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 『늑대』 『국경을 넘는 일』 『매향(埋香)』,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음.
jstroot@hanmail.net
조용한 생활
퇴근 전 책상을 정리하다가 준모는 그 메모지를 발견했다. 그는 금세 메모를 알아봤고 낭패감이 들었다. 나흘 전 집주인 노인이 안긴 것이었다. 은행 봉투를 재활용한 메모지는 교양과목 수강생들의 과제물 밑에서 나왔다. 사인펜 글씨로 ‘李喆鎬(煥)?’과 함께 ‘1937?’ 하고 연도가 쓰여 있었다. 물음표들은 준모 자신이 직접 적어 넣은 것이기도 했다.
허노인이 이층으로 몸소 올라와 준모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노인은 너른 이마 위에다가 돋보기를 올려놓고 서 있었다. 조간신문을 구독하는 노인을 아침이면 같은 모습으로 마당에서 맞닥뜨릴 때가 있었다.
“김교수, 출근하나베?”
문 앞에 서서 노인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준모는 노인을 양옥의 바깥 베란다에 잠시 세워두었다. 그는 세탁소에 맡길 겨울 외투까지 챙겨 들고 나섰다. 홍매화가 끝물이라 밤새 꽃잎이 베란다로 날아와 흩어져 있었다. 준모는 무의식적으로 꽃잎을 피해 발을 디뎠다. 자연스럽게 계단 쪽으로 두어걸음 노인을 이끌게 되었고, 바쁜 티를 냈던 모양이다.
“바쁜 사람 붙들고 있을 수 없응께 거두절미하고……”
노인은 사람 하나를 찾아달라고 했다. ‘이철호’ 혹은 ‘이철환’이라는 이가 준모가 몸담은 대학의 전신인 농업학교에 다녔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승주 주암 쪽 사람이라고 했다. 일제 때 학적부에서 학생 하나를 찾아달라는 소리였는데 준모는 아득한 일처럼 여겨졌다. 임용되고 첫 학기라 학교는 낯선 것투성이였다. 이런 걸 알아내려면 어느 부서에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남의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농업학교를 다녔다고요? 1937년에?”
“딱 그해라고 장담은 못해. 그 어름쯤 되겠다는 거제.”
얼추 백수에 다다랐을 그 사람이 살아 있을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러니까 사람을 찾는다기보다 1937년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존재했을 한 사람의 흔적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노인이 준모의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졸업도 그렇구먼. 인저 거길 댕겠다, 그런 증언만 들었다는 거제 졸업장을 땄는지 그건 몰겄다대.”
여전히 허노인이 하는 말은 앞뒤가 없었다. 남 이야기를 전하는 말투며 누가 누구에게 들었다는 건지, 그래서 그 사람을 찾는 당자가 누구라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이 바쁜 티를 내서 그런 게 아니라 노인이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올라왔는지 몰랐다. 그래도 부탁하는 입장에서 왜 그 사람을 찾는지 최소한 연유는 밝혀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저 심부름만 해달라는 식이라면 곤란했다. 그로 인해 준모가 불편해하는 걸 노인도 빤히 아는 듯싶었다. 말끝마다 자기 사정도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지었다. 준모는 외투를 빨래건조대에 걸쳐 두며 되뇌었다.
“졸업 여부도 정확지 않고…… 성함이 호(鎬)일 수도 있고 환(煥)일 수 있고……”
그럼에도 노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별 대꾸가 없었다.
“등본 같은 걸 떼보면 성함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텐데요.”
“오죽 답답했으면 인저 학교 서류를 뒤져볼 맘을 묵었겄어.”
지금껏 해볼 만한 건 다 해보았다는 눈치였다. 말을 보탤수록 의문만 커져가는 대화를 더 이을 필요가 있을까. 출근시간이 빠듯해지고 있었다. 세탁소도 들러야 하고, 교내 복삿집에 제본 맡겨놓은 것도 찾아야 했다.
