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임화의 삶과 문학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모래 위의 시간』 등이 있음 mwyom@ynu.ac.kr
* 이 글은 지난 10월 17일 개최된 임화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총론으로 발표된 발제문을 필자가 보완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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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이 제목은 저 엄혹하던 시절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지하 출판된 책에 붙여진 것이다. 대표저자는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이었으나, 실은 당시 광주에서 문화운동에 종사하던 활동가들과의 공동작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제목은 세겹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는 군부권력에 의한 시민학살의 사실, 즉 무고한‘죽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죽음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항쟁중에 벌어진 허다한 살상은 단순히 정치군부와 광주민중의 우발적 충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심층에 역사적으로 축적된‘시대의 어둠’, 즉 우리 현대사의 잠재된 모순을 표상한다. 셋째, 그 제목은 비극과 모순을‘넘어’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전망과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은 1987년 6월에 일어날 사건의 예감을 이미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 제목의 이러한 복합적 암시성을 나는 여기서 임화(林和, 1908~53)의 삶과 문학을 반추하는 거울로 삼고자 한다.
다들 인정하는 대로 임화는 살아서 활동하는 동안에나 비명에 죽은 지 55년이 된 지금이나 우리 문학사상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는 불과 스물서너살의 젊은 나이에 카프(KAPF, 1925~35)의 서기장이 되어, 일제시대 유일의 문예단체라 할 이 조직을 사실상 끌고나갔다. 그는 카프를 대표하는 시인들 중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날카롭고 공격적인 수많은 평론의 집필로써 우리 근대문학비평을 건설한 주역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카프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카프의 간부답게 명확한 당파적 입장에서, 그리고 카프의 해산이 강제된 뒤에는 식민지 현실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해가면서 반대파와의 문학이론적 공방을 거듭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비평적 생애는 논쟁의 연속이었고, 그의 비평담론들은 그때그때의 실천적 필요를 반영하는 미학적 처방이었다. 1930년대 말경 정세가 더 악화되어 이론투쟁의 공간이 극도로 좁아지자 그는 현실과의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적은 역사적 연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가 구성한 신문학사론은 이후 모든 근대문학사 연구자들에게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계승 또는 극복의 대상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일제말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했듯 마지못해 친일어용단체에 이름을 걸고1 앙앙불락 세월을 보내던 임화의 인생에 8·15해방은 극적인 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는 놀랍게도 일제의 항복선언 불과 이틀 뒤인 8월 17일에 김남천(金南天)·이원조(李源朝)·이태준(李泰俊) 등과 함께‘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었다. 카프 해산 이후 10년간 접었던 조직운동에 복귀한 것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그는 누구보다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1947년 11월 월북하기까지 언제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해방후 재개된 그의 운동노선과 활동방식은 카프시대와 비교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현실과 동떨어진 과격한 계급주의를 지양하고 광범한 계급연합에 기초한 민족문학-민족문화의 건설을 이념적 목표로 삼게 된 점이다. 이것은 임화의 노선에 대한 반공냉전시대의 음해성 비방과 달리 중간파를 포섭하기 위해 급조된 전술적 위장이 결코 아니다.2 그는 이미 1930년대 후반 카프운동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박래품(舶來品) 계급주의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있었고, 신문학사 연구 및 출판사 학예사(學藝社)의 운영경험을 매개로 민족문화 전통의 근본적 중요성에 깊이 눈뜨고 있었던 것이다.3 물론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활동은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전망이 약화됨에 따라 점점 더 정치화되고 급진화되어 초기의 포용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 해방후 임화의 문학-문화운동은 정치적 지도부와의 명백한 위계적 연결 속에서 전개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민족문학론은 한편으로는 방금 지적했듯이 카프식 계급주의의 반성을 통한 이론적 자기쇄신의 산물로 획득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지도자 박헌영이 8월테제에서 제시한 이른바‘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단계’론의 윤곽 안에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일제시대의 국내 좌파운동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조직 내부의 파벌주의 및 객관적 조건의 미성숙 등으로 인해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했으나, 