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영하 金英夏

1968년 경북 고령 출생. 1995년 『리뷰』로 등단. 소설집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이 있음. timemuseum@lycos.co.kr

 

 

 

 

 

1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을 때우려 집어든 영화 홍보물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조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강렬한 맛이 있었다. 조는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몇번이나 그 문장을 읊조렸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팝콘을 튀기는 냄새가 풍겨왔다. 극장의 어두운 구석엔 거대한 팝콘 봉지를 들고 우적우적 팝콘을 씹어삼키는 사람들이 보였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들에게 비만, 체지방 과다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탄수화물과 지방질의 섭취를 줄이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시오! 죄의식과 싸우며 팝콘을 먹는 자들과 멀리 떨어진 곳엔 건강과 매력을 자신하는 청춘들이 시계를 보며 영화 시작시간을 기다린다. 엉덩이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청바지, 가슴선을 강조하는 최신형 브래지어를 한 여자들 옆엔 멋지게 머리를 빗어넘긴 남자들이 발끝으로 대리석 바닥을 툭툭 차고 있다. 아직 영화가 시작되려면 이십분이나 남았다. 이십분 동안 그들 중 대부분은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곤 몇시간 후 표백제 냄새 풍기는 여관방 침대에서 몸을 섞게 될 남자 혹은 여자, 지금 바로 옆에서 팝콘을 먹고 있는 바로 그 남자 혹은 여자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잠시, 아주 잠시나마 품게 될 것이다. 혹시, 이 남자(혹은 여자) 때문에 내가 타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회복 불능으로 타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해버린 누군가를, 그런 줄도 모른 채 너무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2

 

휴일의 백화점은 국경도시처럼 어지럽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들이 울고 소매치기 일당이 눈먼 지갑을 노린다.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치솟고 진열된 상품들에서 뿜어져나오는 화학물질 때문에 눈이 따갑다. 이렇게 모두가 괴로워하는 휴일, 그것도 바겐쎄일 중인 백화점에서 홀로 즐거운 사람이 있다. 바로 조다. 조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매장과 매장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이딸리아제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쥐색 양복까지 걸친 그는, 어찌 보면 고액 연봉의 쌜러리맨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기업체 중역의 운전기사 같아 보이기도 한다. 별 특징 없는 얼굴과 헤어스타일, 옷차림의 그는 우리 안의 코끼리처럼 느긋하게 1층 잡화매장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얀 가운을 입은 끌리니끄 매장의 김이 눈인사를 해온다. 조 역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난해 여상을 졸업하고 화장품회사에 취직한 갓스물의 청춘이다. 다리가 길고 예쁘니 모델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지만 월급 받는 게 좋아 회사생활을 시작했다는 여자다. 지난달로 카드빚이 천만원을 넘어섰다. 신용카드 일곱 장으로 돌려막고 있지만 화장품 판매원 수입으론 좀 힘들 것이다. 차는 국민차인데 키홀더는 구찌 제품을 쓰고 있고 반지하방에 살면서도 정장은 프라다를 입는다. 매장에 서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저 다리를 높이 평가해줄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겠지. 아마 그 세계는 월급이 아닌 다른 급여체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조는 씩 웃는다. 씩 웃으면서도 그의 눈길은 날카롭게 매장 곳곳을 살피고 있다.

구두매장의 또다른 김, 여자 고객의 발에 구두를 신기다 조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눈빛이 흔들린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 때문에 엉덩이가 튀어나와 오리처럼 보인다. 유니폼 상의가 짧아 허리의 맨살이 드러난다. 김은 조의 눈길이 그곳을 훑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오른손으로 애써 상의를 끌어내려 드러난 맨살을 가린다. 그럼 이걸로 드릴까요? 생긋 웃으며 아양을 떨어보지만 이십대 후반의 손님은 대꾸 없이 바로 매장을 나선다. 다소 맥빠진 얼굴로 김, 지나가는 조를 노려본다. 백화점에 들어오기 전엔 여행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빠리에 갈 때마다 사온 에펠탑 미니어처가 한 다스가 되던 날,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에펠탑이 보기 싫어 언제나 에펠탑 밑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는 작가 얘기도, 그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도 도합 열두 번을 한 셈이다. 구두매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무엇보다 구두는 말을 안 시킨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뿐더러 불평도 없다. 손님들은 이 구두 저 구두에 발을 넣어보다 마음에 드는 걸 집어들고 계산을 한다. 그러곤 굿바이.

구두매장의 김은 카드빚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백화점 지하 은행에 적금을 붓고 있다. 남자친구가 회사 공금을 횡령해 홍콩으로 도주한 후로는 남자관계가 없다. 남자친구 회사에서 고용한 자들만이 가끔 찾아와 도망자의 행방을 묻곤 한다.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만 김은 정말이지 성실하게 살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가끔 억울해할 수도 있을 텐데 김은 흔들리지 않는다. 김은 조도 그들과 한패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언젠가 김은 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관계가 있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요? 그 새끼는 잊은 지 오래라구요.

조의 발걸음은 천천히 시계매장으로 향하고 있다. 티타늄과 금, 스테인리스 스틸이 일제히 빛을 퉁겨내는 유리 진열장 너머에 그녀, 정이 서 있다. 정은 아름다운 여자다. 보기 드물게 맑은 눈동자, 부드러운 목선, 그리고 유니폼에 어울리는,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담하고 탱탱한 엉덩이 아래로 쪽 곧은 다리가 우아하게 그녀를 떠받치고 있다. 가슴은 작지만 그것 때문에 더 새침해 보인다. 장인의 손길을 거친 가죽제품처럼 그녀의 몸에선 유혹적인 기품이 우러나왔다. 검은색 샤넬 슈트를 입혀 티파니 매장에 세워놓으면 딱 어울릴 여자였다. 구두매장의 김은 정을 부러워한다. 시계매장에선 쪼그려 앉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조가 다가가도 정의 표정엔 변함이 없다. 그저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다.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려는 중년여성에게 스포츠 시계를 꺼내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시계에 묻은 지문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고 있다. 조는 발걸음을 멈추고 정을 바라본다. 정은 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조는 씩 웃는다. 그는 지금 정의 가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예술품인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도 궁핍하다는 사실이 그를 흐뭇하게 한다. 또스까나산 양가죽 코트를 해입는 것도 아니고 여름마다 해외 리조트를 순례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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