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좌담: 통일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강만길 김경원 홍윤기 백낙청
때: 2000년 7월 20일
곳: 창작과비평사 회의실
백낙청 바쁘신데 발제문을 미리 써주시고 오늘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과 특히 6·15 평양남북공동선언은 우리 모두에게 감격으로 다가왔고, 또 우리 현대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과 그후의 사태에 대해 저희 창비에서도 한번 정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좌담제목을 ‘통일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고 잡은 취지는 이렇습니다. 남북관계의 세부적인 문제라든가 현재 진행상황들을 전문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이 남북회담을 계기로 지금 열리는 새 시대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고 스스로 어떤 작업을 해나갈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말을 넣었고요. 그리고 ‘통일시대’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이것은 지금이 통일시대라는 판단을 여러분께 강요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일단 이런 표현을 내놓고서 과연 지금을 통일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 타당하다면 어떤 의미로 그러한지, 이런 점에 대해서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각 선생님들께서 통일시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한 말씀씩 해주시고, 그 다음에 자유롭게 토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먼저 강만길 선생님께서는 이번에 방북수행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시기도 했고, 또 원래 『창작과비평』 지면을 통해 ‘분단시대’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쓰신 필자이기도 하십니다. 통일문제에 대해서 줄곧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논의를 해오셨고요. 이번에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신 감격도 남다르셨으리라고 봅니다만, 강선생님께서 ‘통일시대’에 관해 먼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식의 통일과정으로서의 협상통일
강만길 우선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시대라고 부르는 데 일단 나로서는 찬성입니다. 나는 역사 전공자로서, 역사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시대구분 문제인데, 통일시대라고 불러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우리의 경우 베트남식의 전쟁통일도 독일식의 흡수통일도 불가능하다는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 우선 전쟁통일이 안된다는 것은, 6·25전쟁에서 처음에는 북에서 통일할 뻔했고 나중에는 남한에서 통일할 뻔했는데 외세의 개입으로 안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줬다고 봅니다. 그래서 평화통일론이 나왔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독일이 흡수통일이 되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많았는데, 흡수통일 역시 안되었습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이 죽고 나면 북이 무너지고 흡수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성급한 사람들은 6개월 이내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까지 했지만, 역시 안됐습니다. 한데 지금은 북한이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으로도 속된 말로 바닥을 쳤다고 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도 상당히 안정되어간다고 합니다. 여기에 또하나 중요한 변수가 있는데, 지금까지 북쪽의 배경 노릇을 하기가 어려웠던 러시아가 다시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특히 북쪽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흡수통일이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통일을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의 경우는 협상통일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姜萬吉
지금 통일이 어렵다는 것은 20세기적인 발상이에요. 통일은 21세기의 문제이고, 21세기에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백낙청 이번 발제문에도 그렇게 쓰셨죠?
강만길 예. 그래서 이번 정상회담이 어떤 의미에서는 협상통일의 시발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현장에서 했고요. 또 협상통일이 우리식의 통일과정이라면 지금부터 통일시대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7·4공동성명 때나 남북기본합의서가 제출됐을 때 상당히 흥분해서, 내 경우는 7·4공동성명 때는 아니지만 남북합의서가 체결되는 것을 보고 지금부터 통일시대로 들어간다고까지 얘기했는데, 그후 다시 남북관계가 냉각되고 통일시대로 접어들지 못했지요. 지금 비방방송 안하고 이산가족 만나게 하는 것은 옛날에도 다 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번의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이 정말 협상통일시대로 들어서는 출발점이냐 아니냐는 이후 남북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김경원 선생님께서도 발제문에서 한반도 분단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출발하셨는데, 뒤에 가면 현재 중요한 과제로 전쟁위협의 제거를 주로 말씀하시거든요. 다시 말하면, 일부에서 최소한 한반도에서 이제 전쟁의 위협은 없어졌다고 단언하는 것과는 달리, 적어도 그런 의미의 통일시대는 아직 아니라는 입장이신 것 같은데, 어떤 생각이신지요.
