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이재빈 李在彬
서울대 경제학부 4학년. 1990년생.
zevintothez@gmail.com
주리
등장인물
남자
여자
조율사
무대
무대는 마천루가 보이는 어느 메트로폴리탄의 고급 아파트.
1장
창밖으로 부드럽게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식탁에는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다. 출근 복장을 거의 다 갖춘 남자가 무대 한쪽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분주히 마무리하고 있다. 여자는 그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자던 복장 그대로 한손에 책을 들고 무대 위로 등장.
여자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남자 평소대로인데 뭘.
여자 된장찌개에 조개까지 넣었네?
남자 그거 하나는 신경 좀 썼지. 어제도 책 보다 잠든 거 같던데 좀더 자지 않고.
여자 아니야. 벌써 해 다 떴는데 뭘. 남향에 사니까 아침만 되면 햇살이 쏟아져서 더 잘 수가 없잖아.
남자 와, 우리 예전 집에서는 그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그치?
여자 여기는 햇살이 너무 세서 커튼을 두꺼운 걸로 새로 달아야 할 판이야.
여자가 식탁에 앉아 천천히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남자가 출근 준비를 마무리하고 집을 나서려 한다.
남자 아, 맞다. 냉장고에 김치 있는데.
여자 그건 내가 꺼내 먹을게. 늦기 전에 빨리 가야지.
남자 이 정도 할 시간이야 충분하지. 그리고 좀 늦으면 어때.
여자 늦어도 괜찮아?
남자 전에는 늦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주눅 들어 다니니까 조금만 늦어도 선배들이 날 엄청 갈궜거든? 근데 요즘은, 에이씨 그냥 늦으면 어때? 회사 그만둬버리지 뭐, 하는 생각으로 다니니까 좀 늦어도 뭐라 하지도 않는다니까.
여자 그럼 다행이네.
남자 이게 다 잘나가는 작가님이랑 결혼한 내 복이지 뭐.
여자 아무튼 그럼 잘 다녀오고.
남자 아 참, 오늘 조율사가 온다고 그랬나?
여자 응, 오늘이지.
남자 조율이 뭐라고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어.
여자 또 그런다. 비싼 만큼 비싼 값을 한다니까.
남자 그게 그렇게 어렵나?
여자 어렵지.
남자 저게 참 돈 먹는 하마구나.
여자 유일한 낙이 피아노 치는 건데. 피아노 없으면 글도 안 써진단 말이야.
남자 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 봐.
남자가 볼에 키스를 하고 나가고, 여자는 식탁에 책을 펼쳐두고 아침식사를 한다. 무대 서서히 암전.
2장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면 여자가 타자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난다.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면 조율사가 무대 안으로 등장. 조율사는 검은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었고 등 뒤에 첼로 혹은 첼로보다 조금 큰 현악기가 들었음직한 악기 가방을 메고 있다.
조율사 안녕하세요, 작가님. 한달 만에 뵙네요.
여자 이번 달도 정확히 아침 열한시에 오셨네요. 일분 일초도 늦지 않고.
조율사 저는 프로니까요. 프로는 항상 시간을 지키죠.
여자 그러게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대단하세요.
조율사 그럼 조율 준비할까요?
여자 네, 바로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조율사 좋습니다. 그럼 작가님, 의자에 앉아서 잠시만 대기해주시겠어요?
악기 가방처럼 보였던 케이스에서 조율사가 흰 공업용 장갑과 검은색 굵은 밧줄, 그리고 붉게 칠해진 두개의 길쭉한 몽둥이를 꺼낸다.
조율사가 능숙하게 여자의 몸을 의자에 검은색 밧줄로 묶고, 자연스럽게 두개의 몽둥이를 여자의 정강이 사이에 끼운다.
조율사가 막대기로 정강이를 비틀어 고통을 주는 전통적인 고문 방식, 한국에서 ‘주리를 튼다’고 부르는 행위를 시행할 준비를 마친다. 모든 직업의 전문가가 그렇듯이 조율사가 이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손동작 또한 마찬가지로 최적화된 동선으로만 구사되어 일말의 군더더기가 없다.
조율사 그럼, 저번 달에 끝났던 곳에서 시작할게요.
여자 (잠시 망설이다) 저… 잠시만요, 조율사님. 사실 오늘은 시작하기 전에… 음… 제가 마음에 걸렸던 점들이 몇가지 있어서…
조율사 네, 말씀하세요.
여자 제가 조율사님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몇가지만 좀 물어볼게요.
조율사 네, 얼마든지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고객님과 완벽한 동의를 거치지 않으면 조율을 진행하지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그런 점에서 저희는 완벽한 프로죠. 무슨 석연찮은 부분이라도 있으실까요?
여자 어제 자기 전에 누워서 스포츠 뉴스를 좀 봤는데, 저번 올림픽에서 약으로 메달을 딴 러시아 선수들이 좀 있었나봐요.
조율사 약이라고요?
여자 네, 신체 능력을 키워주는 약이요. 스테로이드라고 하나? 근육 강화제 같은 거라던데. 그게 적발돼서 올림픽위원회가 약을 한 선수들 메달을 전부 박탈한다나봐요.
조율사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러시아 놈들 너무 잘한다 했더니!
여자 그걸 보니까 두려워졌어요. 저도 그 러시아 선수들처럼 반칙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조율사 음…
여자 조율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맞으니까요…
조율사 두려워하시는 부분이 정확히 어느 부분이시죠? 반칙한다는 죄책감 때문인가요? 아니면 러시아 선수들처럼 수상이 취소되는 게 두려우신가요? 만약 후자라면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세요. 저희는 국가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공인된 전문직이니까요. 자격증이 발부된 사람만이 이 직업에 종사할 수 있죠.
여자 그건 아는데… 그래도 좀 뭔가… 제 글을 읽는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조율사 에이…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인간은 보상보다는 처벌에 더 크고 확실하게 반응한다는 걸요.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 지혜가 참 대단하셨죠? 예전에는 사랑의 매를 아끼지 않았잖아요.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된 뒤로 우리나라 학생들 학업 수준이 급락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죠.
여자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는 아동학대잖아요.
조율사 전혀 아닙니다. 서양 애들도 실은 뒤에서 몰래몰래 고문과 체벌을 하고 있는 거 모르셨죠? 걔네 그냥 쉬쉬하는 거예요. 제가 비교문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미국에서 밟았거든요.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