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방현석

1961년 울산 출생. 19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장편 『십년간』 『당신의 왼편』 등이 있음. bang80@jowoo.co.kr

 

 

 

존재의 형식

 

 

낡은 냉방기는 냉기가 아닌 소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일깨우고 있었다. 재우는 풍량 조절기가 떨어져나간 냉방기를 힐끗 보고 나서 원고더미 사이에 깔려 있는 부채를 집어들었다. 번역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고, 재우는 그사이 한번도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가 집안에 머무르는 동안 냉방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갔지만, 올 들어서만 두 차례나 수리공의 손을 빌려야 했다. 녀석이 벌릴 수 있는 벽 안쪽과 벽 바깥 사이의 온도 차이는 미미했다. 그나마 창문을 완전히 닫아둘 수 없어서 실내외의 온도 차이는 더욱 줄어들었다. 재우의 옆과 뒤에 앉은 두 사람은 줄기차게 담배를 피워댔다.

“이거 또 지뢰네.”

등뒤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희은이 담배를 뽑아 물며 뒤로 벌렁 넘어갔다.

“번진다, 이걸 어떻게 옮겨야 하나? 번진다……”

옆에 앉은 레지투이의 눈길을 피하며 재우는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웃음이 번진다, 이런 말이 이 나라에 있나……”

지뢰가 된 문장은,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였다. 이 한 문장을 놓고 벌써 20여분을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번지는 거 말예요, 이렇게.”

재우는 말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표정연기를 해 보였다.

“크이 또.”

레지투이가 말끝을 흐렸고, 재우는 고개를 저었다.

“크게 웃는 거 아니고, 이렇게 얼굴에 웃음이 퍼져나가는 거 말예요, 이렇게.”

화선지에 파스텔 터치를 하듯 웃음진 뺨을 가볍게 쓸어 보이는 재우를 향해 레지투이는 드디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뗀다.

“크이 뜨어이.”

“환하게 웃는 거 아니고요. 후유.”

재우가 바퀴의자를 굴려 책상에서 물러나자 침대에 드러누웠던 희은이 몸을 일으켰다. 만년필을 들고 책상으로 다가선 그녀는 원고 뒷면에 원을 크게 그리며 레지투이한테 직접 설명을 했다. 그녀의 동작에는 답답함과 짜증이 얹혀 있었다.

“이게 연못이란 말예요. 이 연못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돼요? 이렇게 물살이 번져나가잖아요. 이걸 뭐라고 그래요?”

큰 원 밖에서 시작한 화살표를 원의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조약돌을 빠뜨린 다음 그 둘레로 원을 겹겹이 둘러치며 희은은 한국말로 설명을 해댔다. 재우는 희은의 말을 레지투이에게 옮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의 농담 한마디 한마디까지 서로에게 옮겨주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버려두는 언어들이 늘어갔다. 재우는 둘의 대화를 놔둔 채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보호기능을 삭제해놓은 컴퓨터의 커서는 쉼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같은 속도로 반짝이고 있을 텐데도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같이 느껴졌고, 무슨 글자든 빨리 두드려넣으며 앞으로 나가자고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메일 도착을 알리는 강아지가 나타난 것은 커서가 손가락을 충동질하던 순간이었다. 입에 편지를 물고 화면 좌측상단에 나타난 노란 강아지는 고개를 흔들면서 방울소리를 냈다. 재우는 의자바퀴를 굴려 냉큼 컴퓨터 앞에 다가앉았다.

문태가 보낸 메일이었다. 클릭과 동시에 강아지의 입에 물려 있던 편지가 열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호텔은 사이공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예약해주면 되고, 하노이에서 심포지엄이 열리는 2박3일간 통역을 맡아줄 사람 한명을 구해주기 바란다. 서울에서 문태.’ 재우는 메일을 읽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문태가 처음 호텔예약을 부탁해온 것은 번역작업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니까, 한 열흘 전쯤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하노이를 거쳐 사이공에 오겠다며 호텔을 예약해달라고 했을 때 재우는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아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오면 숙소로 잡아주고 하던 찬슬리사이공 호텔의 예약을 후배에게 부탁했다.

