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황석영의 근작소설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황석영(黃晳暎)이 『무기의 그늘』(형성사 1988) 이후 십수년만에 내놓은 『오래된 정원』(창작과비평사 2000)과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은 1989년의 방북 결행과 더불어 그에게 강요된 오랜 망명과 유폐의 시절이 혹독한 산고의 진통기였음을 확인시켜준다. 독자에겐 안타까운 침묵의 공백기로 보였던 그 시기를 작가가 온몸으로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사적 격변의 소용돌이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치열한 내성으로 천착하여 그 자신의 작품세계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의 징후를 짚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지만,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두 소설이 나온 싯점과 작품 속의 시간을 두루 관통하는 착잡한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소설 모두 역사의 급류에 거슬러서 멀고도 가까운 과거의 체험을 되새기는 양상을 띠거니와, 그처럼 시간을 역류하면서 바로 그 역류에 힘입어 다시금 현재의 의미를 되묻는 서사의 기본동력은 우리의 현대사를 짓눌러온 안팎의 위기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손님』의 배경이 되는 한국전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운명을 규정하는 위기의 진원지로 남아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작품 발표 직후 세계를 강타한 9·11테러의 역풍으로 북한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전쟁의 위협마저 가해진 것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굳어진 냉전체제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여전히 열전의 취약한 고리로 묶여 있음을 섬뜩하게 일깨워준 사건이다. 이로써 민족자존의 평화통일을 제약하는 일차적 요인이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외세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된 셈이지만, 그럴수록 남과 북을 막론하고 우리 자신에게 구조화된 적대의식을 극복하고 주체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전쟁의 참상을 통해 내면화된 폭력성을 주체형성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해부하는 『손님』은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처한 위기의 뿌리를 되짚어보고 그 극복가능성의 주체적 조건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오래된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외연은 한층 더 착잡하다.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한 7,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일단 정권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싸움의 주체들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난날의 열정과 변화된 현실 속의 일상 사이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찢어지는 분열을 어떤 형태로든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한 고투 자체만으로도 삶이 충만했던 과거의 기억을 곱씹는 것이 현재의 상실감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수많은 후일담 소설의 종적이 말해준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대안적 이념’의 모색은, 각기 다른 처지에 있는 타인들과 공유할 만큼의 넉넉한 품을 마련하기 전에는 타락한 현실로부터 자기 양심을 지키려는 자구책에 그치지 쉬운 것도 사실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이 혼란을 망명지에서 혹은 감옥의 쇠창살 너머로 지켜보면서 황석영은 “우리가 겪은 일들을 미래나 예견에 사로잡힌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이끌어내오기 위한 구체적인 과정”(『오래된 정원』 후기)으로 그리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퇴로가 차단되고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러한 구상은 ‘현실의 변화’를 기획하려는 의도가 앞설 때 ‘미래나 예견에 사로잡힌’ 주체의 정당화로 다시 회귀할 악순환의 위험을 안게 마련이며, 그것은 후일담 소설이 예외없이 빠져든 함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그 함정을 지혜롭게 비켜가면서 과거로의 아슬아슬한 여행을 끝까지 밀고 가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에게 친숙한 ‘리얼리스트’ 황석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2

 

『오래된 정원』을 이전의 황석영 소설과 비교해볼 수 있는 얼마간의 단서는 『무기의 그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을 7, 80년대 황석영 리얼리즘의 정점에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베트남 전쟁의 총체적 성격을 정확한 역사적 원근법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사업주체’로 나서서 벌이는 베트남 전쟁의 제국주의적 실상은 일찍이 브레히트(B. Brecht)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에서 전쟁을 ‘치즈 대신 탄약을 사용하는 장사’라고 갈파한 것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으며,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는 베트남 해방전사들의 움직임이나 미군에 의해 양민에게 가해지는 야만적 잔혹행위 또한 한국인의 눈으로는 최대치의 극적 단면들로 포착되어 있다. 팜꾸엔·팜민 형제처럼 한 집안의 형은 부패한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노리는 남베트남군 장교로, 그런가 하면 동생은 장사꾼으로 위장한 해방전선 투사로 갈라서 있는 기구한 사정도 그저 재미를 더하기 위한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래 베트남의 해방투쟁은 언제나 외세를 등에 업은 반민족세력과 그에 맞서온 민족세력 사이의 집안싸움이기도 했다는 처절한 민족사적 비극의 축도이다. 또한 실력가 팜꾸엔과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팔자를 고쳐보려는 오혜정은, 가령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새」(『세계의 문학』 1976년 가을호)에 등장하는 마음씨 고운 기지촌의 작부가 자신을 파멸시킨 전장을 기회로 삼아 발버둥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의 굴레를 짐작케 한다.

빈틈없이 구축된 이러한 입체적 조형성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작가가 작중의 모든 인물에게 이 전쟁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몫의 운명만 허용한 결과이다. 이 소설의 한계로 지적되어온 ‘방외인의 시각’이라는 것도 그렇게 보면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공시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전지적 작가의 개입에 따른 것이다. 가령 안영규가 투이의 처형에 분노하면서 탐민을 쏘아죽이는 장면도 그렇다. 안영규의 용병노릇을 하는 투이가 해방전사들에게 처형당하는 욕된 죽음은 똑같이 용병으로 끌려온 영규 자신의 욕된 처지를 되비추는 거울이며, 뒤이어 탐민의 아지트로 달려가 대상 없는 표적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조건반사적 공격성의 분출은 따라서 투이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깨진 뒤에도 영원히 살아남을 치욕에 몸부림치는 발작이다.1 순결한 영혼의 해방투사 탐민의 죽음이 그처럼 자학과 가학이 뒤엉킨 광기의 폭력에 희생된 무수한 베트남 인민들의 비극적 초상임은 물론이다. 독자로서는 안영규와 탐민의 이 유일한 만남이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길 애타게 소망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냉철하게 묻는 작가의 양심적 자기검열은 객관적 리얼리티에서 벗

  1. 그런 의미에서 투이에 대한 안영규의 자기동일시는 “이 전쟁에서 한국인이 처한 곤혹스럽고 모순된 처지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철 「제국주의와 정치적 무의식」, 『구체성의 시학』(실천문학사 1993) 9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