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2021년 6월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김형수 박준 심진경 한기욱을 제39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2021년 5월 31일까지)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각 부문에서 선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시와 소설은 단행본, 평론은 발표 원고 기준). 추천위원(창비의 시·소설 기획위와 『창작과비평』 상임위)들이 올린 총 17편의 후보작 가운데 아래와 같은 10편이 최종 심사대상이 되었다.

유진목 『작가의 탄생』,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채길우 『매듭법』(이상 시), 강화길 『화이트 호스』,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이주혜 『자두』, 황현진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이상 소설), 선우은실 「세계적 위기의 공통감각 위에서 읽는 질병 시대의 여성 서사」, 소유정 「이토록 열렬한 마음」, 장은영 「인간적인 죽음,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상 평론).

심사위원들은 7월 22일 모임에서 장시간 토론을 펼친 끝에 자연과 노동의 현장에 시적 깊이를 더한 이정훈 시집(창비 2020), 낡은 관계와 관념을 무너뜨리는 혁신적 면모를 보여준 박상영 연작소설(창비 2019), 노동의 위기를 섬세한 비평언어로 다루며 ‘노동시’의 개념을 발본적으로 재고한 장은영 평론(『오늘의 문예비평』 2019년 가을호)을 제39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김형수 시인, 소설가

작품을 읽는 동안 그간의 세월을 통해 형성된 좋은 문학의 ‘틀’이 무엇일까를 여러번 생각했다. 삶의 세계를 정직하게 관통하는 정신? 그렇다면 또한 그것들의 연쇄와 축적이 이룬 흔적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그런 관심을 가장 많이 충족시킨 건 이정훈 시집 『쏘가리, 호랑이』였다. 나는 시와 노래의 결별을 남과 북의 분단만큼이나 곤혹스러운 딜레마로 생각한다. 현실의 숨결과 지나치게 멀어진 시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이정훈의 시에 가득 찬 유장한 가락의 힘은 발군의 생명력을 발한다. 디지털 시대가 유실한, 인간의 감수성이 대지의 맨살과 마찰하면서 빚는 천렵꾼 풍의 노래뿐 아니라 「오버런」 같은 시들에서도 민담과 신화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평론 수상작을 선정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신동엽 시인은 기성의 안목을 척도로 삼지 않았으며, 신춘문예에도 시와 평론을 동시에 투고할 만큼 비평의 정신을 중시했다. 장은영의 「인간적인 죽음,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일: 김사이론」은 외부의 권위있는 이론에 연연하기보다 현실의 원판 위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소리에 주목한 점부터 신동엽 정신에 부응한다. 장쾌하거나 섬세한 문장은 아닐지나 이미 김사이를 천착하되, 또한 노동시가 불가능한 시대의 노동시를 쓰는 여성의 실존 장소와 시대의 본질을 묻는 뚝심이 크게 돋보였다. 전통적인 계급성이 해체되고, 인간의 노동과 삶을 억압하는 복잡성과 폭력성은 훨씬 가혹해진 시대와 맞서는 한 고독한 외침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 노고야말로 상찬할 미덕이 아닌가 한다.

이번에 가장 열심히 고민하며 읽은 건 소설들이었다. 강화길 『화이트 호스』, 이주혜 『자두』도 인상 깊지만, 그보다 펼치자마자 빨려들기 시작한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지난 시절에 형성된 관념의 틀을 단숨에 전복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루기 어려운 퀴어 문제를 이토록 거침없이 밀고 가는 작품을 처음 보는 듯싶다. 가부장제 이후의 애정관계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점에 특히 놀라면서도 상업 서사로의 경도가 심한 건 아닌지 걱정도 했다. 덧붙여서 나는, 성격 포착에 뛰어나고, 각종 이데올로기에 묶이지 않으며, 삶의 질박한 그늘을 읽을 줄 아는 황현진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의 몇몇 단편들을 매우 귀하게 보면서 공력을 덜 들인 점을 아쉬워했다는 소감도 전하고 싶다.

