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창작기금

 

제18회 신동엽창작기금 발표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문학과 정신을 기리고 역량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신동엽 시인의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제정한 신동엽창작기금의 제18회 수여대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수여식은 11월 17일(장소 미정)에 있을 예정입니다.

 

 

█ 제18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여대상자

 

소설가   전  성  태

 

2000년 6월

만해문학상 및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

 

 

 

심사 경위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로부터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은 현기영·이시영·임규찬 세 사람은 실무진에서 준비한 자료를 건네받아 각자 검토한 후 2000년 6월 19일 창비사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소설가 두 사람과 시인 두 사람으로 심사대상을 압축하고, 창비에서 시행하는 다른 문학상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대상작가 중 소설 쪽을 우선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이후 심사위원들은 각자 대상 작품을 꼼꼼히 읽고 6월 26일 최종모임을 가졌다. 먼저 심사위원들은 두 시인도 만만찮은 개성과 역량을 가졌으나 거론된 소설가들보다 월등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 제외했다. 한편 소설 쪽의 두 사람은 모두 뚜렷한 개성과 역량을 보여주어 우열을 가늠키 어려웠다. 두 사람 다 언어의 조탁과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치열한 장인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기 신화적인 토속세계와, 매우 현실적인 오늘의 농촌세계에 깊이 천착한다는 점에서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보기 힘든 미덕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한쪽이 사어(死語), 특히 한자어를 되살리는 등 고답적 글쓰기로 토착적 세계를 직조하는 예술가 소설이라면, 다른 한쪽은 소멸 위기에 처한 민중언어를 실제 농촌의 삶에 밀착해 소생시킴으로써 현실에 응전하는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반면 한 사람은 매우 실험적인 정신으로 아직 불안하지만 새 세계를 개척하려는 의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데 비해, 다른 한 사람은 너무 한정된 세계만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다소 정형화된 세계로 고착될 위험성이 엿보였다. 이런 두 작가의 유사성과 대조성 때문에 두 사람을 공동수혜자로 하자는 의견까지 나와 논의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나 문학상이 아닌 창작지원금이라는 점, 심사 전통, 그리고 신동엽의 문학정신 등을 감안해 고심을 거듭한 끝에 전성태씨를 금년도 신동엽창작기금 수여대상자로 결정했다.

1994년 「닭몰이」로 등단한 전성태씨는 토속적 언어와 해학적 문체로 소외된 농촌현실을 탁월하게 묘파해냄으로써 진작부터 관심을 끌어왔다. 등단 6년 만에 첫 작품집 『매향』을 출간할 만큼 더딘 행보지만, 심사위원들은 진지하게 자기 작품과 싸우는 그의 개결함에 주목했다. 오늘의 혼탁한 세계에 맞서 오랜 전통의 살아있는 언어로 건강한 삶의 현장을 찾고자 하는 그의 진지한 리얼리즘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란한다.

玄基榮 李時英 林奎燦

 

 

수혜 소감

 

부디 알맹이만 남기를

 

 

전성태

 

 

이 소식은 저를 무척 두렵게 하였습니다. 어찌 두렵고 버겁지 않겠습니까? 이 기금의 혜택을 받은 선배들의 면면으로도 저는 쭉정이가 알곡에 묻어든 것마냥 주눅이 들 지경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느 외진 곳에서 피 말리는 글쓰기로 눈자위가 꺼져 있을 젊은 동료들에게 마음이 미치면 미안해지기까지 합니다. 볼품없는 농사에 참으로 과분한 격려입니다.

공교롭게도 시인의 육신이 세인들의 곁을 떠난 세월만큼 저는 살아왔습니다. 식민지·전쟁·궁핍이 깊게 드리운 그늘 따위는 그분이 다 가져가고, 저는 걱정거리도 철딱서니도 없이 곱게만 자란 유복자의 심정입니다. 그런 탓인지 그분의 문학만큼 높고 날카롭고 호방하며, 그만큼 깊고 지극했던 쓸쓸함에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첫 작품집을 묶고 나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섣불리 고백한 연민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늘에 젖지 않은 것들을 생짜로 노래한 죄로 저는 작품집을 들고 서서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이땅은 시인이 ‘희망’이라고 발음하면 온전히 희망 자체로 울려퍼질 만큼 그리 순정하거나 호락호락한 곳은 아닐 테지요. 신동엽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아마 그런 시절이 까마득한 날들에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삶의 실체와 문학의 격정이 합일되는 세계. 이땅에 한번도 실재하지 않았던 세계여도 상관없습니다만, 저는 별 의심 없이 당대에도 문학이 그런 세계를 불러올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무슨 근거로 희망이란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단박에 믿고 말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동엽 시인과 여러 선배 문인들이 일구어놓은 언어의 포장을 다 풀어보지도 않고 그 겉만 가지고 지레짐작한 모양입니다. 제가 선배 세대로부터 문학적으로 어떤 세례를 받았다면 아마 그건 옳게 받은 게 아닌 줄 압니다.

근래에야 저는 세상의 알맹이를 제대로 만져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루쉰이 「고향」이라는 소설에서 비유하였듯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원래부터 있었다고도 할 수 없고 없었다고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마치 땅위에 난 길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다니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한곳으로 걸었는지 제 경험과 직관으로 보려고 합니다. 기억되는 세계보다 기억되지 않는 세계에 저의 감각과 언어를 풀어놓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 길을 만드는 역사(役事)에 크나 작으나 한 자취가 되었으면 합니다.

은사님 한분의 말씀마따나 기금을 고맙고 감사히 받겠으나 아무래도 이 지게를 지고 앞으로 내디뎌야 할 걸음에 대한 걱정은 끝내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단지 이 과분한 격려를 껍데기는 까부르고 알맹이만 취해서 부끄럼 없는 작가생활로 갚아나가리라는 수월한 다짐뿐, 달리 약속드릴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