김경원 통일시대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답변을 드릴 수 있겠죠. 통일시대라는 개념을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목표·소망이 무엇이냐는 데 대한 참고사항(reference)으로 생각하면, 통일시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통일시대가 객관적인 사실, 진행된 과정에 대한 어떤 묘사라면, 미래에 관해서는 사실 시대구분을 하기가 좀 이른 감이 있기 때문에, 현재 진행되는 상황이 통일로 가고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를 얘기해야겠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이번 정상회담이 통일의 방향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문을 좀 열어놓았다는 느낌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통일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金瓊元
이번 정상회담이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지만, 군비통제, 상호신뢰 구축 그리고 군축 등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리고 전쟁위협과 관련해서는 이번 정상회담이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가령 북한의 김정일씨도 서해교전 같은 것은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는데 일어났다고 했다는데요. 그것은 정상회담이 아무리 평화지향적인 결론을 냈다 해도 지금 존재하는 체제나, 지난 반세기 동안 누적되어온 전쟁 장비를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전쟁방지를 위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제가 말한 군비통제, 상호신뢰 구축, 그리고 군축 등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지요. 군축이 왜 어렵냐면, 양측이 다 선의를 지니고 있다 해도 군사력이 어느정도 상호균형을 이룬 상태로 몇십년 동안 지내왔는데, 양쪽에서 이를 줄여나가다 어떤 지점에 이르면 그 균형이 불안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한쪽이 불안감에 싸인다든가 또다른 한쪽이 야심의 유혹을 받는다든가 하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통일이라는 면에서는 약간 문이 열렸다는 뜻에서 통일시대라는 표현은 써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가 특별히 쓰지는 않아요.(웃음)

洪潤基
통일문제도 우리가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차원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추구해야 할 전인류적인 가치라는 차원에서 보아야지요.
백낙청 홍윤기 교수 발제문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기존의 현실에 대해서는 제가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와 꽤나 인식이 비슷하다는 걸 느꼈어요. 특히 한반도 분단이 과거 베트남이나 독일의 분단과 그 성격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분석은 저하고 많이 일치합니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나 앞일에 대해서는 생각이 저와 갈라지는 것 같거든요. 지금을 ‘분단체제의 이완기’로 보지만, 오히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통일담론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시는데……
통일논의에 속아온 젊은 세대
홍윤기 우선 평소 존경하던 원로 선생님들 앞에서 과연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통일이라는 것이 마치 내일…… 제가 발제문에서도 썼습니다만, 선배세대의 통일이나 분단에 대한 인식은, 내일 아침이면 또는 조금 있다가 만날 수 있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기분으로 헤어졌다가 50년이 지났다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신 것 같아요. 50년대에 태어나 60년대에 한글로 교육받는 등 분단체제 아래서 성장하면서 분단 당시의 상황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첫 세대로서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통일 얘기가 나올 때마다 또 거짓말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특히 권력 가지신 분들에 대해서요. 제일 먼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이고, 그 다음이 남북기본합의서인데, 7·4공동성명 당시에는 어렸으니까 진짜 들뜨기도 하고 뭔가 달라질 것 같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위상은 현재 대통령 위상과 또다른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강력한 분이 말씀하시니까 어린 심정에 뭔가 달라지나 보다 했는데, 이후로는 통일 얘기가 나올 때마다 실질적으로 통일이 다가선다기보다는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고, 어느 면에서는 분단이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白樂晴
한반도의 통일은 단순히 근대성을 성취하는 것을 넘어 근대극복의 실마리를 마련하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가능합니다.
이번 경우에는 어느 면에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간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현재 남북한의 관계가 중국과 남한의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냉철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했고 이산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들을 쏟아내는데도 불구하고, 왜 통일을 이루지 못했냐면, 그동안 분단이 오히려 편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냉소적인 감정도 든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분단은 며칠 뒤 만날 잠시 동안의 이별이 아니라, 양쪽 국가를 만든 기축이 되었다는 것이죠. 