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제3의 길’ 찾기에 거는 기대

김석철 교수의 새만금 바다도시라는 대안을 접하면서, 새만금의 비극을 뒤집을 수 있는 ‘제3의 길’에 기대를 걸어본다. 김제에 살아온 나에게 새만금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바다를 막고 갯벌을 없애버리는 일이 주는 숨막힘 때문이다. 바다에 나설 때마다, 길게 방조제가 쌓여갈수록 더욱 가슴 답답한 갯벌을 마주하며, 이 아름다운 서해의 미래를 걱정한다. 공교롭게도 나의 이웃들 가운데는, 강경하게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고, 사업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앞장서는 이들도 있다. 같은 일을 하며 살던 이웃끼리 의견이 나뉘고, 전문가들도 저마다 주장이 다르다. 그런데 찬반 어느 쪽이건, 모두가 서해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방조제를 쌓는 사람들, 사업을 중단하라고 울부짖는 사람들, 모두가 이 바다의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할진대, 어찌 이렇게 가는 길이 다르단 말인가? 

갯벌이 죽으면 서해안이 죽는다. 어장이 사라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이러한 문제를 안은 채 새만금 방조제는 벌써 80여리나 쌓여지고 말았다. 그것도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앞으로만 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방조제를 허물 것인가? 지금 염두에 둘 것은, 아직 이곳이 바다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방조제는 이미 어느정도 쌓여졌고, 이 일에 관한 논란도 원론적 단계를 훨씬 지나버렸지만, 이곳은 여전히 바다이다. 그렇다면, 이미 쌓아버린 방조제와 아직 죽지 않은 바다 두 가지를 살려 쓸 수 있는 길을 찾는 건,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김석철 교수가 대안으로 제시한 새만금 바다도시는, 방조제 공사를 중단하고 갯벌을 살릴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하다고 본다. 이 대안이 좀더 빨리 제시됐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방조제 공사가 마저 진행된다면, 새만금은 그야말로 바다와는 단절된 육지와 담수호가 되어버리고, 발전의 이면에 비극의 역사가 길게 드리워질 것이다. 비극이냐 아니냐 하는 양자택일보다는, 비극을 더 진전시키지 않을 제3의 길을 서둘러 찾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소중한 갯벌을 살리면서도, 서해안권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바쁘게 살펴야 한다. 김석철 교수의 제안이, 바다와 갯벌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인지를 식견있는 사람들이 서둘러 진단해주기를 바란다.

전북 김제 김수돈 pen119@dreamwiz.com

 

 

김석철 교수의 글을 읽고

찬반논란 속에 동진강유역 우선개발이라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던 새만금 간척사업은 그렇지 않아도 논란의 불씨가 남아 있던 터에 대통령인수위의 업무보고와 김석철 교수의 새로운 대안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다시금 전북지역에서 문제화되고 있다. 물론 정부는 사업을 지속하겠다 하고 김석철 교수의 대안조차도 전혀 논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나 전북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니만큼 전북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김교수의 새로운 시각에 견해를 드리고자 한다. 김교수의 다섯 가지 기조 가운데 황해안 도시공동체는 전라북도에서 주장하고 있는 서해안시대 프로젝트와 유사하다 하겠다. 그러나 새만금을 농토와 담수호로 만드는 것이 미래의 재앙이라는 김교수의 견해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서해안 어번 클러스터화는 쌀시장 개방화에 따른 호남평야의 역할인데, 이는 정부의 쌀정책 포기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새로운 기조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새만금-호남평야 지역의 도시연합의 실현, 즉 군산·익산·전주·김제·정읍의 도시연합은 이미 전라북도가 구상하고 있는 지역별 특성화와 유사하다고 본다. 더구나 도시공동체 개념도 전북경제의 하락 추세와 인구감소 현실을 감안한다면 과장이라 하겠다. 또한 바다도시·내륙도시·중간도시·수상도시 프로젝트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갯벌을 보존한 상태에서의 도시개발이 이율배반이라는 점 때문이다. 햇빛이 없는 갯벌은 이미 갯벌이 아니다. 우리는 경제개발시대의 도시팽창 정책이나 치수형 하천사업이 이미 생태복원사업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청계천 복원사업 또한 우리가 미래에 자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단면이고 새만금 사업은 흐르는 물은 막지 말라는 평범한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이 점에서 김교수의 대안 또한 바다와 갯벌을 복개하는 사업과 다를 게 없다고 본다. 물론 새만금 사업은 시화호처럼 끝난 사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대안에 대한 시도와 논의는 바람직하고 이러한 시도나 논의조차도 없다면 안될 것이다. 조금 늦더라도 새만금이 후세에 보람있는 유산으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주 푸른약속전북21 사무처장 김택천 tc2848@hanmail.net

 

 

특집과 신인문학상에 대해

현재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문제들을 수박 겉핥기식 알리기가 아니라 전문가의 심층적 분석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갖게 하는 118호 특집구성이 참 좋았다. 

