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존경하는 벗 김종철 형을 보내며

 

 

정지창 鄭址昶

전 영남대 독문과 교수. 저서 『서사극·마당극·민족극』 『호르바트의 민중극』 『오늘도 걷는다마는』, 역서 『상어가 사람이라면』 등이 있음.

piscator@hanmail.net

 

 

내가 김종철(金鍾哲, 1947~2020) 형을 처음 만난 것은 년대 후반 ‘청년사’라는 출판사를 드나들던 이들이 어울리던 술자리에서였다. 청년사와는 관계가 없던 그와 안면을 튼 것이 그의 절친인 화가 오윤 형을 통해서였는지 아니면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최민 형을 통해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술자리가 파하자 초면인데도 그가 마음에 든 나는 우리 집으로 가자고 그를 잡아끌었다. 맘에 드는 친구를 막무가내로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오윤 형의 버릇이었는데 어설프게 나도 그런 흉내를 내본 것이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못 가겠다고 사양하더니 내가 자꾸 권하자 “실은 아버지가 올라오신다 캐서……” 하고 쑥스러운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아들 보러 상경할 아버지가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아버님을 뵌 것은 1984년 내가 영남대로 자리를 옮겨 그의 직장 동료가 된 몇년 후였다. 당시 김종철 형은 갑상선 종양으로 고생을 하다가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입원하는 날 선배인 박현수 교수와 함께 그의 아버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다. 아들처럼 좀 여위고 껑충한 아버님은 입원실로 아들을 들여보낸 다음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셨다. “별일이 없어야 할 낀데…… 종철이는 막내라서 유난히 맴이 켕긴다카이.”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종양은 양성으로 밝혀졌지만 그때까지 몇달 동안 연로한 그의 아버님은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하신 것 같다. 후일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그는 ‘학생 김해 김공 ○○의 묘’라고 새겨 넣은 묘석을 주문하여 공원묘원에 미리 준비해놓았다. 형님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묘석에 십자가와 함께 ‘성도 ○○○의 묘’라고 새길 것이 뻔했는데, 막내아들에게는 그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아버지가 평생 배우고 익히기를 좋아한 ‘학생’이었다면서, 대학원에 다니는 한문 전공 학생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종철 형 자신도 사후에 영문학자나 문학평론가 같은 구차스러운 명칭이나, 생태사상가, 녹색운동가 같은 낯선 이름보다는 그냥 ‘학생’으로 불러주기를 원했을 것 같다. 필요할 때면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새로운 분야의 공부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전문가적 수준에 도달하는 그의 열정과 집중력이 바로 그가 추구했던 ‘학생’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그가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그는 평생 ‘학생’으로 살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다 갔다.

 

김종철 형이 문학평론에서 생태·환경 쪽으로 관심이 기운 것은 1983년부터 1년간 미국에 갔다 온 다음부터였다. 그는 독일의 68학생운동 지도자인 루돌프 바로(Rudolf Bahro)가 쓴 『적색에서 녹색으로』(From Red to Green)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정치투쟁도 중요하지만 자기로서는 탐욕스러운 서구문명으로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은 그가 보기에 관념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사구체’가 콩팥 같은 장기의 일부인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의 악동 같은 표정이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갑상선 종양으로 건강 문제에 민감해진 그는 기존의 서양 의학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서 일본어를 익혀 주로 일본의 대체의학 서적들을 탐독했는데, 곧 문학작품과 생태학 책들도 열심히 읽고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곤 하였다. 그의 일본어 독해력은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본어를 익힌 박현수 교수도 감탄할 정도였다. 구하기 힘든 일본 책을 읽고 신이 나서 ‘썰을 푸는’ 그를 보고 박교수는 “사실은 나보다 김종철이 더 친일파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타나까 쇼오조오(田中正造)나 토다 키요시(戶田淸), 이시무레 미찌꼬(石牟禮道子) 같은 일본의 선구적인 생태론자들을 알게 되었다.

1990년 1월부터 천규석 선생을 중심으로 대구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의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이 열렸는데 김종철 형은 누구보다 열심히 여기에 참여했고 적지 않은 출자금을 내놓았다. 1995년 공생농두레 농장이 설립될 때도 거액의 투자금을 내놓아 천선생을 놀라게 했고 나중에 농장을 정리해 출자금을 돌려줄 때 그는 처음부터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다면서 받지 않았다. 까칠한 성격으로는 난형난제인 두 사람은 소농 중심의 농본주의를 굳게 믿은 평생 동지였다.