부문운동인 카프가 오히려 상대적 독자성을 발휘해-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국제조류에 끊임없이 우왕좌왕하면서도-그 나름의 지속성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반해 해방후의 문화운동은 임화의 예에서 보듯이 현실정치의 격변과 갈등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러한 변화는 임화가 생산한 각종 문학텍스트의 성격변화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건대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상황의 압박과 실천적 임무의 과다는 그에게 글쓰기를 위한 충분한 숙고와 사색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후 그의 글에는-시든 산문이든-급변하는 정국의 필요에 부응하는 시사성(時事性)과 정론성(政論性) 및 그 결과로서의 선전·선동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지난날에도 그가 관조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거나 한가하게 세월을 보낸 적은 없었다. 길지 않은 일생 동안 그가 소화해낸 활동량은 실로 경이에 값한다. 특히 1933년경부터 십여년 동안 그는, 때로는 당파성 과잉 때로는 논리적 섬세성 결핍의 혐의를 받을 만한 부분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서와 사색과 집필에 혼신의 열정을 쏟고 있음을 입증하는 다수의 평론을 써냈고, 이를 통해 그는 부단한 이론적 전진을 거듭했다. 그런 점에서 임화의 1930년대는‘한 비평가의 지적 성장과정’이 곧‘근대적 비평문학의 형성과정’에 해당하는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4. 임화의 비평세계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임화전집을 준비중인 소명출판의 호의로 신두원·하정일 두 분이 꼼꼼하게 교열한 『문학의 논리』(학예사 1940) 미수록 평론들을 미리 훑어본 바로는, 임화는 우리 근대문예비평의 건설자라는 호칭을 들어 마땅한 존재이다. 그는 창작의 현장에서 수다한 월평·연평 들을 썼을 뿐 아니라 이런 실제비평의 논리적 일반화로서 세태소설론·본격소설론·생산소설론·리얼리즘론 등을 구성했고, 카프시대 문학의 관념성과 공식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인직(李人稙)·이광수(李光洙) 등 신문학 초기 작가들의 역사성을 재평가하고 이를 「신인론(新人論)」(『비판』 1939.1~2), 「소설과 신세대의 성격」(『조선일보』 1939.6.9~7.2), 「시단(詩壇)의 신세대」(『조선일보』 1939.8.18~26) 등에서 주목한 신세대문학의 현재성과 연결함으로써 신문학사의 줄기를 설계할 수 있었다. 그가 신문학사의 방법론으로 제출한 소위 이식문학론(移植文學論)은 얼마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승엽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창작과비평』 1991년 가을호)과 임규찬 「임화‘신문학사’에 대한 연구 1, 2」(『문학과 논리』 및 『한길문학』 1991)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잡지문화론」(『비판』 1938.5), 「문학과 저널리즘의 교섭」(『사해공론』 1938.6), 「문화기업론」(『청색지』 1938.6), 「문예잡지론」(『조선문학』 1939.4~6), 「신문화(新文化)와 신문(新聞)」(『조광』
- 임화의 친일문제는 논쟁적인 주제의 하나이다. 1953년 8월의 북한 군사법정에서 그는, 1934년 카프 2차 검거사건 때 이미 자신이 일제에 영합할 마음을 품었고, 1939년에는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일본어 논문을 발표해 본격적으로 친일에 나섰다고 진술하고 있다. 김윤식 『임화연구』, 문학사상사 1989, 699~700면 자료 참조. 그러나 1940년 전후 임화의 글과 행적을 검토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그의 친일에 부정적 내지 회의적이다. 예컨대 김용직(金容稷)은 임화가 일제식민지 당국의 국책(國策)에 카프시절처럼 단호하게 저항하지는 못했어도 결코 동조적이지 않았음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김용직 『임화문학연구』, 새미 1999, 115~28면. ↩
- 다음과 같은 서술에도 그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듯하다: “임화의 이와같은 부르주아혁명단계이론과 그에 따른 문화통일전선론은 물론 계급문학운동의 위장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김용직, 같은 책 148면. ↩
- 학예사에서 간행한 조선문고(朝鮮文庫) 제1권은 김태준(金台俊)의 해설논문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과 임화 자신의 「예언(例言)」 등이 권두에 붙은 『원본 춘향전(原本春香傳)』(초판 1939.1.10)이다. 1953년의 법정진술에 의하면, 임화는 2년간의 마산 요양 끝에 1937년 9월 상경해 다음달 금강기업 주인이던 최남주(崔南周)의 자금지원으로 학예사를 설립 운영했다. 발행인 최남주의 이름으로 된 「조선문고 간행의 辭」는 1938년 11월에 씌어졌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원본 춘향전』 제3판(1941.3.12) 뒤에 실린‘기간서목(旣刊書目)’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데,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학예사의 출판활동이 상당히 높은 수준과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는 것, 임화가 김태준 등의 고전문학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해방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주력부대가 그때 이미 임화 주위에 은연중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응수(李應洙) 편주 『상해 김립시집(詳解金笠詩集)』, 김태준 교열 『청구영언(靑丘永言)』, 김태준 교주 『고려가사(高麗歌詞)』, 임화 편·김재욱(金在郁) 해제 『조선민요선』, 김태오(金泰午) 편 『조선전래동요선』, 신귀현(申龜鉉) 역주 『역대여류시가선』, 임화 편 『현대시인선집』, 김태준 저 『증보 조선소설사』, 김재철(金在喆) 저 『조선연극사』, 서인식(徐寅植) 평론집 『역사와 문화』, 김기림(金起林) 시집 『태양의 풍속』, 김남천 단편집, 이효석(李孝石) 단편집, 유진오(兪鎭午) 단편집, 이기영(李箕永) 단편집, 박태원(朴泰遠) 단편집, 채만식(蔡萬植) 단편집, 안회남(安懷南) 단편집, 이태준 단편집, 김태준 편 『이조가사(李朝歌詞)』. 이 중 마지막 책은 인쇄중이라고 되어 있어 미간(未刊)임을 알 수 있다. ↩