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 제9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환(幻)의 순간, 초월의 문턱

최정례론

 

 

강계숙 姜桂淑

1973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현재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thoth73@freechal.com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존재의 근원적 비밀에 대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 영혼의 궁극적 깊이는 시간의 근원적 깊이”라고 말한 토마스 만의 예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삶의 조건이자 사회적 리듬의 형식임을, 또한 경험과 행동에서 비롯된 지적 구성물이자 내적 존재형식임을 알고 있다. 특히 자아 내부에서 체험되는 시간의 지속양상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는 세계에 대한 자아의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세계와 우주, 자아와 대상 간의 관계를 사고하는 근저에 어떤 시간관이 놓여 있는가에 따라 문명의 특징과 사회의 구조가 형성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시간이 기계적 분절 단위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공동리듬은 균등화되었고, 삶의 이질성과 고유성을 허용하지 않는 표준화된 패턴이 강요되었으며, 그 결과 효율성과 동질성만을 최우선시하는 오늘날의 문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고찰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숙고이자 성찰이기도 하다.

시간의식이 이렇듯 존재의 내적 구성물이자 체험 인식의 주요 원리라는 점에 관심을 두고, 이를 시작(詩作)의 중심 화두로 내세우는 시인이 있다. 서정시의 장르적 본질 중 하나는 시적 ‘순간’에의 몰입을 통해 세계와의 합일을 성취하고,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한 시간체험을 ‘영원한 현재’로 통합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성의 화해와 자기동일성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이때 서정시의 시간은 계기적이고 연대기적인 현세의 시간을 시적 ‘순간’이라는 심미적·상상적 시간에 의해 해체하는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서정시를 형성하는 시적 상상력 속에는 ‘시간(순간) 안에서 시간(자연사)을 극복’하려는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1 ‘시간 안에서의 시간 초월’이라는 이러한 역설적 상상력으로 존재의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형이상학적 열정을 육화시킨 또다른 개성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1990년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2을 상재한 최정례(崔正禮)가 바로 그같은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소재의 특이성이나 시형식의 파괴 등을 통해 일회적인 충격효과를 의도하는 시들과 거리가 멀며, 정신주의를 표방하면서 달관과 관조의 자세를 유지하는 작품들과도 다르다. 그의 시선은 ‘빨간 다라이’ ‘보푸라기’ ‘돌멩이’ ‘파헤쳐진 흙’ 등에 닿아 있다. 그의 손끝을 거치면서 이 별볼일 없는 미천한 사물들은 거대한 시간의 누적을 숨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간결하게 절제된 언어와 명징한 이미지들은 지리멸렬한 살림살이들을 고전적인 투명성의 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 투명성은 일의성을 거부한다. 다의적인 모호성을 거느린 그의 시적 언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간섭해 들어오는 과거의 거대한 지층이 투시될 때 비로소 존재 전체가 드러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시인의 입을 빌려 현재화되는 ‘장난감 기차’와 ‘장롱’들은 자기들만의 역사와 ‘시간의 호수’를 품고 시의 땅에 영원의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최정례의 시는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지적 탐색을 통해 최근 우리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두고 온 푸른 사과

 

‘지금 여기’에서의 결여는 없는 것, 빈 것의 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욕망의 대상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 가방 속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할 때 난감함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감지된 그 무엇의 부재가 삶에 치명적인 균열을 초래한다면 사태는 자못 심각해진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본 노점에서 예측 불허의 파국이 시작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푸른 사과’로부터 생이 어긋나고 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사소한 우연에 의해 안전하다고 여겨진 삶의 질서가 방향 없는 혼돈으로 이끌리는 것, 삶의 그러한 나약함과 불완전성이야말로 존재의 원초적 한계이기도 하다.

 

버스가 거기 섰기 때문에 노점의 푸른 사과가 내게로 왔다

여름도 다 가고 한물간 수박 곁에서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았기 때문에 푸른 사과는 한층 푸르고

배꼽 부분은 부드럽게 패인 채 나를 향하고 있었다

(…)

푸른 사과는 내가 저를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아직 그 정거장 좌판 위에 서 있을 것이다

한없이 기다리다 지쳤기 때문에 푸른 사과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누군가의 손에 매달려 갈 것이다

참 이상하고 짧은 불꽃이

한달간 밥을 먹지 못한 이 여름이

언제 올지 모르고 가고 있었다

푸른 배꼽 속으로 뛰어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내려서 푸른 사과에게 갈 수가 없었다 이상한 버스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푸른 사과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푸른 사과」(『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부분

 

이 시는 이지(理智)의 영향권을 벗어나 어떤 구체적 대상(푸른 사과) 속에 감춰져 있던 기원(起源)의 상이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우연을 통해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푸른 사과’는 간절한 희구의 대상 혹은 영혼의 내밀한 동반자를 암시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각된 자기 생의 기원을 상징한다. 그것은 잠재된 기억의 얼음 바다를 부수는 한자루의 도끼이다. 도끼날로 조각난 바다는 정해진 노선의 ‘버스’와 그것에 의지한 삶을 향해 위태롭게 넘실댄다. ‘푸른 사과’가 내면적 관심사가 되고, 그 “푸른 배꼽 속으로 뛰어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게 된 이상,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평온한 삶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버스’가 된다.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전할 수 없게 된 말을 가슴에 담은 채 안타까워한다.

기원을 잊은 자에게, 기원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 과거는 현재화될 역동성을 상실한 부재의 공간이다. 과거와의 연속성을 보장받지 못한 현재는 그 결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실의 순간이 된다. 근원에 대한 망각이 도저한 시간의 강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무의미의 정지상태로 만

  1. 최문규 「역사성+심미성으로서의 <순간>」, 『탈현대성과 문학의 이해』, 민음사 1996, 166〜76면 참조.
  2.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민음사 1994; 『햇빛 속에 호랑이』, 세계사 1998; 『붉은 밭』, 창작과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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