재우가 호텔급수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 실수임을 깨달은 것은 어제 문태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은 다음이었다. 문태가 골프장 예약을 부탁하자 재우는 비로소 녀석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떤 급수의 호텔을 원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메일을 띄웠다. 어느정도 예상한 바지만 문태의 회신은 유쾌하지 않았다. 재우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행사에 일하는 후배에게 찬슬리호텔을 취소하고 사이공에서 제일 비싼 소피텔호텔 딜럭스룸으로 바꾸어달라고 하면서 재우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소피텔호텔 예약을 직접해버릴까도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직접 소피텔호텔의 딜럭스룸을 얻으려면 방 하나에 140불이지만 여행사를 통하면 90불이었다. 여행사의 후배가 넣어준 가격은 그것보다도 25불 적은 65불이었다. 재우의 손님들에게는 여행사 수수료를 한푼도 붙이지 않는 후배는 재우가 미안해할까봐 언제나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형 아는 사람들은 다 돈 없잖아. 우린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벌면 돼요.’

다행히 오늘은 후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헝클어졌다. 처진 기분으로 하노이의 후배들에게 전화를 해서 통역을 맡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만만한 순서대로 걸었는데 세 사람째 불가였다. 모두 선약과 논문 따위를 이유로 들었지만, 혹시 너무 적은 통역료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우가 소개하는 사람들의 통역은 언제나 반값 이하였고, 심지어는 무료인 경우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거절당하기 전에 이번에는 조금 괜찮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미리 하려다가 말았다.

네번째까지 실패한 다음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보루로 남겨진 상환이를 찾았다.

“야, 통역 한번 뛰어주라.”

유학 초기에 재우에게 진 신세 때문에 그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녀석이었다.

“언젠데요?”

“내일 하노이에 떨어질 거야.”

“빨리도 얘기하네. 며칠간인데요?”

“사흘.”

“리포트가 밀려서 그런데, 이틀만 하면 안돼요?”

녀석이 다니는 하노이대학 역사학과는 과제물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길래 임마, 누가 하노이로 가래.”

녀석은 어학공부를 사이공에서 하고 대학원은 하노이대학으로 갔다.

“알았어요.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하죠. 그런데 이번에도 무료예요?”

“아냐, 임마.”

“얼마 주는데?”

짐짓 뻔뻔스러움을 가장하며 녀석이 물어왔고, 재우 역시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얼마주면 되는데?”

“형이 언제 우리한테 물어보고 줬어요. 주는 대로 받아야죠.”

“니들 정식으로 통역 나가면 얼마씩 받아?”

“그냥 나가면 학술통역이니까 하루에 250불씩, 못 받아도 200불은 받죠.”

“그러냐…… 그렇게 받아라.”

“정말이야, 형? 나중에 뭐라고 그러는 거 아냐?”

“이번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니까, 다 받아. 나중에 어려운 사람들 오면 또 좀 봉사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형이 아는 사람들 중에 부자도 다 있고.”

“짜식이……”

전화기를 내려놓은 재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커피잔을 향했다. 얼음덩어리가 녹아서 묽어진 커피의 맛은 밍밍하고 미지근했다. 열흘 전, 일년여 만에 문태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정말 반가웠다. 지난해 서울에서 얼굴을 붉히며 헤어지고 나서 가끔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커피잔을 입에 문 채 문태가 소집했던 동문회의 풍경을 떠올렸다.

 

10년 만에 찾은 학교 앞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당구장은 PC방으로 바뀌어 있었고,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웨스턴바가 들어서 있었다. 민주동문회가 열린 횟집은 그 자리가 한때 감자탕을 팔던 집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사시미가 상마다 오르고 소주잔과 맥주잔들이 뒤섞여 돌아가며 익숙한 추억과 무용담이 오갈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달아오른 얼굴들만큼이나 시끌벅적하던 술자리의 열기가 가라앉은 것은 보상금문제로 화제가 옮겨가면서부터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에 대한 설명을 맡은 것은 물론 문태였다. 녀석은 법률 해석에 이어서 민주동문회의 회원들이 선고받은 총 형량이 217년이고, 실 집행기간이 173년이며 제적 281명, 해고 43명이라고 보고하고 지급받을 수 있는 예상 보상금액을 여러가지 설에 따라 산출해서 제시한 다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으면 좋을지를 토론에 부쳤다.