 

박준 시인

이정훈의 『쏘가리, 호랑이』에는 자유로운 설화적 상상력과 근대적 현실의 비의가 공존하고 있다. 그가 풀어내는 삶과 노동은 천연덕스러운 구술의 힘으로 현재성을 획득한다. 간혹 아득할 만큼 아름다운 서정의 장면들을 설핏 내보이는 것도 이 시집이 가진 큰 힘이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노동의 투쟁적인 지점이 작품에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비판적 물음에 “나는 삶에서 다 했다”라고 답을 한 적이 있다.(한국일보 2020.3.25) 그의 말을 빌려오자면 이정훈 시인은 이 시집에서 다 했다. 물론 이후 시집에서도 다 할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를 함께 보낸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서사의 독법 안에서 서글프고 아름다우며, 이 독법 밖에서 자유롭고 유쾌하다. 박상영은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해 농치며 어르듯 말할 수 있는 작가다. 그리고 이 덕분에 그는 차별과 사랑과 상실과 죽음 같은 것까지 울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작품을 통해 웃었으면 좋겠다. 울지 않기 위해 웃는 것이 아니라 웃고 싶어서 웃었으면 좋겠다.

장은영 평론 「인간적인 죽음,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일: 김사이론」을 읽으며 김사이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를 이렇게나 풍성하고도 깊이 읽을 수 있는 혜안이 놀라웠다.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변하는 동안 함께 변하지 못한 주체들을 여성과 공동체의 시각으로 살피는 시선도 귀하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평자는 2021년 대부분의 우리가 현재의 노동시를 읽을 때 품게 되는 의문들과 근원을 찾기 힘든 열패감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진솔하게 진술한다. 텍스트를 시발점으로 독창적 사유의 길로 안내해주는 일을 넘어서 “반성적 의심”을 통해 묵직한 질문까지 던져주는 아름다운 평론을 읽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

이번 신동엽문학상 심사는 평론, 시, 소설 순서로 진행됐다. 평론 부문 수상작은 장은영의 「인간적인 죽음,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일: 김사이론」으로, 심사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비교적 빨리 결정되었다. 이 글은 노동의 조건과 양식이 달라진 지금 과연 ‘노동시’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김사이 시를 중심으로 질문하고 모색하는 비평이다. 김사이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노동자들, 특히 전형적인 남성 노동자의 모습에 가려져 있지만 맨 밑바닥에서 한국 노동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비정규직의, 나이 든(혹은 어린), 이주노동자 혹은 여성노동자들의 형상을 통해 장은영은 점점 플랫폼화되고 비가시화되는 노동의 위기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언어로 다루고 있다. 때론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노동시’라는 장르에 대한 역사적이면서 폭넓은 시각을 전제하지 않은 채 김사이 작가론에만 그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우려에도 불구하고, 모든 심사위원들이 이 글에 동의한 이유다.

본심에 올라온 시집 중에 눈길이 갔던 것은 유진목의 『작가의 탄생』과 이정훈의 『쏘가리, 호랑이』였다. 유진목 시의 경우 장황하고 허황된 수사가 없으면서도 읽는 이를 묵직하게 끌어당기는 시적 에너지와 호흡, 일상적 삶의 풍경을 흔들리면서 펼쳐 보이다가 문득 스산한 종말 이후의 어떤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시인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다. 이정훈의 『쏘가리, 호랑이』는 시적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과 노동의 현장에 시적 깊이를 더함으로써 지금의 ‘나’ 안에 무수한 이야기 길을 만들어온 오랜 생의 시간들을 발견한다. 그럴 때 지금은 지금만이 아니게 되며, ‘나’는 ‘나’만이 아니게 된다. 이정훈의 시가 단순히 자연시나 노동시로 분류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풍부한 생의 감각들과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 덕분일 것이다. 긴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신선함과 원숙함으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뚝심있게 만들어가고 있는 이정훈의 시적 체험이 우리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는 데 동의했다.

소설 부문 심사는 가장 논쟁적이고 치열했다. 모든 작가의 작품들이 오래 이야기되었으며 이는 지금 우리에게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황현진 소설집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은 특히 인물에 대한 얘기로 모아졌는데, 특유의 통달한 듯하면서도 불안에 빠진 인물이 작가의 내공을 느끼게 한다. 이주혜의 장편 『자두』는 남성중심적 가족구조 안에서 결국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 간의 연대가 건강하고 씩씩하다. 강화길의 소설집 『화이트 호스』는 미스터리적 구조를 통해 여성억압의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억압의 내면까지 파고들어가 독자들을 낯선 심리세계로 끌고 가는 점이 흥미로웠다. 박상영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은 ‘게이섹스라이프’ 아카이브이자 순정과 진정성, 영원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기존 로맨스 서사와 결별하는 낯선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연상시키는 대중문화 속 게이 이미지를 가져오면서도 이들을 변두리의, 낡은,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현실 속에 배치함으로써 낯선 감정과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심사위원 모두는 이야기의 표면을 한없이 가벼운 몸짓으로 미끄럽게 타고 흐르면서도 현실에 무거운 추를 드리우는 이 대중적 퀴어서사가 우리를 새로운 문학적 현실로 데려갈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세분의 수상자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며 앞으로 우리 문학을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채워주시길 기대한다.