실제로 그런지 모르지만 신인문학상 응모작들이 그렇게 부족한 역량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 심사위원의 날카로운 평가의 매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글쓰기가 평생의 과업인 사람들에게 등단의 늦고 빠름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가슴깊은 충고로 다가온다. 

부산시 최성진 tru06th@hanmail.net

 

 

신경림 시인의 「낙타」와 「이역」

신경림 시인의 「낙타」와 「異域」은 참 쓸쓸한 느낌을 준다. 죽음을 가까운 곳에 두고 삶을 관조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의 회한과 욕망 등을 초연히 흘려버리려는 다짐은 빛이 나면서도 안타깝다. 그 다짐이 눈부시다고 느껴지는 것은 오랜 시간 속의 “그들”이 결국 ‘나’에 다름아니라는 깨달음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만난 사람들과 기억 이전의 부딪힘들을 다시 겪으러 돌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정조가 몹시 처연하게 느껴져서가 아닐까 싶다.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가장 가엾은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하고픈 심정. 만약 다음 생에 돌아와야 한다면 지금의 ‘나’가 아니라 “낙타”로 현존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이런 것들이 처연한 정조를 빚어내면서 안타까운 감정과 복잡한 생각들을 건네준다. 

지소윤 ansrudal2003@yahoo.co.kr

 

 

「낙타」를 읽고

예전에 나는 광주에서 신경림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멀리서 봤지만 그는 겸손하고 온유해 보였다. 문학은 삶이고, 삶은 곧 문학이 아닐까. 문학을 하고 있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문학을 통해 삶을 배운다. 

신경림 시인은 그의 위해한 시상과 문학에 비해 아주 겸손한 것 같아 좋아 보였다. 지난호 「낙타」도 그의 내면과 인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작가들의 세태에 잔잔한 돌멩이로, 구름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삶을 배우고 싶다. 

광주 광산구 도산동 호반2차 201동 503호 서영식

 

 

오랜만에 읽은 방현석의 소설

80년대 그 많던 운동권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인으로 발돋음하여 마치 자신들이 지나간 시대를 대표하는 양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 중 어떤 자는 자신을 고문과 감옥으로 내몰던 적과 동침하면서, 어제의 동지들을 향해 쓰레기 같은 말을 뱉어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나마 운신의 폭이 좁은 정치판에서 아직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사실 궁금한 사항이 아니다. 정치인의 변절이나 신념도 그 정치판의 정치공학 함수에 따라 평가와 해석이 왔다갔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80년대 운동권들의 변화상을 가늠하는 데 그닥 쓸모있는 참고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에 읽은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은 여태까지 ‘후일담’류로만 전해지던 운동권의 변화된 삶의 ‘형식’을 안정되고 담담한 어법으로 훌륭히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재우라는 운동권 출신 번역가가 희은이라는 한국 처녀와 베트남인 레지투이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 게릴라를 다룬 한국어 씨나리오를 베트남어로 옮기는 과정이 줄기를 이룬다. 사실 방현석의 이 소설쓰기 자체가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베트남의 그것으로 혹은 그 반대과정으로 번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우와 레지투이의 번역어 선택에서 드러난 차이는 역사체험의 차이까지를 함축한다. 재우를 베트남으로까지 내몰게 했던 역사는 창은의 고단한 삶에 대한 기억이나, 발빠르게 변신한 문태의 현재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재우 앞에 서성거린다. 한편 레지투이의 삶은 자신을 위해 죽어갔던 동료를 못 잊고 그 죽음의 빚을 갚기 위해 시를 쓰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에 바쳐진다. 그가 죽어간 동료의 이름을 필명으로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레지투이의 이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은 재우의 회상 속에서 “무언가를 꿈꾸려는 자는 그 꿈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 창은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러한 창은의 삶과 꿈을 냉혹한 현실의 원리로 ‘번역’하는 문태의 삶 사이에 바로 재우의 삶이 끼여 있다. 그가 한국사업가와 현지인들을 ‘통역’하는 일을 하다가 결국 그만두게 되는 것도 한국에서와 똑같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한국사업가들의 일그러진 행태 때문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의 ‘게릴라’ 같은 현실의 개선을 위해 싸우는, ‘꿈대로 살아가는’ 창은의 삶이 재우의 결단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재우가 창은의 ‘존재의 형식’을 기준으로 문태의 삶을 재단했다면 소설은 다소 맥빠진 것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골프 치러 간다던 문태가 베트남 역사의 생생한 현장인 구치터널을 보러 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재우가 느끼는 상쾌함에 불만을 가질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 단 몇줄로 설명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또한 아무리 역사의 현장이 관광의 대상으로 변했다 해도 구치터널을 눈으로 본다면 거기에서 인간의 꿈, 욕망, 신념, 의지, 좌절, 고통, 비애가 뒤섞인 역사의 ‘폭풍우’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태가 이 터널을 보고 얼마나 바뀌었느냐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재우와 문태의 우정의 ‘체온’이 높아진 점은 ‘마음가짐’이 어느정도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재오 byron5@dreamwiz.com