진보정당이나 민주화운동기념사업 기금으로 헌납하자는 의견에서부터 각자가 알아서 하자는 주장까지 사람 숫자만큼이나 분분한 의견이 나온 끝에 제출된 절충안이 40%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에 사용하고 10%는 민주동문회 기금으로 적립하며 50%는 각자의 재량에 따라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거의 합의에 이른 듯한 절충안에 대해 문태가 재우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매끄럽게 회의를 이끌어서 절충안을 도출하는 데 거의 성공한 문태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재우를 일으켜세웠다. 할말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는 재우를 일으켜세운 문태의 의도를 재우라고 모르지 않았다. 문태가 주재한 모임에서 재우가 결론을 내려준다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동문들도 이의를 달기 어려운 깔끔한 모양새가 될 수 있었다.

재우는 문태와 동기로 학생회가 부활되던 해에 같이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지하써클을 중심으로 한 활동에서 학생회를 통한 공개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무렵, 재우는 지하써클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총학생회 부활투쟁에 승리하면서 지하조직들 사이에서 직선제 학생회장 후보로 재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재우는 완강하게 출마를 거부하였다. 재우 다음으로 거명된 후보 창은은 성적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측은 3.0 이상의 학점을 요구하였고, 창은은 물론이고 학교수업을 우습게 알았던 지하써클의 핵심들 중에서 그만한 학점을 얻은 녀석이 있을 리 없었다. 창은의 후보자격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던 와중에 재우가 꺼낸 카드가 문태였다.

문태는 공개 종교써클의 대표였다. 지하써클의 대표자들은 문태를 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우자는 재우의 카드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문태의 써클이 정부에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지하써클들의 신뢰를 얻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하써클에서는 생소한 문태가 학생회장 후보로 결정된 것에는 재우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우리가 직접 출마할 경우 방향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취약한 지하써클의 역량을 고스란히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정권의 정책이 다시 강경 탄압으로 바뀌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문태를 내세우면 공개써클들을 선거운동뿐만 아니라 합법공간의 전면에 포진시킬 수 있고 운동세력과 일반학생들을 분리시키려는 정권의 의도를 역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뒤에서 일하면 된다, 감투와 명예는 내주고 내용과 전망을 지켜가자’는 재우의 논리는 먹혀들었다. 문태가 당선이 되고 나서도 지하써클의 영향력은 확고했고, 그 정점에 재우가 있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요.”

문태에 의해서 반강제로 자리에서 일어선 재우의 첫마디는 어눌한데다가 떠듬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 순간 그가 몰랐던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그의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기어코 튀어나오고 말았다.

“우리가 언제 명예를 잃은 적이 있었나요? 지금까지 한번도 내게 회복해야 할 명예가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해서…… 난 잘 모르겠네요. 보상은 더욱 잘 모르겠네요. 누가 누구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누가 누구로부터 보상을 받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 앉았지만 술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여전히 잘났어요.”

불편한 침묵을 깨고 왼쪽 구석자리에서 날아온 그 한마디가 재우의 귀에 와 박혔다. 재우는 그 말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목소리의 임자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별말 없이 오른쪽 구석자리 앉아 있던 창은에게 눈길이 갔다. 앞에 놓인 소주잔에 시선을 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고개를 들던 그의 눈길이 재우의 시선과 엉켰지만 그는 슬쩍 시선을 비키며 술잔을 집어들었다. 술잔을 입술로 옮겨가는 창은의 왼손과 그 손을 덮은 허름한 셔츠가 재우의 눈에 와 박혔다.

여전히 잘났어요, 하는 그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창은의 왼손에 들린 술잔이 재우에게 상처가 되었다. 충분히 외로워서 이땅을 떠났고, 완벽하게 외톨이가 되어서 잠시 돌아왔다고 생각한 그 앞에 창은이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재우를 일깨운 것은 희은의 목소리였다.