 

한기욱 문학평론가

최종심 대상작들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큰 변화에 걸맞은 혁신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혁신은 내용과 관점, 스타일의 변화로 나타나지만, 그 속에는 한 주체가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실천적 사유가 녹아들어 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각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점을 재확인해준다.

시 부문에서 특히 눈여겨본 것은 채길우와 이정훈의 시집이었다. 채길우의 『매듭법』은 우리 시대의 약자들로 향하는 시인의 공감이 종종 너와 나의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 되기’를 감행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요양병원의 ‘그녀’와 지하철의 앉은뱅이 걸인과 역전의 노숙자를 바닥까지 내려가서 바라보고 그들이 되기도 하지만 연민의 한계를 잊지 않는다. 이정훈의 『쏘가리, 호랑이』에는 가시 돋친 자연의 생명력과 오랜 노동으로 단련된 몸의 감각이 묘하게 병존한다. 자연과 기계에 모두 밀착된 시인은 쏘가리를 잡다가 쏘가리가 되기도 하고 기계를 고치면서 기계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이정훈의 시는 민중문학의 전통에 설화적 상상력과 ‘되기’의 정동을 접목함으로써 상투적 유형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준다. 대상작들을 두루 논의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이정훈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뽑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소설 부문에 오른 작품들은 저마다 고유한 미덕과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주혜의 『자두』는 시아버지 간병을 맡게 된 여성 화자의 처지와 심리, 간병인 여성과의 연대감 형성 과정이 핍진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시아버지의 섬망증이 예측불허의 변수로 작동함으로써 서사적 긴장감을 한껏 드높인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게이들의 사랑과 삶을 중심으로 도시의 풍경을 펼쳐 보이면서 기존 서사와 판이한 어법과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준다. 동성애문학 장르로 협애화되어 수용되기도 하지만, 박상영의 소설은 젠더와 세대와 계층을 가로질러 낡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심사위원들은 낡은 경계들을 돌파해온 그의 문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여 수상작으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평론 부문에서도 주목할 만한 글이 여럿 올랐다. 선우은실의 평론은 이주혜의 『자두』와 이현석의 「너를 따라가면」을 논하면서 가부장제가 그어놓은 허구적 경계를 돌파하는 지점이라든지 그간 탈각시켜온 여성 주체를 복원시키는 방식을 예리하게 짚는다. 소유정의 평론은 최근 여성작가의 소설들에 나타나는 아이돌 팬덤과 팬픽 현상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그것이 아이돌에 대한 사랑과 욕망일 뿐 아니라 여성 화자 ‘나’를 다시 쓰는 과정이기도 함을 설득력 있게 논한다. 장은영의 평론은 가리봉에서 노동과 시 쓰기를 병행해온 김사이의 시세계를 최근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추적하며 그 달라진 면모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특히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시편들을 ‘교차성’의 개념을 활용하여 분석하는 부분이 빛난다. 기존의 노동시가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정형화되었음을 비판하면서 ‘노동시’라는 개념 자체를 발본적으로 재고할 필요를 거론한 대목도 경청할 만하다. 게다가 이런 당찬 논지를 펴면서도 김사이의 시들의 최근 지향이 명징하게 드러나게끔 글을 이끌어가는 비평적 배려도 돋보인다. 심사위원들은 장은영의 평론을 당선작으로 합의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상소감

 

각자의 시대

 

이정훈 李政勳 1967년 강원 평창 출생.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쏘가리, 호랑이』가 있다.

