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단상

 

강동호 康棟晧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을 위한, 타자를 위한 변론: 박민규론」 「실패의 존재론: 김현의 문학론을 읽는 방법」 등이 있음. finhir@naver.com

 

 

1. 시적인 것의 기이함으로부터

 

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다소‘기이하게’들린다. 시가 삶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가 삶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단 말인가? 문학은 결국‘우리의 삶은 살 만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상기해본다면, 혹은 얼마 전 한 논자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1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詩作)이라는 제작(poiesis) 행위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양태 중 하나라는 사회학적 상식을 잊지 않는다면, 시를 삶에서 벗어나 유아독존하는 무슨 신비한 대상쯤으로 상정하는 믿음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은‘시는 삶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재차 던지려 한다. 비록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부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와 삶이 분리되어 있다든가, 시인은 저속한 세계의 진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낭만적 이념과 관련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물음은 시가 무엇을 써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 이전에 무엇을 쓰는 것이 가능하냐의 문제, 다시 말해‘시적인 것’의 존재론과 맞물려 있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2(이하 강조는 모두 인용자)

 

다른 논자들에게도 여러번 인용된 바 있는 진은영(陳恩英)의 이 고백은 삶과 정치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아낼 수 없는 시적 언어의 원시적 운명, 즉‘시적인 것’의 존재론을 무의식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기묘한 감성적 충격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던 시들에서는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이 사라지고 정치적 의미의 가독성을 최대화한 시들에서는 기묘함이 실종되는”3 이‘이상한’딜레마는 “얼어가는 물고기의 불타는 지느러미”(「Summer Snow」), “물속의 불꽃들”(「나에게」)이라고 쓴 것과 같이‘시인’의 존재태에 깊숙이‘기이한’방식으로 날인되어 있다.

시적 언어와 관련된 이 이상하고, 기이하고, 기묘한 사태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이와같은 독특한 존재론적 속성을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정치적인 것’으로의 도킹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삶이 시를 규정하고 시가 삶을 정의해버리는, 소위 해석학적 순환론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이른바‘삶/정치’와‘시’에 대한 저마다의 믿음을 최종불변의 공리로 삼는 무한투쟁적 존재신학(ontotheology)들과 결별하고,‘시적인 것’에 대한 물음 자체로써 삶과 겹쳐지는 공통의 지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시’와‘삶’을 한자리에 불러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와 삶이 관계맺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저‘기이함’의 총화를 인정함으로써 시적 언어의 근원적 존재형식과‘시적인 것’의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시적인 것’의‘기이함’의 원인과 조건에 대한 규명은‘시란 무엇인가?’또는‘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서술부(predicate)를 채우려는 독단론적 욕망과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와 마주했을 때 주관 내부로부터 일렁이는 “기묘한 감성적 충격”에서 출발하여 이 감각의 소요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는 것, 그러니까‘시적인 것’을 둘러싼 존재론적 범주를 경험적 사례들의 실타래로부터 역추적하는 과정이기에 연역적이라기보다 경험적인 것에 가까워야 한다.

물론 이 일은 단순히 경험적인 사례들의 집계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무한히 쌓여가는 시들의 전부를 감당할 각오를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시들의 구체적 양태들을 세밀하게 점검하기에 앞서 잠정적이라는 조건하에‘시적인 것’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한 최소한의 부표(浮漂) 정도는 설정할 필요가 있다. 시를 규격화된 형틀에 옥죄지 않으면서‘시적인 것’의 최소정의를 수립하는 일. 이를테면 그것은 이장욱(李章旭)에 의해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제기된 바 있다. “시민으로서의 사회참여가 곧바로 시인으로서의 시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시의 무엇이 이 전이과정을 방해하는 것일까? 해답은 생각보다 자명한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가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잠재적인)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은 아닌가?”4 이 글은 바로 이 자명한 지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장욱의 명제가 시를‘규정’하려는 독단적인 존재신학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시를 특정한 내용에 구속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보편적 특질을‘존재형식’의 원리로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특정한 이념과 사상을 겨냥하거나 단일한 제작기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범주로서의 시작의 보편명제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만큼 자명하다. 그러나 자명해 보이는 일은 더러 공허한 법. 시가 삶의 표면뿐 아니라 잠재적 부면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의 경계는 지나치게 넓고, 그 넓은 개념을 투망으로‘시적인 것’의 실제를 포획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저 헐거운 투망이 지닌 자명성을 보다 정교하게 벼리기 위해 이 글은‘잠재적’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2. 삶과 시적 언어 사이의 간극

 

삶의‘잠재적’부면은 무엇을 일컫는가? 일단 그것이 삶의‘표면’과 대비되고 있으니, 쉽게 생각해서 표층적인 삶(‘표면적인 부면’) 이면에 존재하는 피안의 삶, 그러니까 삶의‘심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간 시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이고도 익숙한 신앙을 구성해왔다. 시는 표면적인 삶, 즉 삶에 대한 상투적 인식에서 벗어나 생의 심부로부터 삶의 비밀을 길어올려야 한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러나 시가 삶의 비밀을 파지(把持)하고 그 깨달음을 아름답게 기술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명해 보이지만,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정교해진 오늘날 이 문제는 생각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의 시인들은 세계의 맨틀로 진격하기에 앞서 돌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심보선 「슬픔의 진화」 전문(『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08)

 

첫 시집의, 첫 시의, 첫 문장으로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를 채택한 시편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세계를 나르기조차 힘겨운 언어로 다음 연에서 바로‘세계’를 호명하고(“세계여!”), 더군다나 시의 제목이‘슬픔의 진화’인데 “더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하니 말이다. 심지어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이라는 대목에서는 과도한 연극성마저 엿보이니 시인의 절망은 혹 엄살이 아닌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심보선(沈甫宣)의 시들에서 작란하는 절망과 슬픔이 감정적인 것이기에 앞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시적 세계관이‘언어’를 만진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언어가

  1.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40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같은 글 82면.
  4.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2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