“요새는 개인정보보호법이다 뭐다 해서 학적부 같은 걸 함부로 열람시켜 줄지 모르겠어요.”
하고 준모는 한발 빼면서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노인이 우물우물 답답한 속내를 내놓았다.
“여순 그거 있잖은가베?”
“여순사건이요?”
“그려. 그거 신고하려는 거여.”
준모는 노인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주위를 살피며 어찌나 비밀스럽게 얘기를 하는지 준모는 하마터면 제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어쨌든 노인은 이 일이 아주 사적인 일만은 아니니만큼 당신이 도와줬으면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준모는 압박감을 느꼈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고 한해 기한으로 피해신고 접수가 진행 중이었다. 시내 곳곳에 신고하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신고가 지지부진하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해 태어난 이가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을 세월이니 학살을 목격한 사람이나 유족이 얼마나 생존해 있을까 싶었다. 당장 허노인도 그 시절에는 아주 어려서 부재한 사람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1948년 일이라면 노인이나 준모나 어떤 실감도 없다는 점에서 같은 처지였다.
“무담시 김교수한테 부담을 지우네. 안 되믄 어짤 수 없지만서두 이참에 이름 석자라도 속 시원히 알아냈음 좋겄구먼.”
그러니까 노인이 찾고자 하는 건 한 사람의 정확한 이름이었다. 준모가 추측건대 여순사건 피해자 신고를 하려는데 희생자의 이름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주민등록부로 확인이 되지 않는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희생자가 노인의 먼 친척인 걸까? 성씨가 다른 걸 보면 외가 쪽인지도 몰랐다. 집안에서만 은밀하게 전수된 비밀들이 칠십삼년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그러나 이렇듯 불투명하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걸까.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얘기든 조심하려는 노인의 태도가 낯선 건 아니었다. 준모도 어린 시절에 이 지방에서 자랐다. 공포가 내면화되고 침묵이 일상화된 공기가 어떤 것인지 알았다. 세상이 언제 또 뒤집힐 줄 몰라 본능적으로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가 많았다.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움츠리는 모습이 준모로서는 지나쳐 보였다. 피해자들의 두려움이 그대로 유전되고 있다고 보일 정도여서 거짓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두려움이 지금도 엄연히 실체를 갖고 살아 있는 건 사실이었다.
준모는 문득 노인이 사건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준모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러니까 나는 너를 아직 모른다는 경계심에 이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준모는 노인에게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출근길에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지 못하고 저녁에 맡겼다. 준모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울산과 창원에서 보낸 연구소 생활까지 포함해서 칠년째였다. 아내가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두 아이가 커가면서 가족을 이끌고 다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세탁물을 싸 들고 대전의 본가로 가져갔다. 그러다 이내 번거로워져서 손수 빨거나 세탁소에 맡겼다. 그랬더니 이곳 집에는 옷가지들이 쌓여가고 본가의 장롱은 점점 비어갔다. 본가에 변변하게 갈아입을 계절 옷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본가의 살림에서 그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원로교수들은 웬만하면 가족을 불러내서 함께 살라고 했다. 교수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가족 곁으로 가는 일이 편치 않아 여전히 이곳에 방을 잡아 주말부부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세탁소는 초등학교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낡은 단층건물에는 세탁소와 함께 이발소와 문구점이 있었다. 얼핏 보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세트장을 연상케 했다. 노부부가 세탁과 수선을 함께 했다. 세탁물을 받으면 할머니가 옆 문구점에서 구했을 성싶은 초등학생용 공책에 세탁 물목과 함께 맡긴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언제까지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 옆에다가 요일을 적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할머니가 없을 때는 할아버지가 세탁물을 받았는데 그는 세탁 물목을 기록하지 않았다. 모든 게 여기에 입력된다고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곤 했다. 아마 할아버지는 문맹인 듯싶었다. 세탁소는 후불제인데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첫 거래 때 하도 황당해서 준모는 요새 세상에 카드를 거부하는 세탁소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다. 할아버지는 태연하게 소상공인인 걸 내세웠다. 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