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주변성의 돌파

마샤두와 19세기 브라질 문학의 성취

 

 

호베르뚜 슈바르스 Roberto Schwarz

브라질 쌍빠울루의 깜삐냐쉬대(UNICAMP) 문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자본주의 주변부의 거장, 마샤두 지 아씨스』(Um Mestre Na Periferia do Capitalismo: Machado de Assis), 『잘못 적용된 개념들: 브라질 문화에 관한 에쎄이』(Misplaced Ideas: Essays on Brazilian Culture) 등이 있다.

* 이 글은 『뉴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2005년 11-12월호(통권 36호)에 실린 “A Brazilian Breakthrough”를 번역한 것이다. ⓒ New Left Review 2005 / 한국어판 ⓒ 창비 2008

 

 

옮긴이의 말

 

이 글은 19세기 브라질이 근대를 따라잡을 국가적 임무의 일환으로 적극 모방한 서구의 문학형식들이 흔히 거기에 부여되는 성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 양상을 브라질 사실주의 소설의 두가지 상반된 예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슈바르스는 브라질에서 근대사회의 통상적 지표들을 충실히 담고자 한 사실주의 소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식민지체제의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주변부 국가로서의 특징과 연관짓는다. 반면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마샤두 소설의 성취는 서구적 사실주의를 창조적으로‘반전’시킨 결과로 설명된다.

그의 논의가 지닌 강점은 미학적 층위와 사회·역사적 층위를 넘나들면서도 억지스럽거나 단순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특히 근대 대 전근대라는 도식을 벗어난 데 힘입은 것이다. 그는 19세기 브라질 사회에서 근대와 전근대가 갈등을 일으키지‘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런 식의 이상한 공존관계를 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파헤치려는 노력이 마샤두 소설의 특별한 미적 창조력을 낳았음을 입증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주장은‘보편적’문학형식이 주변부 국가의‘특수한’상황 때문에 굴절되었다는 식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보편적’핵심을 배반하는 상황에 이렇듯 별다른 갈등 없이 적응하는 문명의 보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여기에 대한 답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점이 마샤두로 대표되는 브라질 문학의 성취임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사실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슈바르스가 마샤두의‘반전된’사실주의 소설의 성과로 설명하는 내용들은 국내의 리얼리즘 논의와 연결되는 면이 많다. 19세기 브라질이 직면했던 중심과 주변의 문제가 여전히 살아 있는 현재적 사안이라고 본다면 이 글에서 생각의 단서들을 많이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황정아│이화여대 연구교수, 영문학

 

 

 


마흔의 나이에 주아낑 마리아 마샤두 지 아씨스(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1839~1908)는 지방적이고 다분히 관습적인 작가에서 세계 수준의 소설가로 자신을 변화시켜줄 서사장치를 발명했다. 이 도약은 통상 전기적(傳記的)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설명되곤 한다. 평자들은 당시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른 마샤두가 세상에 대한 환상을 잃고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옮겨갔다는 식으로 즐겨 말한다. 하지만 병에 걸려 미망을 떨치거나 새로운 문예사조를 받아들인다 한들 반드시 위대한 작가가 되라는 법은 없으므로, 이런 종류의 설명들은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문학형식의 변화로 본다면 논의의 틀이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마샤두의 혁신은 객관적 문제에 대한 미학적 해결책으로 보이게 되며, 이때 객관적 문제란 단순히 그의 작품들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브라질 소설과 사실상 브라질 문화 전반의 발전, 심지어 어쩌면 피식민의 역사를 지닌 사회 일반의 발전에 내재한 문제들이다.