 

김종철 형이 『녹색평론』을 내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1991년 여름 농민들이 돈이 되지 않는다고 보리밭을 불태운 사건이었다. 그는 후에 이때의 충격이 어떻게 『녹색평론』의 창간으로 이어졌는지 밝힌 적이 있다. “그때 굉장히 놀랐다. 나는 경제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경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다 지어놓은 농사도 뒤집고 불태우는 것은 엄청난 불경 아닌가. 물론 농민들의 잘못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어난 구조적 문제다. 그러나 보릿고개를 경험해본 분들에게 보리밭을 태운다는 것은 절망적이고, 세상이 끝장났다는 충격적인 경험이고, 환경 파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가 막히고 인간성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이래가지고는 인간다운 삶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런 얘기를 ‘해인’ 지에 썼다. 그랬더니 이화여대 이남덕 교수가 편지를 써 왔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라도 지식인 사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고 했더니, 100만원을 부쳐 왔다. 그 일을 당장 시작하라고 했다. 결국 이남덕 선생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저보다 더 마음이 절박했던 것 같다.”(한겨레 2008.11.26.)

잡지를 만들려니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잡지를 내줄 출판사를 찾는 것이었다. 그를 아끼던 영남대 김기동 총장이 학교 출판부에서 내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총장의 생각이야 어떻든, 대학은 김종철 형 같은 자유인이 활개를 펴기에는 너무도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은 백낙청 선생이 편집에 일절 간섭하지 않을 테니 창작과비평사에서 잡지를 내면 어떠냐고 제안했고, 친구들은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그는 고심 끝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쪽을 택했다. “백선생은 편집에 간섭하지 않겠지만, 내가 백선생 눈치를 볼 것 같아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는 역시 김종철답다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잡지는 김종철 형 본인이 출판사를 차려 직접 편집과 발행, 판매를 도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돈 문제는 처음부터 그에게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뒤늦게 대학에 자리 잡은 부인에게 살림을 맡기고 자기 월급은 잡지 만드는 데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친구들은 잡지를 계간으로 내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는데, 김종철 형은 그러면 시의성과 현장감이 떨어진다면서 격월간을 고집했다.

1991년 11월 소박하지만 참신한 창간호가 나왔을 때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창간사와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는 한국의 생태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다. 이 글은 후에 서울대 입학시험의 지문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들은 인디언 추장의 소박한 연설에서 생태학의 핵심사상을 발견하였고 자연과 교감하는 시인의 감성을 느꼈다. 나는 그후 ‘문학과 현대사상’이라는 교양과목 수업 때 언제나 이 두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했다.