 

산 아래 작은 집에 소년이 살았다. 하루는 소가 끄는 수레가 집 앞에 와 멎었다. 수레 위엔 구척 거한(巨漢)이 비스듬히 누워 종아리가 땅에 끌릴 지경이다.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들렸으므로 소년은 바가지에 물을 떠 수레 옆으로 들고 간다. 소쿠리만 한 손이 바가지를 간장종지처럼 움켜쥐고 물을 들이켠다. 어찌 된 일인지 그에겐 한 팔이 없다. 다리 한쪽도 없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는 턱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대답한다.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네. 산 위는 바위 봉우리라 물이 없는데 어디서 물고기를 보겠다 하시며, 설혹 물이 있다 한들 그 몸으로 어떻게 날쌘 물고기를 잡겠습니까. 입에 작살을 물고 한 팔과 한 다리로 헤엄치면 된다네. 힘겹게 말을 잇는 입속엔 혀도 반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몇해 전 이런 꿈을 꾸었는데 수상 소식을 듣고 다시 그 꿈이 떠올랐다. 거한은 가망 없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소년은 내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를 비웃지도, 타이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꿈은 거한이 물을 마시고 다시 수레를 몰아 산 위쪽으로 떠나는 뒷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광부가 된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한다. 전조등 불빛 속으로 생겨나는 둥글고 긴 굴. 사람들은 내가 시멘트를 싣고 양회 공장과 레미콘 공장을 왔다 갔다 하는 줄 알지만 나는 자동차를 타고 빛으로 굴을 파다 집으로 돌아온다.

밤의 조수석은 누구, 혹은 무엇을 태우고 다니기에 알맞다. 물론 옆자리는 시동을 걸 때부터 끌 때까지 비어 있다. 그쪽을 향해 속삭이고 중얼거리다 때로는 대판 싸운다. 며칠 전엔 어느 공직자 후보의 “시대적 특혜”라는 말에 꽂혔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나 역시 시대의 특혜를 입었다. 단순하고 무식하며 과격한 시대엔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던지는 돌이 날아가는 곳에 적이 있다고 믿으면 그만이었다. 오래, 깊이 생각하는 게 부끄럽던 단무지의 시절.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고 세상은 변했으며 우린 늙는다. 젠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시대적 박탈’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통일, 자본, 외세 등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싸움은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밤의 어둠은 깊고 온화하고 간결하며 물렁물렁하다. 밤엔 갈증도 나지 않는다. 피부호흡을 하는 양서류처럼 살갗엔 어둠 속에서 수분이나 공기를 빨아들이는 세포가 있는 게 아닐까.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원래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고, 다 이해하고 용서해줄 것 같은 달도 별도 밤에 뜬다.

짧은 글 속에 몇명의 인물과 몇몇의 사건, 사물을 등장시켰다. 누가, 무엇이 시적인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으나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가장 시시한 장치인 건 확실하다. 그 별 볼 일 없는 인물에게 인사를 받아 무슨 광휘가 있을까만, 나라도 내 시의 모든 낱말과 문장을 대신해 인사해야 한다.

책을 들여다보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수상소감

 

어떤 안간힘

 

박상영 朴相映 1988년 대구 출생.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산문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등이 있다.

 

연작소설집의 표제작인 「대도시의 사랑법」은 뉴욕의 100년 된 호텔에서 쓰였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호텔은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라디에이터에서는 연신 덥고 건조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창밖의 거리는 신년을 맞아 기쁜 표정의 사람들로 북적댔다. 나는 호텔의 연식만큼이나 낡은 책상에 앉아 (마감 날짜를 지나쳐버린) 소설을 쓰고 있었다. 3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퇴직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떠나온 여행길에서조차 바깥 공기 한번 쐬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옆방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글도 안 써지는데) 누군가 경우 없이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놨구나 싶어 불쑥 화가 치밀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범상치 않은 솜씨로 직접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소리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음악 소리를 녹음해 1층으로 내려가 프런트 매니저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웃으며 “이곳이 카네기홀 근처라 종종 연주자들이 숙박하며 연습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원한다면 방을 바꿔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한 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매니저의 말을 들은 후여서 그런지(?) 음악 소리가 더이상 소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조금 감미롭기까지 해서 나란 사람의 이중성과 속물됨에 웃음이 나왔다.

연주는 두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같은 구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름 모를 연주자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일상의 잔근육과 어떤 안간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러자 비로소 관광 대신 노동을 하고 있는 내 신세가 억울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당당한 척 어깨를 펴고 있지만, 사실은 내면이 유약하고 겁이 많은 나는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내 몸의 가장 약하고 추악한 부분의 살점을 떼어다 저잣거리에 던져놓은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것은 『대도시의 사랑법』을 출간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책을 읽었다는 사람 앞에 서면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은 과장된 공포심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나와 세대도 계급도 성별도, 어쩌면 성적 지향조차도 다른 존재들이 내 소설을 읽고 이해해주고, 심지어는 좋아하기까지 해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열렬히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부해왔는데, 문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다고 뒤늦게 반성을 하게 됐다. 내게 문학이라는 것의 본질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깨닫게 해준 분들에게, 내 소설에 마음의 한 귀퉁이를 내어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일상의 나는 부족하지만, 소설을 쓸 때의 나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할 생각이다.