“뭐 안 좋은 소식 있어요?”

“아냐, 아냐.”

그는 대답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커피잔을 들고 있던 손을 흔들었다. 책상과 바닥에 커피가 흘렀다. 원고지도 젖었다.

“정말 무슨 일 있나봐요?”

“아니라니깐.”

휴지로 원고지에 떨어진 물기부터 찍어냈다. 서너 겹의 휴지로 원고지를 누르자 커피 자국이 가장자리로부터 휴지 전체로 빠르게 번져갔다. 재우는 바닥에 떨어진 커피를 내버려둔 채 레지투이를 불렀다.

“이게 번지다, 예요.”

세 겹으로 접은 휴지 가장자리에 재우가 남은 커피 한방울을 떨어뜨렸다. 흑갈색의 물기는 빠르게 휴지 전체로 번져나갔다. 레지투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노 누 끄이?”

“오케이.”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일곱시에 맞춰진 탁상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재우는 탁상시계의 꼭지를 누르고 다시 방바닥에 누웠다. 탁상시계의 울음소리 대신 창밖에 잇대어 있는 옆집 양철지붕이 격렬하게 빗소리를 연주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침대 위에서 희은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자. 이 정도 비면 베트남에선 모든 약속이 자동 취소야.”

“우와, 만세다.”

어제 일을 끝낸 다음 맥주를 마시고 새벽 두시가 넘어서 건넌방으로 갔던 그녀는 더워서 잠을 잘 수 없다며 새벽녘에 베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침대를 그녀에게 내주고 바닥으로 밀려났다. 그의 침대를 빼앗은 그녀는 새근새근 잘도 잤지만 그는 오래도록 잠들 수 없었다. 그의 잠을 가로막은 것은 옆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세찬 빗소리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었고, 여리고 얕은 그녀의 숨소리였다.

“아저씨, 커튼 좀 쳐줘요.”

하늘이 어두웠지만 창밖에는 아침이 당도해 있었다. 커튼을 치기 위해 일어서며 그는 아랫도리의 묵직함을 느꼈다.

“야, 이희은, 너 말야. 내일부터 이 방에 자러 오지 마.”

“왜요?”

“책임 못 지는 수가 있다.”

“고자라면서요.”

“짜식이…… 잠이나 자, 임마.”

얼마나 뒤척였을까, 다시 잠들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뽑아서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일곱시 삼십분, 평소 같으면 레지투이가 와야 할 시간이었지만 이 폭우 속에 그가 올 리는 없었다. 가끔 장난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꽁무니를 내빼는 동네 꼬맹이겠거니 하고 돌아누우려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좁은 마당에는 들통으로 물을 붓는 것같이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건너뛰는 대여섯 걸음에 재우의 옷은 젖어버렸다. 빗장을 풀고 문을 열던 재우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레지투이였다. 폭우를 뚫고 달려온 그가 오토바이를 잡고 서 있었다. 배수로로 변한 골목길에 선 오토바이의 바퀴는 깊숙이 물에 잠겨 있었고, 그의 발목은 물길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적신 빗줄기가 목을 타고 연신 가슴으로 파고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 순간 레지투이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전율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담담함이 깔려 있었고 눈빛에서는 비애를 넘어선 짙은 슬픔이 뿜어져나왔다. 슬픔과 달관이 빗물에 뒤엉켜 흘러내리며 빚어내는 얼굴의 평화로움은 적멸감을 불러일으켰다.

“씬 짜오.”

그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베어물고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재우는 잡고 있던 대문을 열어젖혔다. 마당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나서 현관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돌아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어린 것은 분명 적멸감이었다. 재우는 의식적으로 무시해왔던 그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자신의 내부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시작되었다.

“힘들지?”

뒤늦게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은 그의 목과 어깨를 레지투이는 능숙하게 눌렀다. 재우는 마싸지를 많이 받아봤지만 레지투이만큼 금방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나른하고 시원한 그의 손끝에 어깨를 맡기고 있는 사이 희은이 들어왔다. 물기가 남은 머리를 수건으로 묶은 희은은 정해진 순서처럼 레지투이에게 등을 맡겼다.