때문에 저는 백낙청 선생님이 제기하신 분단체제론에 처음부터 동조한 입장이지만, 백선생님도 어쩔 수 없이 선배세대이시기 때문인지, 분단체제를 얘기하면서 항상 통일체제를 염두에 두고 계세요. ‘체제’라는 용어를 쓰실 때쯤 됐으면 통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실 만도 한데,(웃음) 여전히 통일을 위해서 그 안에서 뭔가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입장이신 듯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민족은 실질적으로 현대국가를 꾸려본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민족분단은 분명히 맞지만 국가분단은 아닙니다. 독일과의 결정적 차이가 그것인데, 독일은 국가분단임은 분명하지만 민족분단은 절대 아닙니다. 나중에 80년대에 가서 동독 쪽에서 안되겠다 싶어서 이른바 ‘사회주의 민족’(socialist n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거든요. 민족을 다시 갈라보려는 생각을 사회주의 말기에 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실상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양쪽이 분리 건국을 한 겁니다. 때문에 통일시대라는 말이 통일에 대한 나름의 열망을 표시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수긍하지만, 냉철하게 통일담론 바깥에서 보면, 앞으로 우리가 최소한 남북한 관계를 현재의 남한과 중국 또는 남한과 러시아의 관계 정도로라도 만들어놓고 모든 것을 서로 들여다보고 난 다음에─그야말로 민족통일이 되려면 민족 대다수를 이루는 민중이나 시민들이 직접 얘기할 수 있는 단계를 필히 거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만길 선생님께서 협상통일이라고 하실 때, 양쪽 지도자들이 협상이라도 해서 통일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갈망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만, 분단체제론자로서 저는 좀 다른 입장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백낙청 그 점에 대해서는 강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지만, 저보고 분단체제론까지 제기해놓고 계속 통일을 얘기하느냐 하셨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만 잠깐 얘기하죠. 물론 제가 분단체제라는 말을 쓸 때는 통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체제라고 하면 설혹 엄밀한 의미의 체제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자생력을 가진 구조라는 뜻이고, 자생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 속에 사는 편안한 사람들의 수가 꽤 많으니까─적극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세력은 물론이고 그러지는 못해도 갑자기 전쟁을 통해서 깨지는 것보다는 분단되어서 사는 것이 낫다고 인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다 실제로 그러하니까─유지가 된다는 뜻이죠. 하지만 체제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극복 불가능하다거나 극복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지요. 체제 중에는 좋은 체제도 있고 나쁜 체제도 있으며, 더 나쁜 체제가 있고 덜 나쁜 체제가 있지요. 저는 분단체제가 전쟁을 해서라도 깨뜨려야 할 만큼 나쁜 체제는 아니고 우리가 통일을 부르짖기만 하면 저절로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한 체제는 더욱이나 아니지만, 역시 남북한의 일부 기득권자 또는 남북분단으로 인해서 이득을 보는 외국세력을 빼고는 대부분의 한반도 주민에게는 매우 나쁜 체제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을 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또하나는 김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사실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길은 통일 이외에는 없고, 또 우리 민족이 장기적으로 참화를 피하는 길도 통일말고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파국으로 가지 않는 한은 극복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통일을 외치고 통일이 쉽게 되리라는 데는 반대하지만, 체제라는 말을 쓰면서 정말 더 체계적으로 극복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죠. 분단체제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통일운동이나 통일작업을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홍윤기 저도 그 선의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웃음)
백낙청 그것은 선의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오히려 과학적 인식에 가깝다고 해야지요. 그리고 하나의 전략으로서 남북관계가 일단 한중관계와 비슷해지고 그것을 거쳐 나가는 게 좋으냐 아니냐는 것은 우리가 더 논의를 해봐야겠습니다만…… 일단 제 발언은 이 정도로 하고, 저보다 훨씬 적극적인 통일론자이신(웃음) 강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강만길 내가 늘 듣는 말이, 내 통일 얘기가 너무 당위론적이라는 것이고, 또 많은 비판도 받아왔는데요. 역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다른 학문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역사학에는 일종의 이상주의가 들어 있습니다. 역사학 속에 이상주의가 없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하게 됩니다. 어떤 지향이 없으면 말이죠.
김경원 상당히 솔직하신데요.(웃음)
강만길 그래서 역사학이 현실에 얽매여서 미래지향적인 얘기를 하지 못하면 그 존재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통일이 어렵다, 분단체제가 해소되기 어렵다 하는 것은 20세기적인 상황을 바닥에 깔고 하는 생각입니다. 20세기 전반기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후반기는 냉전체제였습니다. 그런데 20세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도 냉전체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의 냉전체제적인, 또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21세기 문제를 재단하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에는 21세기의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마련이고, 그건 우리 민족사회나 동아시아사회나 세계사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통일문제는 21세기 문제란 말이에요.