교과서를 보면 대개 마샤두 지 아씨스는 낭만주의자들 이후에 등장해 이들의 환상을 무너뜨린 한편, 후대 자연주의자들의 현세적 물질주의 또한 예술적 오류라며 거부한 사실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이같은 분류는 대번에 반박당할 소지가 많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사실주의적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조류에 비추어볼 때 마샤두의 서사 스타일은 약간 구식이었고, 이는 상당부분 18세기 영국 문학과 프랑스 문학에서 발견되는 여담과 희극적 수사의 요소 탓이었다. 겸허하게 소재가 요구하는 바를 엄밀히 따른다는 사실주의적 이상(理想)에서 마샤두만큼 멀리 떨어진 작가도 없을 것이다. 한편 심리적 동기에 관한 그의 비관습적인 감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간 것이다. 이 감각은 무의식의 철학을 예견하면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둘 다를 넘어선 일종의 물질주의를 탐구했으며, 프로이트와 20세기의 실험들을 예표(豫表)했다. 마샤두는 삶의 저급한 측면을 선호하는 자연주의자들의 성향을 겉으로는 피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도리어 더 아래로 뛰어들었으며, 생리학과 풍토, 기질, 유전의 예속 대신 그보다 훨씬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사회 속의 정신적 예속을 다루었다. 마샤두와 자연주의자들 사이에는 분명한 경쟁구도의 면모가 있었고, 거친 소재를 선호하는 취향을 비롯한 자연주의자들의 허세는 결과적으로 다분히 순진하고 심지어 퍽 건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관습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마샤두를 반(反)사실주의자로 부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는 당대 사회를 포착하려는 야심을 사실주의의 독특한 정신이라 여긴다면, 분명 그는 위대한 사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견 반사실주의적 장치들을 활용한 사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복합성에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물론 왜 그런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역설이, 다시 말해 미적 장치와 그것이 묘사하는 삶의 내용 사이의 의도적인 부조화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이 본고의 논지이다. 즉 유럽의 사회사·문학사의 경로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내적 필연성을 상실하는 주변부 국가에서는 사실주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좀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근대적 형식들을 낳았고 어떤 의미에선 그러한 형식들의 전제가 되는 사회적 조건들이 나타나지 않는 지역에서 근대적 형식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형식이 우리 세계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을 그토록 멀리 가로지를 때 매우 불균등해질 수 있어서, 중심부에서 이미 죽은 예술형식이 주변부에서는 아직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격한 차이를 두고 유감을 표시할 수도, 반대로 만족감을 나타낼 수도 있다. 더 풍부한 색채와 의미를 지녔던 삶의 옛 형식들의 이름으로 진보를 한탄하든지, 아니면 닳아빠진 옷을 벗어던지고 시대의 분위기를 포착하지 못하는 후진성을 개탄하든지, 혹은 이 양자를 동전의 양면으로 싸잡아 내치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에 뒤처지고 싶지 않았던 브레히트(B. Brecht)는 아침에 크루프(Krupp)사의 공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노동자들을 뚫어져라 본댔자 사실주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단순한 현실반영으로는 더이상 현실에 관해 알 수 없다는 의미-옮긴이). 일단 현실이 추상적 경제기능으로 옮겨가면 더는 인간의 얼굴에서 현실을 읽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구분이 여전히 적나라한 전(前)식민지의 삶을 관찰하는 편이 훨씬 보람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체성 역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시장의 추상성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며 자발적 인식의 충만함이 허위임을 수시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필자가 살펴보려는 미적·사회적 영역은 국제적인 동시에 불안정하고, 문학형식을 흔히 미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상황에 뜯어맞추는데, 그 방식도 예측하기 힘들다. 문학적 사실주의와 관련된 질문들을 개별 작품이나 작품의 질에 관계없이 형식상의 꼬리표만 보고 답할 수 없다는 점은 쉽사리 수긍할 수 있다. 어쨌거나 오늘날에는 사실주의의 표면적인 특징들이 부자 나라 가난한 나라 가릴 것 없이 통속드라마와 2류소설, 영화와 광고에 편재한다. 하지만 이런 특징들은 사실주의의 진면목이 상실된 양상이며 고전적 사실주의가 지닌 신뢰성과 복잡성을 멜로드라마나 상업적 유인책의 반복과 단순화된 도덕적 진술들로 바꿔놓는다. 모더니즘 작가와 비평가들이 한 세기 전에 지적한 대로, 한때 새로운 것을 파악하고 그것에 충실할 수 있었던 사실주의의 역량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사라진 것은 거꾸로 사실주의의 전성기에 포착된 사회와 사회적 동력인지도 모른다. 후대의 평자들이 그런 식의 포착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고 심지어 그것이 예술적 포부라는 것마저 부인한 사실은 바로 이런 변화의 일부다.

 

 

몇몇 결정적 계기들

 

이런 상황에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가지 측면이 있다. 브라질의 비주류 문학사가들은 예전 식민지였던 이 나라가 독립국이 되면서 많은 점에서 옹호하기 힘든 (아직 브라질까지 도달하지 않은 진보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브라질 특유의 문학적 지형이 유럽의 문학 유파에 새로운 과제를 부과했고 그럼으로써 이런 유파들을 부지중에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그 변화 중 일부는 안또니우 깐지두(Anto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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