창간호에 실린 김종철 형의 글 「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는 1991년 7월 대구에서 발행되는 교양지 『문화비평』 주최의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있었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만물을 형제로 보는 인디언들의 시적 감수성이야말로 생명존중사상의 바탕임을 강조하면서 김현승 시인의 「무등다(無等茶)」를 예로 들어 시인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자연을 보듬고 살리는 힘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북극의 빙하를 녹여 인류의 산업복지를 위해 이용하자는 영국 철학자 러셀의 제안을 김범부 선생이 ‘태양계의 약속’을 어기는, 즉 자연계의 질서에 반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판한 사실을 또다른 예로 든다. 이로 보아 그는 김범부 선생의 「음양론」 같은 구하기 힘든 저술도 꼼꼼하게 읽고 소화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이 강연을 하게 된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 박근혜씨가 입시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다음 해인 1989년 영남대는 전국 최초로 교수들의 직선제 투표로 총장을 선출했는데, 김종철 형은 우리가 미는 민주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국문과 교수 모씨를 설득하다가 표를 줄 테니 그 대신 잡지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후 차일피일 원고를 미루다가 결국 강연으로 빚을 갚은 셈인데, 이러한 ‘은밀한 거래’ 때문에 ‘시의 마음’을 생태주의의 본질로 파악한 독창적인 생태학 담론이 태어났으니 인과 연의 얽히고설킨 가닥을 인간의 눈으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1998년 충치 예방을 위해 수돗물에 불소를 타서 가정에 공급하는 방안을 몇몇 지자체에서 추진하자 『녹색평론』은 수돗물 불소화 반대운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그는 낯선 치의학과 불소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느라 생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문외한인 영문과 교수가 불소 문제에 대해 뭘 알겠느냐고 대놓고 무시하는 치과의사들과의 논쟁에서도 과학적 근거와 최신 정보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불소화의 위험을 알리며 이를 막기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고, 국회에도 찾아가고,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하고, 공개토론회에도 참석하는 등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과학적 논거보다 “불소가 아무리 충치 예방에 좋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먹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녹색평론』의 소박한 주장에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수돗물 불소화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런 현장운동의 경험을 쌓으면서 그는 4대강 사업이나 핵발전소 증설 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때 이른바 전문가 집단의 권위에 당당히 맞서 건전한 시민의 양식과 해외의 생태학 정보를 앞세워 더욱 치열하게 싸우고 설득하고 알리는 시민운동가와 생태사상의 전도사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2012년 녹색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녹색당 전임 강사’의 일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김종철 형을 근본주의적인 녹색사상가나 생태주의 이론가라고 부른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형은 사상가나 이론가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녹색평론』은 단순한 문필활동의 공간이 아니라 녹색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매체로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녹색평론』은 그가 가진 모든 지적 자산과 영적 재능을 요구하였고 그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했다. 뛰어난 글재주와 말솜씨, 마산의 바닷바람 속에서 키워온 ‘깡다구’와 고집,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렸을 적 진동의 외갓집에서 경험했던 농촌공동체의 따뜻하고 자족적인 삶에 대한 기억과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천성적인 공감능력, 더불어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모성의 원천이라는 순정한 문학청년의 믿음까지 그는 남김없이 『녹색평론』에 쏟아부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각종 신문들을 샅샅이 읽고, 인터넷으로 국내외 뉴스를 점검하고, 그가 정기구독하는 국내외 잡지와 소식지들을 훑어보는 데만 몇시간을 보냈다. 부지런한 언론사 편집국장이나 논설위원보다 힘겨운 일과를 그는 30년 동안 계속했다. 게다가 어떤 쟁점과 의제로 『녹색평론』의 특집과 기획기사를 꾸밀 것인지 늘 머릿속으로 구상하면서 적당한 필자를 구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고, 매호 권두언(‘책을 내면서’)과 함께 한두 꼭지의 글을 쓰거나 해외 필자의 글을 번역해서 싣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대구 시절에는 1주일에 9시간씩 대학 강의를 하면서 잡지를 만들어내고 부지런히 전국 각지로 강연을 다녔다.