더구나 아까 내가 협상통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협상통일은 전쟁통일이나 흡수통일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립니다. 나는 전에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은 2020년대에나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얼마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20년, 30년을 얘기하더라고요. 협상통일의 과정은 길다는 건데,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죠. 때문에 분단체제를 극복해가는 과정과 긴 시간을 두고 협상통일을 해가는 과정, 평화공존 과정이 맞물려들어가는 겁니다. 평화공존의 과정은 협상통일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필수불가결한 과정입니다. 길게 보면 하나의 우리식 통일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다음에 또하나의 문제가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의 주변정세입니다. 우리의 주변정세가 20세기처럼 제국주의전쟁이나 냉전체제 같은 것으로 유지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동아시아 전체의 형세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흔히 예를 들듯이, 유럽식의 공동체를 형성해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변해갈 수 있죠. 예컨대, 2020년대나 30년대 들어서 동아시아에 하나의 평화공동체를 형성해가려는 기운이 일어났을 때 한반도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주변정세가 21세기적인 상황에 의해 움직여간다면 우리의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동아시아 문제의 변화, 우리 민족 내부 사정의 변화가 필요하고, 그리고 반세기 동안 지속된 분단체제도 2,30년 걸려야 무너질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얘기가 너무 당위론이나 이상주의는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김경원 당위론도 필요하죠.(웃음)
연방제·연합제에 관한 합의가 뜻하는 것
백낙청 그런데 이번에 합의문 2항을 보면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남쪽의 연합제안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방향으로 가기로 일단 정했잖습니까? 강선생님께서도 그 대목을 매우 중시하셨고, 저도 발제문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아마 그 점에 대해서 김선생님이나 홍선생님은 조금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지금 마침 강선생님이 우리의 통일과정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시간도 절약할 겸 연방제 혹은 연합제에 관한 합의문 조항이라든가 또는 일부에서 얘기하는 국가연합, 이런 것의 전망과 주변정세를 엮어서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김경원 강선생님이 당위적인 데 비해서 저는 좀 비관적인 입장일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홍선생님이 통일 얘기에 대해서 실감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저도 남북간에 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연방제니 뭐니 한다는 것 자체가 허위의식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연방제를 한다면 좌우 양쪽의 논객들이 마치 이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치학 사전을 찾아보고 거기에 나온 정의를 채택하면 되는 것처럼 접근하곤 하는데, 그건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연방제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정한 역사적 단계를 거쳐 어느 싯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의 권력조직이 형성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인데다가, 연방제라는 표현을 쓰는 정치체제는 아주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또 권력집중도도 다양하단 말이죠. 때문에 저는 원래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통일문제에 대해서 처음으로 상식에 부합하는 접근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환영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를 했기 때문에 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회의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통일을 안하려는 것은 뻔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당분간 통일을 안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2항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놀라운 것인데, 정상회담의 합의치고는 너무나 쎄미나 제목 같아요. 양국 정상이 만났을 때는 행정적으로 즉각 이행할 사항에 대해서 논의하고 합의하는 건데, 여기서는 공통성이 있다면서 아주 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됐거든요. 그것은 통일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취할 것이 없다는 점을 자인한 겁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문제를 던져놓은 거죠. 그리고 국가연합은 통일을 안한다는 개념이란 말이에요. 물론 나중에는 다 한다는 얘기죠.
그런 관점에서 이번 합의에 대해 놀랄 열강은 없을 겁니다. 주변강대국들은 남북한이 이제는 철들었구나, 당분간 안되는 것을 가지고 보채거나 상황을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겠구나 하는 태도로 우리를 바라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이번 남북공동선언의 의의는 국가연합이나 연방제라는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론함으로써 통일논의를 현실화한 것이라고 봅니다.
백낙청 선언문 제2항에 대해서 독특하면서도 아주 예리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연방제와 연합제는 말은 비슷해도 개념은 아주 다른데, 이번 합의의 촛점은 사실 연방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라기보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연합제 쪽으로 중심을 이동했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당장 연방제든 단일형이든 통일은 안하겠다는 선언을 한 꼴이죠. 저도 그것이 한 면이라고 보고 김선생님 지적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역시 연합이라는 말이 들어가고 통일이라는 말이 들어간 점도 평가를 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국가연합 단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전부터 주장해왔는데, 여기에는 양면이 있지요. 한편으로는 연방제 통일조차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김선생님 표현대로 허위의식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 상황에서는 국가연합을 거쳐서라도 통일로 가게 되어 있으며, 또 그러겠다는 의지를 안 갖고서는 평화정착도 어렵고 상호신뢰 구축도 힘들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연합이라는 것이 당장은 통일을 안하겠다는 것과 당장은 아니지만 반드시 통일을 하겠다는 두 가지가 포함된 개념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개념에 합의했다는 것이 이번 선언문의 정말로 중대한 의의지요. 따라서 당장 통일 안하겠다는 것은 이번 선언의 2항이 지닌 의의의 절반에 해당하지 전부는 아니라는 겁니다.(웃음)
그리고 연방제가 갖가지듯이 국가연합도 여러가진데, 우리 경우는 우리 실정에 맞는 연합을 해야겠지요. 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