“아, 시원하다.”

손에 커피잔을 든 채 희은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오늘의 비는 지나가는 스콜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우기를 예고하듯이 비는 간간이 가늘어지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이 되도록 줄기차게 이어졌다.

번역작업은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자주 창밖을 내다보는 레지투이의 무심한 눈길을 재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탁상시계가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마셔댄 커피 탓인지 그다지 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배고프지 않아?”

역시 아침을 건너뛴 희은에게 물었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그렇게 피워대니 무슨 입맛이 나겠냐?”

“아저씨는, 나보다 두 배는 독한 담배를 연짱 피워대는 사람도 있구만……”

희은은 말끝을 흐리며 베트남 담배 555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는 레지투이를 흘낏 쳐다봤다. 그는 아무리 권해도 희은이 피우는 디스나 던힐은 싱겁다고 마다했다. 다른 날보다 빨리 재떨이에 쌓여가는 꽁초들을 보며 희은이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재우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이 아저씨, 오늘 약간 이상하지 않아?”

“글쎄……”

“센치하게, 비 타나……”

희은은 레지투이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재우는 가정부를 불러서 라면을 끓이라고 시켰다. 식탁 옆에 놓인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막 둘러앉았을 때였다.

“아로?”

가장 가까이 앉은 희은이 수화기를 집어들며 제법 베트남말을 흉내냈다.

“뭐야, 한국사람이잖아. 베트남어로 대답 좀 해주려고 했더니.”

희은이 넘겨준 전화의 주인은 문태였다.

“그래, 벌써 도착했냐. 어디야? 호텔인가. 그래, 뭐가 문젠데?”

“여기 통역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재우의 말허리를 자른 문태의 질문은 묻는 것이 아니라 따지는 것이었다.

“왜, 통역이 안 나왔어?”

“오기야 왔지.”

“근데?”

“통역료를 굉장하게 요구하네.”

문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고, 그의 감정은 바로 재우에게 전달됐다.

“얼마나 달라는데?”

“250불.”

“그런데?”

“야, 여기 공무원 한달 봉급이 얼만데 250불이야?”

“………”

“의사 월급이 70불이고, 판사 월급이 65불인 나라에서 하루 통역료로 250불을 달라는 게 말이 돼?”

재우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희은이 라면가닥을 입에 문 채, 얕게 한숨을 뱉어내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재우를 빤히 쳐다봤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문태의 목소리는 희은이 알아들을 만큼 컸다. 재우는 희은과 레지투이에게 식사를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며 수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문태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우리가 봉이냐?”

“………”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강재우, 듣고 있냐?”

“말해.”

“우리한테까지 이래도 되는 거냐. 너무하는 거 아냐?”

“아냐.”

“하루 250불 줘야 한다, 이거야?”

“응.”

다음 순간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문태에서 낯선 사내의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당신들 사람 아주 잘못 봤어.”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우리가 외국에 한두 번 다녀본 줄 알아. 내가 학위를 미국에서 했어. 미국에서도 말야, 하루 통역비 50불이면 떡을 쳐. 그런데 베트남에서 250불을 내놓으라고. 이봐, 자네들 말야, 우릴 바지저고리 취급하지 말라구.”

당신, 이봐, 자네. 무시와 모욕의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대명사는 모두 동원되었다. 재우는 입술을 깨물며 목구멍으로 기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통역 없어도 괜찮아. 영어로 하면 돼. 영국, 미국에서 유학한 멤버들 즐비해.”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하라면 못할 줄 아나. 자네들 말야, 인생 이렇게 살면 안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더는 참기가 곤란했다.

“여보세요!”

하지만 재우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대답 대신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우는 온몸에서 맥이 쭉 빠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재우를 희은이뿐만 아니라 레지투이까지 의아하게 쳐다봤다. 입맛이 달아난 재우는 두어 젓가락 건드리다 말고 이미 붇기 시작한 라면을 물렸다. 희은과 레지투이도 덩달아 생각이 없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도 다시 젓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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