 

 

정 많은 작가 신경숙의 작품

지금은 환상 속에서 기억의 더듬거림으로밖에는 반추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 채영주의 모습을 담은 신경숙의 소설 「혼자 간 사람」은 작가 특유의 정겹고 담담한 필체를 일상에서의 전화통화라는 방식으로 제시해냄으로써 읽히기는 쉬우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우울의 무게감을 자아내고 있다. 모든 먼저 가버린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이렇듯 ‘수다’ 하나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건 그리움에 숨어 훌쩍거렸을 정 많은 작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윤정희 phhaa1234@hanmail.net

 

 

삼십 중반 그리고 남자의 등

최일남 단편소설 「멀리 가버렸네」(2002년 가을호)를 읽고 삼십 중반 남자의 등은 그러한가 싶어 자꾸자꾸 거울에 등을 비춰본다. 그러고 보니 내 등을 제대로 본 적이 몇번 안되는 것 같다. 한 몸을 앞뒤로 지고 평생을 살면서도 늘 신경쓰고, 맘 뺏기는 것은 앞모습뿐인 이유는 앞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리라. 가끔 내 가까운 사람들의 뒷모습이 어떠한지, 그들의 뒷모습이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차민기 kangnaru1@lycos.co.kr

 

 

윤지관 평론 「비평은 있다」 

모처럼 비평다운 글을 보았다. 문학에 서툰 사람들이야 작가의 비중에 따라 읽을거리를 선택하고, 문학을 선도한다는 사람들의 평을 비판없이 수용하기에 모두가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윤지관 교수의 날카로운 비평이 미로에서 헤매는 나를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등불처럼 다가왔다. 흔히 알고 있는 대작가의 작품들이 실패작이라는 선언적 단언은 명쾌하다. 권위와 상업주위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글들에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미심쩍은 박수를 보내곤 했는데 이제야 희미하게나마 눈이 트이는 듯하다. 큰 꾸중 같은 이런 글을 망설임 없이 실음으로써 『창작과비평』의 편협되지 않음을 보여준 듯해서 흐뭇했다. 진심어린 비평이야말로 서로를 위한 격려와 칭찬이 아닐지? 쌍방의 주장을 다 들어봐야 하나 우선 윤교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은희경·신경숙·전경린의 반론을 기대해본다. 

김창국 kim99k@hanmail.net

 

 

뒷부분부터 읽는 창비

창비를 주로 뒷부분부터 읽는다. 글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슈가 되는 사회현상과 다양한 장르에 대한 문화평 등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지난호에는 안정옥의 논단 「문화사회와 탈노동사회」란 글이 특히 눈에 다가왔다. 김기택 시인이 『사무원』에서 선보인 덩그러니 놓여진 출퇴근길 풍경이라든가 주5일 근무제를 둘러싼 담론, 그리고 극한스포츠가 현대인들에게 왜 인기를 끄는지에 대한 분석들이 흥미로웠다. 세상은 계속해서 빠르게 변화해가고, 전에 없던 새로운 생활양식과 문화현상들이 자주 출현한다. 기능에 전혀 불만없는 휴대전화가 어느새 망치(?)로 둔갑하는 것처럼, 세상의 변화속도를 굳이 거부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단절되고 소통은 더 어려워진다. 사회학적인 글들이 어떤 처방전을 제공하진 않더라도 동시대에 대면하는 일상적인, 그러나 때로는 낯선 풍경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종의 안도감을 준다. 창비에 여러 독자층이 있겠지만 새롭게 출현하는 문화현상이나 일상성에 잠복한 시대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글들을 자주 만나기를 기대한다.

신재호 kchonsuk@sempi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