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서남대 국문과 교수.

 

 

주객분리와 맞서는 젊은 시인들의 미학

박형준·이윤학·이정록·장철문의 근작을 중심으로

 

 

1. 생태학적 상상력과 탈(脫)자연적 상상력

 

일찍이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낡은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예민하게 경계한 시인은 기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등지고 문명의 한복판인 도심의 거리를 헤매는 자의 남루함을 고백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상상력의 수원(水源)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체험적 긍정과 의식적 경계의 접점에서 생성되고 씌어지고 완성되었다. 특히 그의 「물 속의 사막」은 문명의 중심지에 서 있는 주체가 밤빗물이 밀어붙이는 추억의 공간으로 잠입하여, 자신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유년과 자연의 숨결을 ‘실체’가 아닌 ‘흔적’으로 느끼고 있는 풍경을 실물감각적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낸 명편이다. 한편으로 근대문명의 제도적 세례를 줄곧 받은 도회의 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자연의 적자(嫡子)이기도 했던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을 그는 혼돈과 부정의 역동성으로 잘 보여주었다.

두루 알다시피,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중요한 시적 상상력의 원천이자 “비유의 아버지”(정현종 「초록 기쁨」)이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최근 우리 시에는 자연에 관련하여 상반된 시적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하나가 이른바 생태학적 상상력의 평균적 범속화에 따른 일종의 ‘자연 과잉’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연을 자신의 체험적 영역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자연 배제’의 미적 전략에서 나타난다. 자연의 비유를 미학적으로 경계하면서도 궁극적인 긍정을 부여했던 기형도적인 긴장과 매개의 시학은 이같은 양편향의 분위기 속에서 분리되고 사물화되고 느슨해진다.

먼저 최근 우리 문학의 대안적 사유양식으로 혹은 이 시대의 첨예한 윤리적·실천적 과제로 부상하여 일종의 주류 미학적 권역을 형성한 생태학적 상상력은, 뛰어난 형상과 안목으로 생명시학의 정수를 열어 보이는 깊이있는 시편들을 축적해왔다. 그런데 최근 그것은 주류화를 넘어서 무반성적 소재주의를 양산하기 시작한 감이 없지 않은데, 풍요로운 외연에 비해서 질적으로 평준화된 범용한 시편들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생태학적 상상력은 근대의 이성중심주의가 몰고온 인간 안팎의 황폐함을 극복하고, 생명성을 복원하려는 탈근대적 기획의 상관물로 대안공간인 자연을 적극 부활시켰다. 그것은 이를테면, 문명비판을 통한 환경론적 경향, 자연 스스로 말을 걸고 생애를 사는 물활론의 경향, 자연을 시원(始原)으로 보고 거기에 신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경향 등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목소리는 일종의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랄까, 공리성과 심미성을 넘어서는 신성의 화음으로 자연에 유토피아적 속성을 부여하였다. 그럼으로써 회의하고 질문하는 정신 대신 기투(企投)와 몰입의 양상이 전면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 나타나는 관성화된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속화가 일종의 주객분리적 관점을 낳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서 자연은 심미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아니면 물아일체라는 양상으로 인간과 조화되는데, ‘대상화’는 물론 ‘물아일체’를 통한 주체의 해소조차 ‘주객분리’를 인준하는 시각에서 나온 하나의 반어적 양상이다.

또한 생태학적 상상력의 반대편에서 자연은 시의 표면에서 적극 배제되면서 철저히 배면으로 숨고 탈의미화된다. 물론 도시적 감각이라는 것이 자연을 체험적으로 등지면서 이루어진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시가 물질적 근거를 지닌 자연을 생략(은폐)하고 그 안에서 대안적 가치를 찾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혹여 자연의 일부분인 동식물이 형상화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상의 「꽃나무」나 김춘수의 「꽃」이 ‘꽃(자연)’에 관한 시가 아니듯이, 그들의 시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은 생태적 환경도 신성의 거소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라고 자연의 체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미적 전략의 선차성 때문에 체험을 통한 세계와 자아의 복합적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시의 표면에 가공된 이미지들을 축적해가는 환유지향적 경향을 짙게 드러낼 뿐이다. 이렇듯 일정하게 자연과 적대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시 경향은 이른바 동일성의 시학을 넘어서려는 미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급격하고도 철저한 고갈로 인해 우리 시단에서의 입법적 권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맑은 시냇물이나 밤하늘의 빛나는 별보다는, 희뿌연 분말이 되어버린 도회의 탁한 공기와 네온싸인에 더 체험적 직접성을 가지는 도시 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같은 탈(脫)자연의 경향 역시 자본주의시대를 사는 주체들의 주객분리의 또하나의 극적인 양상일 것이다.

자연을 둘러싼 이같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편향 사이에서, 탐닉과 몰입이 아닌, 그렇다고 배제와 탈의미화도 아닌, 다만 자연을 바라봄(관찰)으로써 주체의 내면과 대상의 접점을 갈등적으로 모색하는 시인들의 작업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젊은 시인들에게 ‘주류’로 나타나지 않고 연면한 ‘저류(底流)’ 혹은 ‘복류(伏流)’로 존재하는 이같은 경향은, 전통적인 시적 보고였던 자연을 시의 육체로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내면의 심층으로 빨아들이는 이중적 작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제의 폭과 깊이가 저마다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동일화의 대상도 아니고, 분석적 묘사를 필요로 하는 사물도 아니고, 신성화된 초월적 공간도 아닌 점에서 공통점을 띤다. 그것은 내면 속에서 재구성된 묘사를 거쳐 재생된 살아있는 자연이자 주체의 기억 속에 스며 있는 체험적인 자연이다.

이러한 균형감각으로 주체와 대상의 복합적 연관을 묘사하고 투시하는 시인들 중 이 글에서는 박형준, 이윤학, 이정록, 장철문을 다룬다. 물론 이들의 시가 이러한 경향의 전범이나 완성형이라는 판단보다는, 가장 활력있는 창작활동으로 우리 시대의 가능성의 한 지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물을 것도 없이, 이들을 선택한 이면에는 최종적 가치평가보다는,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핵심적 과제와 그 긍정적 징후를 드러내려는 비평적 의도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람과 탈자연적 상상력의 전략적 극대화라는 양극 사이에서 시를 쓰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년시절에(지금까지도) 자연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다는 것인데, 그들의 이같은 자연의 재의미화 작업은 그래서 주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