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종합토론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김동식 金東植

문학평론가

김승희 金勝熙

시인, 소설가,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김철 金哲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백낙청  이렇게 많이들 와주시고 또 늦은 시간까지 남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토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가지 양해를 구할 점은, 첫머리에 최원식 선생이 인사말을 통해 밝혔듯이 김병익 선생님께서 갑자기 입원을 하시게 되어 우찬제 교수께서 발제문을 대신 읽으셨습니다. 종합토론에는 두 분 다 빠지시게 되었지요.

프로그램을 보면 제가 토론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데, 정작 행사를 기획한 후배들이 제게 주문한 것은 사회를 보라는 거였습니다. 일부러 제일 곤란한 역을 맡긴 것 같아요. 사회를 하자면 자연 다른 사람들 말하는 것을 통제해야 하는데, 남의 말을 통제하면서 내가 마음대로 떠들 수는 없는 거지요. 어쩌면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들 심보가 고약해서 이런 식으로 저를 억압하는데(웃음), 제가 억압을 당함으로써 능률적인 진행이 가능해지고, 그래서 청중 여러분께 발언의 기회를 더 많이 드릴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단상에 계신 다른 분들도 협조해주시라 믿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곧바로 토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발언시간을 너무 제약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만, 원래 정해진 시간표대로 네 분 약정 토론자께서 10분씩 말씀해주시고, 거기에 대해 발표자들께서는 각기 5분씩만 답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것으로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발언할 기회가 있으실 테니까 일단 첫번째 발언은 짤막하게 해주십사는 거지요. 그렇게 한번씩 주고받은 다음에는 청중들도 참여하는 가운데 자유토론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먼저 말씀해주실 분은 구모룡 선생님이십니다. 멀리 부산에서 오셨고 한국해양대 교수로 계시고 문학평론가이신데, 지역에서 『오늘의 문예비평』이라는 좋은 비평동인지를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구모룡  분에 넘치는 소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투리가 많아서…… 그렇지만 오히려 사투리가 시적일 거라는 생각도 들고, 또 오늘 주제와도 연관된다고 봅니다만. 제가 대충 적어온 것을 읽으면서 질의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남영 선생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자본의 운동에 따라서 사물화의 수준이 ‘비물질적인 실존공간’에 미치고 있으며, 시적 글쓰기가 이에 대한 저항이 됨을 지적하셨는데, 원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타당하고 시의적절하다고 봅니다. 다만 각론에서 시가 언어에서부터 사물화와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새로움’이라는 미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주체성과는 다른 시적 주체성을 세운다고 하셨는데, 이 ‘새로움’이라는 미적 가치에 자본과 기술의 이데올로기가 틈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즉 ‘새로움’의 물신화 가능성에 저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나 모더니즘의 자기부정의 역사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으로 승부하는 자본·기술·과학의 신화가 개입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서 새로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과도한 자유에서 시가 반드시 수용해야 할 전통들, 예를 들어 유기적 공동체라든지 유기론적 사유, 또한 선생님이 리비스를 들어서 설명하신 ‘제3의 영역’도 이러한 것이 되겠지만, 이들을 시야에서 놓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새로움이라는 순환체계 때문에 아무런 전통도 만들지 못할 소지도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가령 근대 이후에 서구에서 들여온 ‘자기표현으로서의 시’라는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하는 의문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자기표현이란 선생님이 말하신 ‘표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선생님이 말한 시어, 시적 주체는 물론 이미지·운율 등 전반에 걸쳐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시가 자기표현이 아니라고 한 것은 시적 세계관이 결국 인간중심주의, 물질주의, 과학적 환원주의와 대척의 방향을 지향함을 말씀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미지도 단순한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 나아가서는 마음의 문제이며, 운율 등도 전체 생명의 율동과 연관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한마디로 저는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부정을 통한 새로움의 창조’에 대해 문제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현재 묻혀버린 과거나, 자본에 의한 훼손이 상대적으로 덜한 주변부(혹은 반주변부)의 삶에서 ‘비물질적인 실존공간’ 혹은 ‘제3의 영역’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나희덕 선생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시가 그렇듯이 자연과 여성도 근대의 타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시적 지평에 놓이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렇다고 단지 타자였기에 한몫 접어줄 수는 없는 일이므로 자연을 재문맥화하고 여성성을 깊이 천착하는 일이 뒤따라야 하겠지요. 아울러 잘못 방향지어진 과학기술의 내면화 문제도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일면적인 생태시 혹은 생명시나 자연을 대상화하는 자연시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생태주의는 근본에 대한 천착이므로 하나의 패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패션으로 뒤따르는 시인들도 없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다시 짚어주시고, 아울러 자본주의 과학기술과, 이와 단짝이 되어 있는 가부장제의 내면화 문제를 시적으로 풀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환유적 글쓰기’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은유(隱喩)라는 것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기화하는 것이어서 문제라면, 환유(換喩)는 파편화된 부분들의 나열로서 자유를 지향하지만 내적 연관성을 지닌 전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유가 같음에 주목한다면, 환유는 이러한 같음을 해체하는 것이죠. 하지만 모두 주체에 기원을 둔 발상이라는 점에서, 은유와 환유라는 이분법은 상당히 서구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은유와 환유를 가로지르는 제유(提喩)적 글쓰기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제유는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에 의해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므로 주체와 타자 간의 같음과 다름에 모두 주목하며, 때문에 주체의 개체성이 전체의 전일성과 연속된다고 하겠습니다. 제유는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에 의해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수사학이기 때문에 생태시나 생명시, 여성시가 궁극적으로 제유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환유적 글쓰기의 정치적 의미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가 근대주의적 부정의 순환논리를 탈피하려면, 은유와 환유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이들을 가로지르는 제유를 설정하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인용한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제유로 읽는 것은 어떨까요. 환유적 글쓰기에 비추어, 또한 선생님의 시작 과정과 결부시켜 이러한 제유적 글쓰기의 가능성에 대해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씀드릴 것도 없이 현대시는 항상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생성하고 있습니다. 정남영 선생님이나 나희덕 선생님께서 이러한 절박한 시적 상황을 고려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언급하셨는데, 두 분에 비해 제가 다소 안이하게 문제에 대처하거나 성급하게 대안이론을 모색한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두 분의 유익한 발제를 통해서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백낙청  답변은 나중에 한꺼번에 듣겠습니다. 다음번 질문과 논평은 김동식 선생께서 해주시겠는데요. 김동식 선생은 문학평론가이시고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이십니다.

