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시

 

좋은 서정과 진부한 서정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서정시의 고질적 문제들

 

서정성을 벗어난 다양한 시적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시 하위 장르 가운데 서정시가 차지하는 주류로서의 위상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서정시를 향유하는 독자층이 그만큼 넓기 때문이다. 대화적 소통방식을 벗어나 개별 발화로서의 독백적 성격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방하는 서정시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서정시가 지니는 장르적 친근성과 정서적 환기력이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시의 유구한 전통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막대한 시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전통적 자산을 시 창작을 위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정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은 전통의 친밀함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늘 갖게 마련이다. 기존의 시들과 변별될 수 있는 색다른 느낌을 창안해야 한다는 부담은 서정시의 확대 가능성과 결부된다.

그러나 서정시가 지닌 이러한 부담은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흐름 속에서 탄생한 정전(canon)의 압력만이 아니라 서정시가 지향하는 개체의 내면적 감정, 정서, 열정과 같은 주정적 측면의 보편성을 가로지르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서정시가 관습화된 기표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서정을 재생산하거나 자폐적 상처의 고백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관습화된 기표의 재생산이라는 서정시의 부정적 측면은 서정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반복돼온 고질적 문제이다. 일체의 예술적 행위가 지배적이고 경직된 거대담론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오늘날이야말로 개별 발화가 적극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싯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서정시에서 지루하고 권태로운 발화가 무더기로 발견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서정시의 관습적 틀에 안주하려 하는 시인들의 안일한 의식과 허약한 사유기반 때문으로 판단된다.

 

 

2. 되풀이되는 자연과의 동일화 구조

 

계절마다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 가운데 서정시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발표된 서정시를 면밀히 관찰해보면 대다수의 작품이 대동소이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연 이미지 혹은 자연 풍경과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비유적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동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던 전통적 삶에서는 자연 이미지에 대한 선호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시 기반이 우주적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속적이면서 동시적인 질서 속에서 파악하려 하는 ‘연속적 실재관’에 입각해 있음을 볼 때, 자연 자체를 사유대상으로 삼는 시만이 아니라 자연을 매개로 자신의 내면을 표상하는 시가 우리 시의 미학적 전통 가운데 주류적 양상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이 인간 삶의 근본적 지평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전통적 양상의 계승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자연과 주관적 내면의 동일화 구조가 무수한 시인들에게서 끊임없이 자동화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서정시의 틀이 시를 용이하게 쓰는 방법으로 이미 고착되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꽃피는 의미를 모르면서도

사랑이라고 사랑한다고

안간힘으로 꽃망울을 밀어올리는 나무들처럼

내리지도 못할 뿌리를 물고 달려드는

나의 분노도 슬픔도 사랑도

가을 속살을 베어 물고 익어가는 중이다

—김청미 「가을을 베어 물다」(『문학들』 2006년 봄호) 부분

 

아직 저녁이 오기 전인데

만나려는 사람을 만나기 전인데

앞으로 너무 오래 그래야 하는 것인 듯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어둡다

그것을 알아버린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

성긴 눈 날린다

—심재휘 「성긴 눈」(『현대시』 2006년 2월호) 부분

 

꽃은 피어서 슬프고 지나간 날의 맹세는 쉽게 무너진다.

설렁줄 흔들어 산그늘 불러들이는 저녁 해어름 때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지천으로 밀려오고

—김석규 「봄날은 가고」(『시와 사상』 2006년 봄호) 부분

 

안간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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