그는 『녹색평론』을 시작하면서 온갖 일을 다 겪었는데, 세금 문제로 공무원들과 옥신각신할 줄은 몰랐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터무니없는 종합소득세가 나와서 세무서에 찾아가 따졌더니 대학교수 월급과 출판사 경영으로 벌어들일 예상수익을 합산하여 누진세율이 적용된 것이라고 해명하기에, 『녹색평론』이 돈이 되는 잡지가 아니고 오히려 자기 월급을 털어 잡지를 낸다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통하지 않더란다. 그래도 자기처럼 대학교수 월급 받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도 없으니 세금 좀더 내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려고 그렇게 체념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년 그는 해외의 저명한 생태사상가들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세기 사상 강좌’를 기획했다. 당시 대학본부의 보직교수로서 재정지원을 얻어내는 데 약간의 힘을 보탠 나는 그해 가을 건강이 나빠져 보직을 사퇴한 다음 학교 일보다는 몸을 돌보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강좌는 년 월부터 시작되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두번째 강좌가 끝난 다음 대학본부에서, 꾀죄죄한 강사들에게 왜 그리 비싼 강사료를 주었느냐, 플래카드를 왜 많이 걸었느냐, 행사 진행을 도와준 대학원생들에게 왜 수고비를 주었느냐 따위를 꼬치꼬치 따지며 제동을 걸었다. 그런 예산 내역은 이미 기획안에 포함되어 승인을 받은 것이었음에도 사후에 문제를 삼은 것이었다. 소탈한 외모와는 달리 강사들이 얼마나 훌륭한 학자들인지 그들의 저서를 잔뜩 싸들고 가서 대학 당국자를 설득하던 김종철 형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장풍’을 날리고 만다. 다른 것은 꾹 참았는데, 명색이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수고비 몇푼 준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그는 나중에 털어놓았다. ‘장풍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그는 무협지에 등장하는 강호의 협객처럼 유명해졌는데, 그 본질은 교육을 인적 자원의 수요 공급 차원으로 보는(‘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이 이를 드러낸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은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 삭막한, 이해타산이 지배하는 시장바닥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국 년 미련 없이 대학을 떠나 『녹색평론』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의 글에는 녹색사상가와 인문학적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넘치지만, 생태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은 누추한 일상에 부대끼면서 낯선 길을 한걸음 한걸음 헤쳐나가는 힘겨운 고행의 연속이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주변 친구들도 잡지 편집에 주제넘게 뭐라고 참견할 수는 없고, 가끔 만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기자나 공무원들을 만날 때마다 대구에서 발간되는 『녹색평론』이라는 정말 소중한 잡지가 있는데, 대구 사람들이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가 년 사무실을 서울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속으로는 좀 서운했지만 잡지를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철 형의 녹색사상을 흔히 녹색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경제성장을 전제로 한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그의 단호한 태도는 비타협적인 원리주의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소농 중심의 농본사회와 ‘자발적 가난’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나는 그의 녹색사상이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좀 불편하더라도 같이 돕고 살자는 농민들의 소박한 생명사상이라고 본다. 이런 근본주의적 생명사상은 흰 바탕색 같아서 여기에 비추어보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반도체나 자동차를 수출하려면 우리 쌀이 남아도는데도 미국 쌀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무역체제는 “안 사 먹겠다는데 억지로 사 먹으라는 건 무슨 경우여!”라는 농민의 소박한 항변을 들어보아야 그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인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김종철 형은 이런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여는 것이 바로 녹색운동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처음에는 낯설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대안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적인 정책으로 채택되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경험해왔다. 신분제의 철폐와 여성의 참정권,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보험제 같은 것은 백년 전만 해도 비현실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녹색평론』에서 제시한 낯선 대안들, 가령 자동차 버리고 자전거 타기, 지역화폐와 기본소득,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숙의제 민주주의, 국회의원과 공직자를 추첨제로 선출하기, 농민기본소득제로 농촌과 농민 살리기 등은 처음에는 과격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친숙하고 실현 가능성 있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글에서는 단호한 원칙론자인 김종철 형은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좀 순진하고 허술한 사람이었다. 처음 잡지 일을 시작할 때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컴퓨터와 에어컨을 거부하고 한증막 같은 사무실에서 선풍기로 버티더니, 얼마 후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야만 최신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메일로 국내외의 필자들과 소통하니 그렇게 편할 수 없다면서 진작에 컴퓨터를 쓸 걸 그랬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를 원칙론자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고 한동안 에어컨은 거부했는데, 어느 해인가 대구에 살인적인 폭염이 계속되자 선풍기만으로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다면서 드디어 에어컨을 들여놓았다.

그는 의외로 음식에는 까탈스럽지 않았고, 마누라나 아이들이 없을 때는 몰래 라면도 끓여 먹는, 우리처럼 의지력이 박약한 소시민이었다. 소싯적에는 오윤과 김재환, 최명옥 같은 풍류가객들과 어울려 ‘산이라면 넘어주마 강이라면 건너주마’ 같은 옛노래도 곧잘 불렀다. 오윤 형의 판화 「산팔자 물팔자」를 볼 때마다 나는 김종철 형이 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잡지 일을 시작하면서는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 같은 뜻 맞는 친구들과의 공부 모임과 후배 문인들과 밥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른바 ‘김밥 모임’이 고달픈 장기간의 공익 노동 기간 중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 같다.

남들보다 소음에 민감한 김종철 형은 그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고 방음공사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그를 잠도 못 자도록 괴롭힌 소음—이명증 때문에 귓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렸다는 비행기 바퀴 소리는 인간들의 학대와 고문을 견디지 못한 지구별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었을 것이라는 김해자 시인의 진단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김종철 형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이끌던 『녹색평론』의 시대는 끝났다. 예민한 시적 감수성과 예리한 비판정신으로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몽상가, 마음이 가난한 시인들의 벗이었던 김종철 형은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누가 그가 했던 일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경고하고 호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격월간 『녹색평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고, 공생적 문화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의 재건에 이바지하려는 의도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부합하는 비폭력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일은 사회적 분열과 생태계의 파손이 극에 달한 오늘날 무엇보다 절박한 과제가 되었습니다.”(『녹색평론』 정기구독 안내문 일부)

 

김종철 형이 없는 『녹색평론』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비범한 인물이 혼자서 해왔던 일을 평범한 여러 사람이 나누어 할 수 있다면, 『녹색평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