서 이렇게 말을 거는 듯했다.

나경 언니가 추천해준 책들은 하나같이 긴 주석이 붙어 있거나 ‘더 읽을거리’라는 목록이 달려 있었다. 이런 목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이 가이드북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고, 앞으로 읽을 게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목을 하나 베면 그 자리에서 서너개의 목이 나오는 괴물처럼 배워야 할 책들이 불어나고 있었다.

주영은 왜 그런 책들에 이끌렸을까? 소화가 되지 않는 관념을 집어삼키는 일이 어떻게 기쁨이 되었을까? 사회과학 공부는 이상했다. 아는 것이 많아지는 느낌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늘어나는 공부였으니까. 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늘어나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그럼에도 세계의 진짜배기를 맛본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와 심장이 터지지 않은 것은 중간에 비밀 연애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밖에 없는 곳을 혼자 찾아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경 언니가 알려준 회기동의 한 대학 강의실로 향하면서 주영은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고민했다. 인문대 건물을 찾느라 이미 늦었고, 여기서 돌아간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갈등 끝에 찾던 강의실이 나오자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안에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강의실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해 앉아 있었다.

그 모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주영은 다이어리에 ‘외부 세미나’라고 적었고 구성원들끼리는 ‘원전 읽기’ 혹은 그냥 ‘모임’이라고만 칭했을 뿐 이름조차 없다. 이주일에 한번씩 아무런 친분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정해진 분량의 진도를 나간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모두들 열심히 읽어와 선배의 발제를 들은 후 토론을 한다. 이따금 허름한 술집에서 뒤풀이를 했고 누군가의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도 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생일은 물어도 서로의 연락처는 묻지 않았다. 심지어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절반 이상이 본명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미나를 이끌어줄 최기진 선배—물론 가명이다—는 첫날이니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며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밝히자고 했다.

“지금 시대에 맑스는 교양 아닌가요? 저는 교양 삼아 읽으러 나왔어요.”

“저희 총학은 주사파인데 공부를 너무 안 시켜요. 계속 운동을 하려면 이렇게 무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왔습니다.”

“철학 공부를 혼자서 쭉 해왔는데 그동안 관념론만 판 것 같아요. 유물론을 제대로 공부해 균형을 맞추고 싶습니다.”

다들 청산유수다. 반쯤은 거리를 두는 심드렁한 태도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어휘를 골라 말하는 것 같다. 차례가 오자 주영은 심사숙고 끝에 한마디만 했다.

“저는…… 맑스의 문장이 좋아서 왔어요.”

이 무슨 ‘쁘띠’ 같은 개소리란 말인가! ‘있어’ 보이려다 가장 반동적인 동기를 고백하고 만 셈이다. 달리 보면 그 분위기에 가장 편승한 대답이기도 했다.

낯설고 긴장된 첫 모임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절반 정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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