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24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박소란 황인찬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행숙 최원식 황규관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통해 아래 총 10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김수우 『뿌리주의자』, 김점용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김중일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문동만 『설운 일 덜 생각하고』, 송재학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유희경 『이다음 봄에 우리는』, 이근화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가나다순).

본심은 11월 1일에 진행되었는데, 모든 후보작이 저마다의 개성과 어법으로 뛰어난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심사진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숙고와 토론이 있었으나 수상작을 꼽는 데에는 이견 없이 한 목소리를 모아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2022)로 결정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일찍이 시인 자신이 제기한 ‘시와 정치’론에 대한 골똘한 시적 응답이자 언어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통해 사랑을 선언하고 약속하는 시집이다. 또한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게 하며 도처에 존재하는 슬픔의 공동체를 묵념의 시간에서 건져내는 적극적인 발걸음이다. 이 치열함으로 다다른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균형이 최고의 성취로 이어진 이 시집을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김행숙(金杏叔) 시인

올해의 백석문학상은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주어졌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문학상은 시인에게 수여되는 것일까, 시집에 수여되는 것일까. 그 시집을 쓴 그 시인에게 수여된다고 말하는 것과 그 시인이 쓴 그 시집에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 매한가지 아닌가, 그걸 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한데, 심사평을 쓰자고 앉아서는 이상하게 나는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다. 아마도 시인과 작품 사이의 어떤 일치와 간극에 대해서라면 진은영이 누구보다도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된 질문이지만 진은영과 더불어 새로워진 질문과 응답들. 올해의 백석문학상은 네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가지고 십년 만에 찾아온 진은영 시인에게 돌아갔다.

진은영은 이렇게 쓴다.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어울린다」). 진은영은 사랑의 ‘적극성’을 선언하고 약속한다. ‘너에게 내가 잘 어울린다’는 명제에는 ‘너에게 잘 어울리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감정을 실천으로 옮기는 존재론적 운동의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너에게 하는 약속이며 나에게 하는 결단이며 우리에게 하는 선언이다. 그는 “슬픔이 하느님보다 힘세다는 거”(「나는 도망 중」)를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슬픔의 공동체가 슬픔의 한복판에서 시작하는 사랑의 행진,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는 ‘주어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애도의 시간은 슬픔의 감정에 소리 죽인 묵념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시간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는 천천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어둠을 헤엄치”(「어울린다」)며 걸어온 진은영 시의 끈질긴 발걸음이 도달한 ‘어둠 속의 빛’이 있다.

이 상이 ‘사랑의 공동체’에 바쳐질 거라고 믿는다. 심사 과정에서 이근화 시인의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의 성취에 대하여 모든 심사위원이 각별히 주목했음을 밝혀둔다. 마모된 일상의 세목들을 발굴하고 구원해내는 이근화‘스러운’ 시각과 태도와 언어는 유니크한 하나의 시적 스타일을 이룩하였고 삶을 바라보고 살아내는 특별한 시적 겹눈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본심에 오른 시집 중, 나는 문동만 이근화 그리고 진은영에 주목했다.

문동만의 『설운 일 덜 생각하고』는 난해의 미궁 속으로 빠져든 최근 시단의 경향을 거스른 드물게 순정(醇正)한 서정시집이다. “늘 서쪽에서 시를 고쳤는데 이번에는 평정한 마음으로 평상에 엎드려 어두워지는 동녘 하늘을 보며 쓴다.”(‘시인 에세이’) 시간의 성숙이 국향처럼 은은한, 때론 위로도 건네는 그의 시는 미래파 이후 우리 시가 잃어버린 어떤 지경을 상기하거니와, 그 평정이 지금도 여전히 노동하는 노동자 시인 문동만이 어렵게 획득한 시적 자질인 점이 오롯한 것이다. 다만 노동의 부재가 걸린다. 노동조차 다른 시의 영토로 포획할 계단에 오를 문동만의 다음 작업을 기대한다.