 

 

 

수상소감

 

연민과 애정의 세계로 몸을 기울이며

 

장은영 張恩暎 1975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집 『슬픔의 연대와 비평의 몫』이 있다.

 

작년에 첫 평론집을 냈는데, 기꺼이 책을 읽어준 한 비평가가 ‘나’라는 주어의 사용을 지적해주었다. 그러지 말라는 충고는 아니었지만 나만 알고 있는 습관을 들킨 기분이었다. 이번에 수상작이 된 글에서도 후반부에 ‘나’라는 주어가 유독 신경 쓰인다. ‘나’를 빼면 좀 매끈한 문장으로 다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 김사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오히려 내게 주어진 비평의 역할과 과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점을 밝혀야만 했다. 문학작품이나 시대적 상황을 두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문장을 쓴다고 해서 비평가가 전지적 시점에 위치한 존재는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은 의도도 섞여 있다. 얼굴을 내밀 자리가 아닌데 내민 것 같아 머쓱하지만 원고를 수정할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라는 주어 앞에서 오래 고민할 것이고 결국은 쓰게 될 것 같다.

학술 논문이나 공적인 글에서 일인칭 주어를 금기시하는 건 글쓰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 합의이고, 이 합의는 비평에도 적용된다. 일인칭 주어의 남발은 객관성을 잃은 아마추어리즘의 소산이거나 과잉된 자아의 치기로 보일 수도 있다. 일인칭 주어 기피 현상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지금 우리 시대의 비평적 글쓰기에서 ‘나’는 노련하게 가려 써야 하는 주어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나’라는 주어를 포기하지 못한 데는 나름의 변명이 있다. 등단한 해에 겪은 세월호사건 이후의 문학작품을 읽고 쓰면서 ‘나’를 빼놓고 글을 쓰기 어려웠다. 나를 지배하는 감정을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거나 논리적인 것처럼 설명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고, 비평가로서 날카로운 지성과 객관적 분석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대신 글을 읽고 쓰는 자로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기쁨과 희열이 민감한 비평의 촉수가 되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마음에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말처럼 ‘나’라는 것이 집합적 마음의 레짐(regime)을 통해 만들어진 주체라면, 일인칭 주어 ‘나’는 타인의 세계인 공동체와 내가 연결될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그런 주어 ‘나’의 가능성을 믿고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타인이 말을 걸어올 때, 그것에 응답하고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 실패해왔고 지금도 실패한다. 미숙한 독백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더, 많이 읽고 깊이 사유하고 섬세하게 문장을 정련해야 한다는 상투적이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를 쌓아둔 형편이다.

얼마 전 한 재소자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우연히 내가 쓴 짧은 글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어떻게 답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러다가 신동엽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과분하고 감격스러운 소식 앞에서 어리둥절한 시간을 한참 보낸 후에야 누군지 모르는 그에게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당도한 재소자의 편지와 수상 소식은 글을 쓰는 일이 타인과 나누는 대화라는 걸 분명히 실감하게 해준 사건들이다. 멸망한 행성에 남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보낸 무전에 응답이 온 것처럼 어색하고 놀라우면서도 감격스러웠다.

문학이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라고 말한 신동엽 시인은 문학을 “연민과 애정의 세계”(「선우휘씨의 홍두깨」)라고 결론지었다. 또다른 글에서 세계에의 참여란 이웃에 대한 애정과 성실성에서 비롯한다고도 쓴 걸 보면 시인에게 문학은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용기를 내서 연민과 애정의 세계에 동참하고자 발을 내디딘다. 창작과 더불어 비평 역시 연민과 애정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 믿는다. 수상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신동엽 시인을 모르시지만 아마도 이제부터 궁금해하실 것이다. 시집을 사드리려고 한다. 내가 책상에 앉아 무얼 읽는지, 무얼 쓰는지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아는 남편이 근사한 저녁을 사주었다. 상을 받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부족한 글에서 진심을 발견해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리며 연민과 애정의 세계로서의 비평을 모색하며 삼십년은 거뜬히 정진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