김동식  창비시선은 학생시절부터 즐겨 읽었고, 제 문학공부의 자양분이기도 했습니다. 200번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이 뜻깊은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출판을 통해 200권의 시집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한국문학의 저변과 역사성을 보여주는 일이며, 한국문학이 지닌 긍정적인 가능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매개물로 삼는 문학의 운명을 생각할 때, 시정신은 문학정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비시선은 한국현대사의 주요한 시기에 해당하는 25년 동안 부단하게 싸우면서 지켜온 문학정신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뜻깊은 자리, 명망있는 분들 사이에서 저처럼 별다른 경력이 없는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인 동시에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부족한 대로 몇가지 의문점과 제 생각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남영 선생님께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의 발제문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대립적인 관계로만 여겨져온 후기구조주의 이론과 맑스주의 이론의 접합점을 모색하는 의미있는 시도입니다. 또한 오늘날 시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세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와 탈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의 형성이라는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 매우 도전적인 제안이기도 합니다. 미리 받은 발제문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글에 나타나는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전망 때문에 한동안 행복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면 주로 들뢰즈의 이론과 관련해서 질문하겠습니다. 발표문에서 들뢰즈의 언어이론이 중요한 전거로 인용되었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흐름’이나 ‘표현’이라는 개념이 들뢰즈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사물화’와 ‘비물질적 사물화’에 관한 것입니다. 사물화는 루카치가 제시한 개념이지만, 그 계보는 헤겔과 맑스의 소외 개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헤겔의 소외 개념은 정신의 물신적인 대상화, 그러니까 정신의 일반적인 운동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맑스의 소외 개념은 대상화의 성격을 규정짓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소외가 인간 주체의 형성에 궁극적으로 미치게 될 영향관계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글에서는 물신성이 지배하는 물질적 차원에는 사물화가 적용되고, 기호의 사용이나 사고행위의 차원에 대해서는 비물질적 사물화라는 개념이 적용됩니다. ‘비물질적 사물화’라는 가따리의 개념은 언어·기호·의식과 관련된 상징적 차원에 대한 사물화를 강조하거나, 사물화에 대한 속류적인 해석을 견제하는 개념으로는 상당히 유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맑스주의의 이론적 전통을 감안하면, ‘비물질적 사물화’ 개념에 의해 사물화 개념이 ‘물질적 사물화’로 역규정되는 것은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번째는 언어 또는 기호 이론과 관련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시 양식에 잠재된 가능성을 말씀하기 위해 들뢰즈·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 5장의 기호이론에 관한 부분을 매개항으로 삼고 계십니다. 사실 어려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들뢰즈는 언어이론을 기호론(semiology), 기호체계론(semiotics), 화행론(화용론, pragmatics)의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하는데요. 기호론과 기호체계론을 비판하면서, 화행론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나 기호체계가 아니라 언어·기호를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들뢰즈는 정치적 슬로건이나 명령법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기도 합니다. 언어나 기호의 사용은 근원적으로 행위나 실천과 관련된 것이고, 그 자체가 새로운 권력과 코드를 생성하는 방식인 동시에, 기존의 기호체계와 분쟁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언어의 사용이 아무런 성과 없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생성되는 과잉, 잉여, 여백, 단절, 결핍 등과 같은 움직임들이 언어체계와 구조의 틈 사이를 흘러다니다가 분출하거나 빠져나가기도 하고 한곳에 모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이 언어적 행동(화행)은 결코 주체로 환원되거나 주체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들뢰즈의 용어를 그대로 써서 죄송합니다만, 사회의 기계적 배치물과 언어적 행동 사이에 제3의 영역, 그러니까 아주 애매모호한 공간을 산출하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효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의 사용은 주체의 능력이나 의도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선생님의 발제문은 사물화된 언어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능력의 복원 문제, 결국은 주체의 능력 문제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들뢰즈의 이론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주체 또는 주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언어가 지닌 다가성(多價性)에 의해서 새로운 언어게임의 룰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비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시 양식을 통해 발현될 수 있음을 지적하셨는데요. 만약에 이 발제문이 들뢰즈와의 친화성을 가지고 씌어진 것이라면,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대목은 들뢰즈의 입장과는 달리, 탈변증법적인 이론의 계기를 다시 변증법의 사슬로 묶어놓는 형국이 아닐까 합니다. 제 생각에 들뢰즈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대목은 생성의 철학입니다. 뭔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그리고 만들어지는 움직임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자는 것이죠. 비유를 들자면,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무라고 할 때는 나무의 굵은 둥치를 말하는 데, 들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