이근화의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는 겉과 속이 다른 시집이다. “죽지 않고 서서히 늙어가는 일”(‘시인의 말’)이라든가, “끌고 다니며 탕진하는 빛나는 시간”(「우리는 왜 썰매를 끄는가」)이라든가, 시집 곳곳에 출몰하는 냉소적 견인주의에 휘둘려, 소시민적 일상을 일류의 해학과 풍자로 포착한 「귀가 접힌 고양이처럼」을 비롯한 현실주의 시편들을 간과해선 되지 않을 일이다. 김수영에서 혁명을 뺀 전자의 노성(老成)보다 리얼리티로 생동하는 후자가 이근화의 개척인데, 시인의 이후가 궁금하다.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일찍이 스스로 제기한 ‘시와 정치’론에 대한 골똘한 시적 응답이다. 진보적 의식이 시로 이동하는 데 일정한 장애를 일으키는 자신의 경험에 정직하게 직면한 고백이 시단 및 문단 전체로 공명하면서 우리 시의 향방을 묻던 것인데, 문제는 시적 실천이다. 그 혈로를 뚫기 위한 십여년 독공의, ‘과거에도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고’(「청혼」) 오직 절대의 오늘을 살아낸 치열한 흔적이 시집 곳곳에 임리하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애쓰던 시간들”(‘시인의 말’)이 간절히 환기하듯, 세월호참사를 겪으며 더욱이 최고의 긴장으로 팽팽해진,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간난한 균형에 간신히 다다른바, 이 시집은 그 한계까지 포함해서 현 시단 최고의 텍스트다. 다만 우리가 딛고 사는 아시아가 부재한 것이 문제다. 서양에 통투하면 동양으로 회향할 것이어늘, 아직 서양이 모자란가?

문동만 시인이 이육사시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이근화 시인의 현실주의의 승리를 응원하면서, 용맹정진으로 감투한 진은영 시인을 제24회 수상자로 삼는 데 심사위원회는 합의하였다.

 

황규관(黃圭官) 시인

예심에서 올라온 시집 중에 유희경의 『이다음 봄에 우리는』,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이근화의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문동만의 『설운 일 덜 생각하고』, 이렇게 네권을 집중 검토했다. 먼저, 네분의 시세계가 각자의 색깔과 개성, 그리고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본심위원들은 흡족했다. 우리 시의 미래를 예단하는 징후라고까지는 감히 장담하기 어렵지만, 최근 성과의 진수를 만끽한 즐거움은 작지 않았다.

유희경의 시는 섬세한 언어가 마음껏 발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부재와 상실’의 언어가 우리에게 주어진 숨 쉬기 힘든 삶을 얼마나 시적으로 해체하거나 녹여낼 수 있을지 자신하기 어려웠다. 이런 예는 많이 있지만 예를 하나 들자면, “이제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시간”(「바람이 언덕을 넘어 불어온다」) 같은 독백들. 이에 반해 이근화의 시집은 구체적인 일상에서 만나는 존재들을 향한 활달한 목소리들이 실감있게 다가왔다. 이는 일상의 경험을 어지간해서는 놓아주지 않는 ‘시적 집요’가 갖는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집요함이 시의 운신을 제약하는 원치 않은 결과를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인식과 상상력에 날개가 돋을 듯하다가 말아버린다는 점에서 주저를 믿음으로 바꿔주지 못했다. 문동만의 이번 시집은, 서정이 깊어지면 다다를 수 있는 지평을 보여준 성과다. 그리고 그럴 때 받는 감동도 유난했다. 이웃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따뜻했으며 죽음을 대하는 마음도 지극해 중간중간 시집을 덮게 했다. 이런 작품이 더 있었더라면, 모성에 대한 통찰이 일반적인 차원을 넘어서 나아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끝내 최종 판단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10년 만에 시집을 펴낸 진은영의 경우는, 이제 시인이 더욱 자유로워졌구나 하는 해방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언어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말이다. 시인의 눈과 발걸음은 전방위적이다 못해,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뱀 이야기」에서 “아주 큰 죄를 짓고 싶다/기억이 물의 트럼펫을 마른 귓속으로 불어댄다”고 했을 때, 독자로서 “아주 큰 죄”가 느닷없이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건, 다음 행에서 보여주는 빛나는 ‘은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면서도 가슴이 고동치는 건 시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개념의 파편 때문일 것이다. 또는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사랑의 전문가」) 같은 진술에서 보이듯, 이번 진은영의 시집에서 사랑의 주체는 더이상 ‘나’가 아니다. 이런 암시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몇번 더 드러나는데,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같은 그간의 서정을 아주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진은영의 화자들이 사랑받는 희열에 싸였다는 뜻은 아니라, 세계를 원망하면서 동시에 사랑한다는 사랑에 대한 변증법을 시인이 지금 바꾸고 있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진은영의 이번 시집을 읽으면 나도 세계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가, 둘러보게 된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랴! 시인은 지금 사랑의 방정식을 새로 발명 중인데. 여기에 미래를 한번 맡겨보는 일도 “가장 연한 싹”을 위해서 기쁜 행동일 것이다.

 

 

 

수상소감

 

11월의 첫날,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젊은 편집자에게서 백석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만일 시의 언어로 집을 짓고 거기에 들어가 살 수 있다면 저는 백석 시인의 언어로 된 집에 거주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백석 시인처럼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고 가즈랑집 할머니가 해주는 고사리 두릅순 가치취 산나물 반찬을 먹고 또 먹고 도토리묵에 도토리범벅까지 실컷 먹고 나면, 항상 부실하기만 한 제 몸도 금세 나을 것 같았습니다. 뒤울안에 서 있는 살구나무를 흔들며 살구 벼락을 맞으면 향긋하고 달콤한 내음 사이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새로 들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같이 정갈해지고 가즈랑집 할머니처럼 귀신의 딸로 살아서 슬픈데도, 나 먹을 것 있고 남 먹일 것도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 소식을 듣기 전 10월의 마지막 사흘 사이에 벌어진 참담한 일들이 이 아름답고 기쁜 집을 또 사라지게 했습니다. 어쩌면 시의 집은 잠시 있다가 또 사라지라고 세상에 자꾸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 집에 영원히 살 수는 없을 테지요. 다친 짐승처럼 아프고 쓰린 마음을 잠시 누이고 앓다가, 거기서 챙겨 받은 말의 양식을 들고 나와 다른 사람과 나누고, 처음 잡아보는 누군가의 차가운 손에 약간의 온기를 주는 일, 그것이 시의 역사를 통해 저와 다른 시인들의 삶에 내내 일어났던 일입니다. 특히 매일매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살아보는 만용과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본디 타고나지 못한 저로서는 말의 아름다움을 보약처럼 마시며 그 잠깐의 힘으로 세상의 참담한 소문 근처를 서성거린 것도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10년 만에 시집을 내면서 저는 이 시집이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제법 긴 시간을 거쳐온 시들이어서 어떤 시들이 담고 있는 죽은 이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마음에는 오래된 사진처럼 희미하게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고통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는 사진들을 시로 된 작은 집의 흰 바람벽 위에나마 계속 붙여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들이 세상에 더이상 생겨날 리 없는 어떤 슬프고 힘겨운 사건에 대한 옛날이야기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거리를 제목에 넣은 시집을 낸 지 두달 만에 거리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이 참담한 일들의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 뉴스 앞에서, 제가 열렬히 사랑하는 시인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된 일을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설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온 이 소식은 ‘너에게는 먹고 마실 것이 충분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제게 기쁨보다 더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현실이 우리가 짓는 꿈의 집을 매일매일 부수더라도 백석의 시집을 열기만 하면, 유난 떨지 않으면서도 계속 세워지는 아름다움의 집이 있습니다. 이 상을, 힘들면 그곳에서 다시 앓고 또 실컷 먹고 힘내어 일어나 어느 먼 산의 갈매나무마냥 드물고 굳고 정하게 한번 살아보라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제 엉성한 시들을 큰 상으로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귀한 시인의 이름으로 된 상의 역사를 오래 지켜주신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제 슬픔이며 어리석음으로 여기고 백석 시인이 그러했듯 소처럼 연하게 새김질하며 열심히 쓰고 또 쓰겠습니다.

 

수상자 약력

陳恩英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문학의 아토포스』를 썼으며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과 시집 『에어리얼』을 우리말로 옮겼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에서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